드라마 자체를 워낙 힘들어하는 성격 탓에 밤 10시에 하는 드라마타임을 지키지 않습니다. 때문에 유행의 중심에 서는 드라마 들은 한창 뜨고 난 다음에 아는 편이죠. 최고의 사랑이 그랬고 오늘 이야기 할 뿌리 깊은 나무도 그렇습니다. 늦었지만 뿌리 깊은 나무를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참 이런 왕이 있다면입니다.

  하지만 지금 드라마의 전체 스토리를 적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1022일 뿌리 깊은 나무의 마지막 편을 감상하면서 하루에 있었던 많은 생각들(특히 나꼼수의 정봉주 깔때기가 진짜 깔때기로 변하는 사건에 대한 사건)을 마무리 해주는 묘한 생각 덕에 키보드를 두들깁니다.

  

1. 세종대왕 이도와 밀본 정기준의 마지막 대화

  만약 정기준이 (슈욱 하는)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서 객사하며 호위무사의 품에 안긴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자신의 지난 일을 반성하며 착하게 살자.’하면서 마무리 되었다면 이 시간에 그저 밥 메뉴 걱정이나 하고 있지 않을 까 합니다. 참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이렇게 그냥 죽지 않아서.


 여튼 부상을 당한 밀본 수장 정기준은 비밀 통로를 이용해 궁 안 왕의 의자에 앉습니다. 또 그곳에서 세종대왕 이도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정기준 앞에서 왕의 첫마디는 당신 덕에 백성을 사랑할 수 있었다.’ 고백합니다. 당연히 정기준이 왕의 품에 안겨 사랑의 눈빛을 주고받는 본격적 멜로 막장이 아닌 이상 이 대화의 시작에서 무겁게 느껴지는 주제감은 극을 더 극적으로 만듭니다.


멜로는 이래야 제맛.


(아래 접어놓은 내용은 이도와 정기준의 마지막 대화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의 줄거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정기준이 한글의 반포를 막으려는 세력임을 그리고 왕 이도는 한글을 어떻게든 반포하려는 두 세력의 역사를 한 대화에 압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다소 극의 마지막이 칼부림과 피바람으로 약간 어색해지기도 했지만 이 드라마가 설정해 놓은 절정의 해소는 조용하고 어두컴컴한 궁의 한 곳에의 두남자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의 장을 그리고 그 내용을 곱씹어보고 싶었습니다.

   


2. 확대해석1 - 정기준이 왕의 자리에, 왕은 그 아래에 있었다.

  이 절정의 마무리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무엇보다 이도와 정기준의 위치 선정입니다. 왕인 이도는 아래에 서있습니다. 무엇인가 알고 쫒아 온 것처럼. 그리고 신하인 정기준은 왕의 자리에 있습니다. 권력의 기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바뀌어 있습니다. 역적이 왕의 자리에 앉아있고 왕이 그 자리로 들어옵니다.

  단지 극의 줄거리 상 정기준이 먼저 그 장소에 입장했기에 왕의 자리에 앉힐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자리는 권력의 상징입니다. 심지어는 정치에서 어떤 발표자를 둘러싼 위치만 에둘러 보더라도 그 권력 구조를 셈할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

  정기준이 갖는 마지막 죽음의 장소는 왕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를 질책하는 왕은 아래에 있습니다. 극을 처음부터 시청했던 사람이라면 이 자리배치는 당연한 것입니다. 극 내내 왕은 그 자리에 편안히 앉을 수 없었죠. 오히려 백정의 의자에 앉은 정기준이 더 왕 같은 권력을 행사합니다.

정기준은 왕의 자리에서 왕을 맞이합니다.


  그리기에 마지막 그 궁 안의 마지막 방이란 장소는 오히려 더 현실적입니다. 권력의 중심이 왕의 자리에, 그리고 그 자리의 원래 주인인 왕이 서있는 모습으로 반영된다고 봅니다. 동시에 그 장소는 조금 더 희망이 반영된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가짜이지만 힘을 휘두르는 권력자는 죽고 약하지만 진짜인 권력자(이도)는 제자리를 찾습니다.

  2011. 지금 어떤가요. 헌법상 왕인 국민이 헌법상 권력의 자리에 앉아있나요?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그 시간 혹은 그 장소가 있을까요? 전 있다고 봅니다. .

분명 이 희망의 장소는 언제든 도래합니다.


   

3. 확대해석2 - 권력자의 변명과 왕의 귀환

  백성의 왕, 혹은 헌법상 왕과 권력자와의 쓰라린 대화를 보면 그 희망의 시간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정기준이 이도에게 내뱉는 대화 중에서 한글을 통해 백성들은 더 속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결국 속아 이용당하는 말 알아듣는 개새끼로 백성을 비유합니다. 아무리 지혜를 갖더라도 결국 선동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왕의 반론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어떨 때는 이기고 어떨 때는 속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지기도 하겠지

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역사니까 또 지더라도 괜찮다. 수많은 왕족과

지배층이 명멸했으나 내 백성들은 이 땅에서 수 만년 동안 살아 왔으니까

또 싸우면. 되니까.

-세종대왕 이도 in 뿌리깊은나무-


  ‘또 싸우면 된다.’는 이도의 결론은 참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부분입니다.

  이때 드는 생각은 뿌리 깊은 나무에서의 한글‘SNS’혹은 진실이란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 이는 상당히 재미있는 대응이 나옵니다.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트위터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조선의 한글이 반포된 것과 같은 엄청난 전파 속도와 정보력을 제공합니다. 그 무서움은 정기준, 즉 권력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정치적인 판결로 유죄가 되었다는 의견이 SNS로 퍼지고 있습니다.


  특히 22일은 BBK스나이퍼라는 정봉주의 구속 확정 판결이 난 날입니다. 억울한 판결이야 언제든 법조계의 문제였지만, 오늘은 그 이전과는 다른 움직임이 보입니다. 바로 트위터-페이스북등 SNS의 힘입니다. 그들은 징역 1년의 사건에 분노하고 기억을 다짐합니다. 약자의 논리로 잊혀지며 끝났던 지난 사건들과 다르게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현실이 이제는 세상으로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되고 있습니다.

  '개인은 영리하나 집단은 우매하다.'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이 갖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한글을 통해서 먹통인 백성이 말하는 백성이 되었고, 정치 관심없던 집단을 표현하고 분출하는 SNS 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리한 집단의 시작입니다.

  또한 일전에 보수언론에서 트위터와 나꼼수를 괴담의 근거지라고 했습니다. 그말이 일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현실에서도 어떤 의도속에 속는 일 많죠.(문제는 그 가해자가 권력층이란 것이 문제이고요. 댓글 알바같은) 그렇기에 정기준은 한글로 인해 백성들을 기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경고합니다. 지배층의 변명은 동일합니다. 그런 현실에 당당히 헌법상 왕으로써 대처할 수 있는 대답이 바로 이도가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아도 좋습니다. 져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역사이고 또 싸우면 됩니다.

그럼 정기준이 왕의 자리에 있더라도 그 앞에서 당당한 이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의의 최후를 맞이하는 희망의 방이 곧 열리겠죠.

당당한 이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전글 /

  이전 글을 통해 “독립적으로 선택”을 찾기 위해 많은 실험들을 반례로 들면서 예언과 선택의 서로의 상관관계를 파악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하는 선택에서 기본적으로 예언이 갖는 위치는 상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의 삶에 종속되지 않듯이 선택이 예언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영향력이 클 뿐이고 예언의 힘이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혹은 본능)의 영역에서도 작용하기 때문에 여러 실험으로 마주하는 결과가 예언에 힘을 실리는 것이죠.

  이제는 반대로 나가려고 합니다. 나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는 예언의 성립하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신에서 찾을 생각은 없습니다. 신을 근거로 들기에는 전 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그리고 하나의 교실 안에서 조차 어느 누구도 반론하지 않는 신을 증명하기에는 제가 누구말대로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확실히 말하지만 지금부터 언급되는 ‘예언’은 좁은 의미의 종교적 색체가 강한 것이 아닌 행동을 만드는 기저 상황인 넓은 의미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14. 예언의 성립 조건 - 합리성

  예언의 조건은 여러 면에서 추측이 가능합니다. 가장 먼저 예언은 ‘과정의 합리성’이 있어야 합니다. 일부 예언은 합리적인 면이 상실되면 그것은 예언으로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 신화나 혹은 우리의 우화들 그리고 성경들을 예로 들자면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조건이 없을 수 있겠지만 번개를 다스리는 ‘제우스’가 있고, 말하는 ‘미운 오리’가 있고, 또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 인과관계는 달라지지만 그 과정의 합리성은 완성됩니다. 만약 합리성 없는 예언이라면 그것은 그저 주어가 없으니 사실이 아니라는 변명 같은 일이겠지요.

아무리 신화적인 이야기도 그 안에 합리성을 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말하는 미운 오리’가 있다면 태생적인 문제가 있는 자신에 대해서 통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은 전혀 합리성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만 말을 하는 오리일뿐 그 과정 그리고 그곳에서 얻는 예언들 그리고 그 성취는 공감이 가는 교훈 혹은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이 합리성이 아예 없다면 그것은 예언의 규모도 될 수 없을 뿐이고 그 가치 또한 얻기 어렵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렸던 예언이 그 의미나 가치를 획득한 것은 식민지 상태의 이스라엘이 ‘상상할 수 있는 메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합리성 때문입니다.

 

15. 예언의 성립 조건 - 비합리성

  하지만 오히려 완벽한 논리의 조건과 추측은 예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나는 내일도 아침에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겠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예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조건의 확률이 아주 높은 쪽에 대한 판단일 뿐입니다. 즉 현실 그 자체는 예언에 속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약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힘껏 발길질하는 아이의 태동을 보면서 축구선수를 보면서 체육인으로 키워 냈다면 그것은 ‘예언’이 될 수 있습니다.(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말이죠.)

  기독교의 메시아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아가 아무나 될 수 없기에 이것은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아예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비합리적인 면이 예언의 지위를 확립시켰고, 예수의 행적에 권위를 주는 것입니다.

신이 죽는 이 장면은 절대 비합리적이지만 그렇기에 신이 될 수 있다.


  예언에 대해서 이 두 가지만 생각해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둘을 모순 관계이라는 것 있습니다. 즉 예언은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언의 그 과정의 합리성을 그리고 현실과 너무 부합하면 안 되는 비합리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하기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이라는 존재는 모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합리성과 비합리성이 부딪치는 이 상황에서 예언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 모순관계에서 예언이 그 위상을 유지하는 데에는 사람들의 한자기 독특한 습성이 있습니다.

   

16. 모순과 상관없는 예언? - 인지 부조화 이론

  하지만 보통 예언이라고 하면 느끼는 것은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그 능력이 나온다 합니다. 이는 예언이 성립이라는 것을 갖추었을 때 힘은 얻는다고 오해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성립을 하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예언의 조건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성립이란 조건이 없이도 예언은 그 위상을 잃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성립이 없는 예언’이라고 하면 ‘신성 모독’이라고 할 것 같은 예상에 한 가지 심리학 이론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지 부조화 이론’입니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람들이 어떠한 태도들이 또는 태도와 행동이 서로 모순인 관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이 그 태도에 대해서 반성하기 보다는 그 태도를 유지하게 되는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그 원인은 일관성이 깨지는 것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바로 종말론자입니다.

사람의 인지 않에 모순 혹은 부조화가 생기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2000년 밀레니엄이라는 ‘산술’적인 모델 앞에서 많은 이들은 종말을 논했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종교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산술적인 장난은 신이 될 수 없었고 이에 많은 이들이 종말론 자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무엇이었을까요? 반성 보다는 자신들의 말들을 위해 행동합니다. 완벽한 부조화입니다. 그 실체나 판단보다는 먼저 경험했던 행동이나 그 태도가 바로 그들의 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합리성을 버리고 비합리성만을 갖은 예언을 따라가는 것이죠.

  그들은 예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순적이 부조화라도 말입니다. 즉, 예언이란 것은 부조화 혹은 실현과는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혹은 그것이 더 강할 수도 있습니다. 실현된 예언은 검증이라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처럼.

   

17. 모순이 완성하는 예언 - 2012년 또 다른 종말론을 맞이하며

  2012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은 또 다른 예언들이 넘쳐날 듯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마야인 들의 달력 덕분이죠. 이는 합리적인 마야의 계산법에 비합리적인 종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언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개인의 몫입니다. 혹은 이루어지지 않은 종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조화이론의 실천을 통해 계속 믿는 것 역시 개인의 것입니다.

2012년 종말을 이야기 하는 영화 '2012'


  다시 말해 예언과 성립은 상당히 중요한 합리적 고리이지만, 그것이 성립이 되지 않는 모순을 겪더라도 사람은 그 예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모순이 더 깊은 믿음과 행동의 근거가 됩니다.

  즉 이런 인간의 부조화적인 심리적 방향성이 합리성과 비합리성이라는 두 가지 모순으로 만들어지는 예언을 더 강하게 완성시킵니다. 또 그 예언은 우리가 이전 글까지 언급한 대로 선택에 가장 중요한 기저가 됩니다.

  이슬람종교가 여타 종교보다 더 많이 소유한 규제 및 행동 규약 들은 사실상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무신론자들이 보기에는 기독교인이나 불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모순적인 행동의 근원은 비합리적이라도 어떤 하나의 ‘예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언’의 비중이 높은 종교가 더 큰 충성심을 보이곤 합니다. 그리고 이 충성심은 행동에 대해서 더 강한 선택을 유도하게 합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입니다.(르네마그리트 )

  따라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언은 인지적인 조화이든 인지적 부조화든 혹은 성립이든 그것이 아니든 예언은 선택을 종용합니다.

 




어쩜 후광효과부터 피그말리온 효과는 예언을 바라는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선택을 꿈꾸는 이 글의 목적을 되새겨 보면 이 본능에 대해서 더 살펴보면 어느정도 자율적인 선택을 꿈꾸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희망적 생각[각주:1]을 첨부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얼마나 예언에 밀접해 있을지가 가장 먼저드는 고민입니다. 삶의 모든 시간에 대한 것은 이미 오랜시간 혹은 그 전에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바랍니다. 지금 이 의문과 넋두리는 종교적인 어떤 부분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선택이 예언에 종속되는 기본적인 매커니즘이 중요합니다.

즉 종교적 의미의 예언보다는 지금 우리에게 끼치고 있는 비종교적 예언과 선택의 매커니즘에 집중 되어야 합니다.


11. 예언을 원하는 기본적인 본능, 뇌바보

먼저 우리가 예언을 원하는 기초적인 본능은 어디서 나올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정말 그 기초를 잡았다면 저는 지금 스위스에서 상 받을 준비를 하고 있겠죠? 최근에 우연히 어떤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제가 보는 신문은 아닙니다만 SNS의 힘으로 접하게 된 것이요. 바로 '뇌바보'입니다.[각주:2]

이 '뇌바보'는 말 그대로 뇌가 바보라는 것에 대한 것으로 이에 대한 언급은 간단한 행동으로 설명 합니다. 이 글의 저자가 강연할 시에 한 학생을 일으켜 세워놓고 이런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라고 공지 한 뒤에 "당신은 능력이 있으며~"라고 말합니다. 즉 거짓말이라고 하고 나서 세상의 온갖 칭찬을 다하는 거죠. 결론은요? 아시겠지만 거짓말을 들은 그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 더 정확히 말해서 뇌가 기분 좋아 집니다. 개인적으로 이 사실을 접한 저는 너무나 신기해 보였습니다. 바보처럼 말입니다.


뭐 그냥.. 뭐... (출처 : 뉴스뱅크이미지)


그리고 이어지는 근거 실험에 대한 설명은 더욱더 흥미를 끌었습니다. 실험은 1995년의 실행된 실험으로 뉴욕대학에서 실시된 심리학 실험입니다. 7.5m의 통로를 지나가는 실험인데, 젊은이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결론은 평균 7.3초. 이 실험은 심리학 실험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통로를 걷기 전에 노인에 대한 문제를 풀었고 통로를 지난 시간은 앞 선 집단의 평균보다 1초 이상 웃돌았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은 두 집단이 있는데 한 집단에게는(줄여서 무례집단) '무례하다. 침입하다.  공격적이다' 같은 단어를 한 집단에게는(줄여서 예의집단) '예의바르다. 정숙하다. 양보하다.'의 단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다음 실험을 받게 한다며 다른 장소로 이동시킵니다. 실험은 여기서 시작되는데, 앞 선 두 사람이 이런 저런 문답을 계속 이어나가고 피실험자는 그들을 기다립니다. 결론이 예측되시죠? 무례집단은 5분 정도 안에 끼어들어 대화를 시도하고 예의집단은 10분 이상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뇌는 정보에 무기력한 바보입니다.



'노인이란 단어', '무례한 단어', '예의바른 단어'가 대체 무슨 일을 꾸민 것일까요? 그것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몇 개의 단어가 뇌에게 직접적인 반응을 유도하게된 것입니다. 네. 본능적으로 받아들인 예언입니다. 우리의 뇌는 이미 그냥 지나가는 몇 개의 단어에 사로잡혔습니다.


12. 바보가 하는 선택? - 뇌바보와 사이비 종교

바보인 뇌는 몇 개의 정보를 실재적인 자신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성격 마저 지나가는 몇개의 흘러가는 정보를 통해 형성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는 교육적 의미로 엄청난 현실입니다.[각주:3] 우리가 주변의 상황에 오류를 범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우리 자체가 상황, 혹은 작은 예언들을 따를 수 밖에 없는 본능이란 것입니다.

최근의 시사 고발 TV에 한 수련원을 보게 되면 이런 본능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종교적 행사중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는 데 이 고백이 정말 판타스틱합니다. '수련원의 돈 3억을 횡령했다.'부터 시작해서 '도둑질을 했다.', '원장을 살해하려 했다.' 등[각주:4]의 말은 반복적으로 듣고 반복적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결론은 예상하는 그대로 입니다.

H수련원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들은 그 3억을 갚기 위해서 수련원에 돈을 내고 기부를 하며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충성합니다.

그들이 과연 멍청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또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종교인은 집단 최면과 흥분 상태를 이용한 것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메시아의 통로라는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 뒷면에서는 수많은 성적 도착증을 보인 이야기도 나옵니다. 당했던 사람들을 모아보면 극히 정상적이고 혹은 더 존경을 받는 위치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있다면 절대로 이 교주같은 목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실재로 녹회된 영상에는
아방가르드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비상식적 결과를 도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상식 그 이상입니다. - '그것이 알고싶다' 스틸컷



사람은 들어오는 정보가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더라도 그 안에 '정보[각주:5]에 대한 믿음'이라면 어떤 논리적 설명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쩜 뇌바보에서 부터 나오는 인간의 수동적 선택의 본능일 것입니다. 이런 본능의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택에 대해서 수동적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에게 '자유러운 선택'이란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13. 예언과 선택

선택을 사로잡기 위해서 예언을 언급했습니다.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우리가 선택을 하는 일에 대한 것을 약간 이나만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예언을 언급할 것 입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어쩌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반(反)자유'이고 나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일 수 도 있습니다. 이에 비관적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어 라고 말 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제가 '선택'을 계속 궁지에 밀어 넣은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근거가 없는 의미 있는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의미 있는' 선택이란 단어의 정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린 올바른 선택을 하기에 앞서 올바른 근거를 찾아야 하고, 그 올바른 근거를 찾기 위해 예언을 찾았습니다. 꼭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내용이 아니라도 예언은 개인에게 존재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예언의 기원을 찾다보면 분명 선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것입니다.



물론 언급한 '예언'은 사전적 단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포괄적인 것입니다. 어떤 선택과 판단의 근거가 되는 그 이전에 선택된 것으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선택에 강요되는 부분을 지칭하는 단어로 썼습니다. 이런 예언이 없이 우리가 판단할 구석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홀로했다고'믿는' 선택보다는 그 근거 다시 말해서 선택 이면의 예언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뇌바보에서 보는 것 처럼 '예언'이 근사하고 화려하게 생겨나고 방대한 정보의 것만이 아니라 단지 나도 모르게 스쳐지나가는 혹은 집중하지 않았던 어떤 것들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엑스칼리버 처럼 몇 백년을 이어나가는 예언도 분명 존재하나 오늘 아침에 나온 아침 식사 또한 예언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침식사의 짧읜 메뉴가 당신에게 예언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조금더 예언을 자세히 그리고 조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그 예언은 어디서 오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을 다음 글에 해볼 고민으로 남기겠습니다.

  1. 혹은 예언 [본문으로]
  2. 중앙일보 - http://bit.ly/ohDVrY [본문으로]
  3. 교육적인 면은 다른 주제로 다룰 예정입니다. [본문으로]
  4. 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19금이라 생략합니다. [본문으로]
  5. 그들에게 주어진 특정 예언 [본문으로]
< 똑똑한 지인이며 친구인 이의 조언에 따라 경어체로 바꾸어 봅니다.>
앞서 이야기 한 듯이 우리가 이미 '선택'이란 것이 이제 더 이상 '독립적'선택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구석이 너무나 많습니다. 의지를 구성하기 에는 다양한 방해요소가 생성되며, 우리는 그 방해에 순종하는 것이 대부분이죠. 자신이 인지 못한 상황, 아니 인지하는 상황이더라도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하기도 하고, 또는 타인의 선택에 속기도 하며 심지어는 제시되는 정보의 순서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선택의 방해물에서 잠시 벗어나 선택 자체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7. 경솔하게 선택하고 신중하게 유지하다.

먼저 유신론과 무신론을 들먹거리고 싶진 않습니다. 나의 전공이 아닐뿐더러 지금 여기서 내세우고 싶은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각주:1] 모든 사람은 선택하고 그 결과를 기대합니다. 만약 그 결과에 대한 환상이 클수록 선택에 신중을 기하는 경우가 많고 만약 이루어질 확률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해집니다. 그에 반하는 경우나(문구점의 뽑기) 혹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우(로또)에는 정말 터무니없게 경솔하기도 합니다. 신중과 경솔의 사이 속에는 무엇인가 '독립적인 선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신중함에서 선택을 찾을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저는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선택한다."를 찾고 싶은 것입니다. 한 가지 가설을 올립니다. 신중의 정도가 높을 경우에 우리는 좀 더 자발적일 수 있을까요? 이 가설이 옳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의존적인 선택의 실험들은 '신중함'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신중함'이란 것을 찾아 가봅시다. 최고의 신중함을 찾으려면 가장 결과가 큰 곳으로 가야 하겠죠? 그래서 저는 이 가설에 '신'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보통의 유신론(특히 종교) 속에서는 우리는 한정된 삶의 영원한 다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 그 '결과'란 것은 (그 믿음에 성실할 경우에) '로또'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이겠죠.

그런데 재미있는 '종교'의 특징은 보통 경솔하게 선택하고 신중하게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신앙이란 것의 고비마다 결단과 선택의 순간이 존재하죠. 예를 들자면 세례나 출가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신중하고 싶은' 과정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처음에 입문하는 순간을 보자면 상당히 우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의 종교란 것도 상위세대의 종교의 세습과 동아리 활동 등의 의도치 않은 순간들의 결과입니다. 갑자기 종교와 입문의 경솔함을 언급하는 이유는 과연 결과에 부여된 가치가 크다 해서 선택이 신중하지는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종교적 '간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의 길을 인도한 것은 신이였다. 내가 우연히 마주하게 된 곳은 신이 나를 멱살 잡아 내팽개친 그곳 이였다. 아멘. 혹은 나무아비타불.

본디 경솔함이 인간의 몫이고 신중은 신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린 어디에서 신중했던 걸까요? 신이 우리를 이 자리에 '모셔'왔다면 우리가 대체 신중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긴 한 것일까요?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믿는 신의 현현(석가나 예수)은 신중했던 존재였다는 것 말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바로 이 신중했던 선인 및 신이라 불릴 존재에 대한 믿음이겠죠. 결국 태초부터 경솔했던 우리는 신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내세운 가설 "결과가 클수록 신중할 것"은 그다지 좋은 가설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작은 것에 신중하며 큰 것에 대해서는 경솔할 수도 있습니다. 신은 경솔하게 선택하고 의례는 신중하게 하는 우리에서 모습에서 말이지요.


8. 당신이 선택을 한 신에 대해서

사실 '경솔'이란 단어가 '신중'이란 단어의 반대 개념으로 적용하기에는 충분히 독선적인 면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어쩜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종교와 선택이란 자유의지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왠지 더 역설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사실 종교로 들어가자면 정말 계획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신이니까요. 그런데 무신론자들은 다를까요?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또한 사실과 증명이라는 것에 종속되어있긴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까?'입니다. 사실 저는 많은 실험들을 통해 글을 진행해 오면서 그렇지 않다고 계속 속삭이고 싶습니다. 어쩜 정말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개인적으로 슬플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조금 주제를 돌려볼까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는 법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알고 있기에 이쪽으로 이야기 하자면, 예수의 마지막 말 중 하나가 바로 "다 이루었다.[각주:2]"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한마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란 존재의 역할이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 역할을 끝까지 따라 온 것입니다. 이것에 '예언'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에 비춰 볼 때, 예수 본인도 예언을 쫒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철저히 '구약'이라는 기독교 전통 역사서의 모든 예언을 실행합니다. 출생부터 죽음 그리고 거듭남 까지 말이죠.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그의 올바른 길 혹은 올바른 선택을 존중하고 종교로 신봉합니다. 사실 그마져도 모든 행적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예언의 선택 이였죠. 그러므로 그가 선택한 것은 '그 예언'인 것입니다.



9. 인류를 가장 빨리 종말 시키는 법. <피그말리온 효과>

<피그말리온 효과>, 개인적으로는 귀에 익숙한 음악처럼 들리는 단어입니다. 교사를 위해 처음으로 교육학이란 것을 시작할 때 배웠던 것으로 저에게는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실험입니다. 다들 어쩌면 한 번씩은 들어보았을 실험이기도 합니다. 우선 이 실험 내용의 간략한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이 효과는 로젠탈 효과라도 불리며 로젠탈은 이 실험의 발의자입니다. 사실 정성스럽게 키운 쥐가 미로를 더 잘 찾는데서 시작된 이 실험은 인간에게 특히 학생에게 직접 적용되었는데 먼저 진단평가를 본 다음 보통 수준의 아이들을 두 반에 나누어 배정한 다음에 이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한 반은 앞으로 수개월 내에 월등하게 향상될 반 이라 소개하고 나머지 한 반은 기대치가 없는 반으로 소개합니다. 물론 처음에 능력차이가 없었죠. 하지만 결과는?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수치로 능력을 인정받은 처음 반이 평균 이상의 성적을 그 반대 반은 평균 이하의 성적을 보였습니다.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어버린 것이죠.[각주:3]

사실 피그말리온이라는 단어의 어원 역시 이와 비슷한 사건의 그리스 신화를 기초로 한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피그말리온이라는 키프로스지역의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이 사랑한 것은 다름 아닌 조각상 이였습니다. 그 조각상에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던 왕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축제에 간절히 소원을 빌었고 그 결과 그 조각상에 고운 여인으로 변하였습니다.
 

조각에서 여인으로 변모한 것은 그가 지속적으로 예언한 덕분입니다.


 
왜 로젠탈효과를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바램 혹은 무의식적으로 들어간 예언이 실제로 사람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을 그렇게 만들고 말지요. 사실 이 효과에 대해서 미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실제로 재 실험 결과 생각보다 높지 않은 결과도 있었죠. 하지만 이는 분명합니다. 예언은 분명 영향을 미칩니다.

언젠가 인류를 가장 빨리 종말 시키는 법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습니다. 핵폭발? 유성충돌? 핵폭발이 있어도 벙커 안에서는 파티가 열리는 세상이며, 유성이 온대 해도 화성으로 가는 편도 우주선[각주:4]에 오른다면 적어도 비행선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모든 사람들이 곧 인류가 종말 할 거라고 믿게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벙커도 만들지 않고 화성 편도 우주선도 탑승치 않고 그리고 영웅도 나타나지 않고 멸망의 길로 갈 꺼라 생각합니다. 사실 약간의 과장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더라고 변함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분명 우리가 예언을 하게 되고 ,그 예언은 분명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 예언은 길게 이어왔던 선택의 본질로 향하는 길을 열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쟌다르크는 예언으로 영웅이 되었고 또한 그 예언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예언이 영웅을 탄생시킵니다.




10. 바위의 엑스칼리버를 뽑아들 영웅은 누구인가.

하지만 피그말리온 효과는 그들에게 속여진 예언입니다. 어쩜 후광효과(링크)와 비슷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 예언이 혹시 거짓임을 알고 있을 때도 예언 실현이 가능할까요? 만약 정말 거짓임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 후광 혹은 그 예언을 뿌리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전에 저의 개인적일 일 하나를 언급하려합니다.

저는 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꿈에 대한 해몽을 그다지 믿지는 않죠. 그래도 주변에서 꿈자리가 사납다면서 나에게 연락을 할 때면, 왠지 횡단보도 앞에서도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서 신호를 대기합니다. 이는 분명 의식적으로 아니라고 믿었던 예언마저 저에게 실현되고 있는 것 입니다. 저는 전혀 믿지 않았는데 말이죠. 

또 한가지는 주변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아무 숫자나 이야기 해봐요." 대답의 경우는 상당히 다양했습니다. 당연한 것이죠. 그것은 임의 선택이니까요. 그리고 다음 질문을 했습니다. "왜 이 번호를 선택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보통은 "좋아서요", "학번이였어요", "전화번호 끝자리예요" 등 으로 대답했습니다. 질문은 아무 숫자였는데도 대답은 임의의 선택이 아니라 예언된 선택이였습니다.[각주:5]

대부분은 예언으로써 선택한다.



이 이야기는 어떤 동생과의 대화중에서 발췌합니다. 그는 기독교의 많은 위인 중에서 요나[각주:6]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그는 신에게 어떤 지역으로 가서 예언을 하라는 명령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이 자신에게 위험하다 판단하여 도망치죠. 그러나 도망치는 배에 올라탔을 때 풍랑이 일고 결국에는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그는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는 신세이죠. 머, 고래의 위는 건강하지 않은가 봅니다. 그는 그 위에서 살아나 신이 예언하라 보낸 그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요나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신의 예언을 거절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쩜 우리는 예언을 받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혹시 내가 선대에서 부터 선택되어진 '그' 사람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바위에 꽂혀있는 칼을 내가 집어 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죠.

가끔 바위에서 칼을 뽑아 드는 상상을 합니다.

 

위의 세 가지를 잘 적용해보면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앞서 또는 선택한 후에 예언을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본능적으로 피그말리온 효과를 찾는 것일지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선택에 대한 결과를 회피하기 위한 방어기제 일지도 모르죠. 무엇이 진실에 가깝든 이것은 일치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예언'을 원합니다.


즉, 바위에 꽂힌 엑스칼리버를 뽑기 전에 우선 예언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언에 의존하는 성질은 어디에서 부터 일까요? 다음에는그런 예언의 주체를 생체학적으로 찾아보는 실험을 통해서 계속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1. 개인적으로 나는 회의론적 유신론자라고 하고 싶습니다. [본문으로]
  2. 요한복음 19:30 [본문으로]
  3. 이때 성적이 떨어진 집단에 대한 효과를 '골렘 효과'라고 하고 비슷한 실험으로 위약효과로 알려져 있는 '플래시보효과'가 있다. 이는 실험자들이 가짜 약을 먹고도 신경증이 완화되는 효과며 그 원인은 피그말리온과 비슷하다. [본문으로]
  4. 이미 이 여행의 경쟁률은 400명을 넘어섰다. 참고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111712411&code=970211 [본문으로]
  5. 모든 사람이 그렇게 대답한 것은 아닙니다. 몇 몇은 아무런 숫자를 뽑으라 하지 않았냐 하고 반문했죠. 수학전공자들이였습니다. [본문으로]
  6. 열왕기하 14:25 [본문으로]



이전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즉, 오인된 정보 또는 오인되는 주변상황에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인 논리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에게 정확한 정보가 제공된다면 우리는 선택이 가능한 사람인지 궁금하게 되는데 이런 답을 얻기 위해서 유명하고도 반인권 실험 유명한 사건들을(하지만 중요한) 언급하고 싶습니다.


 3. 상황을 안다면 선택가능한가? - 스탠포드 감옥실험

  항상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들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서술할 실험은 그 ‘주의’의 부족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던 실험 중 하나인데, 실재로 이 내용은 엑스페리먼트(The Experiment, 2001)라는 영화와 소설로 각색이 된 실험으로 실재의 실험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이제 이 실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이렇습니다.

 
실험은 스탠포드 대학교 심리학부 지하에서 시작되는데, 24명의 지원자를 받아 교도과과 죄수로 나누어 그 역할에 맞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지원자들은 중산층 가정에서 비교적 좋은 가정환경과 교육환경에서 자란 남자들로 범죄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실험의 목적은 교도관과 죄수의 역할을 통해서 감옥상황을 이해와 그 특별한 상황에서의 몰개성화[각주:1]를 확인함이였습니다. 물론 그 목적에 대해서 피 실험자들에게는 공지하지 않았습니다.

 

스탠포드대 감옥실험은 소설 및 영화로 제작 되었다.


 첫 만남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나눌 때 피 실험자들은 교도원의 역할에 대해서 불편해서 죄수를 신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합니다. 하지만 피 실험자의 역할에 관해서는 선택이 아니라 임의로(랜덤으로) 뽑아서 결정하였고 선발된 9명의 교도관은 카키색 단체복을 입었으며 제압용 곤봉과 눈을 가릴 수 있는 선글라스를 지급하고 3인씩 3교대로 교도관 업무를 실시하였고 죄수로 선발된 9명은 3명씩 3개의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각주:2]

 
교도관들은 죄수의 집에 들어가 그들을 연행했으며 수감되는 과정 또한 동일하게 하였는데, 특히 죄수 역할의 피 실험자에 대해서는 모의 감옥이라 설명치 않고 스탠포드 주립 교도소라고 고지한 채 연행함으로써 더욱더 실험에 집중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실재적으로 실행되는 실험이긴 하지만 피 실험자 스스로 자신이 실험 중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언제나 자신이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있음을 미리 공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놀랍게도 예측을 벗어났고 생각지도 못한 이른 순간 통제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첫날에는 분위기가 좋았으나 사소한 갈등으로 시작한 교도관과 죄수들이 각각의 의견들과 요구하기 이르렀고 끝내는 권력구조의 양상을 띄었습니다. 결국 둘째날 새벽에 터집니다. 한 간수는 밤새도록 죄수들을 깨워 번호를 외우게 하였고 이에 반항하여 죄수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맙니다. 하지만 이런 점이 오래가지 못했고 금새 교도관들은 진압하였는데, 이에 보복으로 폭동을 일으킨 죄수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각주:3] 육체적인 제제는 애초에 금지했기에 교도관들은 언어적으로 그리고 위생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합니다.[각주:4]

 
 이런 와중에 한 죄수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버립니다.

결국 상황이 인간을 만들어 버렸다.



 실험진은 그 죄수를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이런 결과에도 굴하지 않고 실험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죄수들 사이에서 퍼지자 저항은 격렬해졌고 결국 교도관들은 신체적인 학대가 시작되었고, 다섯째 날에는 성적인 학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상황이 실험임에도 불구하다는 것을 모두 아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 실험은 단 5일만에 종료됩니다.

 
이렇게 설명하기도 긴 이 실험이 단 5일만의 일인데, 제가 더 의아했던 부분은 연구진입니다. 연구진들은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그 실험을 계속해갔습니다. 특히 5일째 종료를 한 이유도 연구진 내부의 의견이 아니라, 이 실험자의 총책임자의 동료이자 애인이 이 실험을 견학하러 왔다가 처참한 실험 현장에 대해 경악을 한 후 였던 것이였습니다. 또한 한가지 더 의문은 피 실험자 전원은 언제든 이 실험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문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그 자리를 지켰다는 점입니다. 대체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4. 상황을 알고 있다면 선택가능한가?

 
이 글의 오랜 방황을 이제 마무리 짓고 본래의 글귀로 돌아가보자면, 위 실험은 지난 글과 다르게 실험자들이 자신이 실험자임을 다 알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자신이 이 실험에서 뛰져나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나에게 누군가 실험중이고 곧 너는 맞게 되는 상황이 올꺼야 그럴떄 싫으면 꼭 나오고 싶다고 말해 라고 제시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실험을 포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실험에서 포기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2명의 포기자가 있었는데, 첫번째 포기자는 위에서 언급한 정신착란을 일으킨 죄수[각주:5]이며 한명은 폭동을 주도하여 독방에 갖힌뒤 온갖 고문을 당한 사람이였는데 이 사람은 연구진이 실험에서 포기하자고 제안하자 자신은 죄수이므로 나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후에 오랜시간 동안 설득을 해서 실험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정확한 정보가 제공된 상황에서 선택가능할까요?"

당신이 정보가 있다면 당신의 선택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실험을 뒤돌아 본다면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은 거짓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복종했으며 자신의 모든 선택이 자신의 역활 혹은 거짓 상황에 매여있었습니다. 즉 내가 지금 선택하는 것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상황이 나에게 이렇게 선택함을 강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선택의 역활이 나에게서 나오지 않고 나의 의지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신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요?

 
연구진의 행동을 보아도 이 점은 확실해 집니다. 사실 연구진들은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통제가능한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당하고 비도덕적인 사건 속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이 실험의 피 실험자는 교도관 역활과 죄수 역활뿐만 아니라 연구진 그들도 스스로도 실험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자유의지를 획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당신은 지금 당신 주면의 상황의 역활에서만 선택하는 맞춤형인간은 아닌가요?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면 어떤 업체의 목표가 있다고 치면, 그 목표에 따른 진행이 이어짐에 따라 각자의 역활을 맡게 됩니다. 학교로 따지면 교장-교감-교사-학생의 이런 역활들 말입니다. 하지만 언제 부터인가 교육의 목적이 학교의 목적으로 도치되고, 교사의 목적이 교장(혹은 교감)의 목적이 투사 되는 순간, 교육의 선택은 학교의 발전에 있고 교사의 선택은 교장(혹은 교감)의 이력서(혹은 결과보고서)의 한줄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경우 당신이 학생의 역활이라면 당신은 확실히 당신의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예를들어 학교의 목표가 혹은 욕심이 그리고 사회에서 제공하는 모든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능이라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당신이 학생이란 역활이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습니까? 저는 왠지 답을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당신"이란 개념은 코너에 몰린 것 같습니다.


  5. 결과를 알고 있다면 선택가능한가? - 밀그램 전기충격 실험

 
또 한가지 선택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과연 "선택을 믿는 당신은 만약 결과를 알고 있다면 선택 가능한가?"입니다.

조금 다르게 질문하자면,

<죽음 후에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갈림길 앞에서 먼저 도착한 사람이 나중에 도착한 이에게 오른쪽 길로 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정표에 분명 지옥이라고 써있고, 유황냄새 나는 불이 저만큼 보입니다. 그럼 당신은 오른쪽으로 가겠습니까?>

이에 관련된 실험 한가지를 다시 열어보면, 스탠포드대학의 모의감옥실험 이전에 있었던 밀그램 전기충격실험을 들 수 있습니다. 실험은 간단한데, 사람들을 2인 1조로 묶어 한명을 교사, 한명을 학생으로 나눕니다. 그 다음에 학생을 전기의자에 앉치고 전선을 교사 앞에있는 15볼트에서 450볼트까지 단계적으로 전압을 올려 충격을 줄 수 있는 장치에 연결합니다. 그 다음 교사는 학생에게 문제를 내고 틀리면 15볼트씩 올리면서 충격을 주도록 합니다. [각주:6]

(이미지 출처 : 위키)



 참고로 이야기 하자면 15볼트는 따끔한 정도이며 450볼트는 즉사입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요? 결론 부터 이야기 하자면, 65%의 사람들이 450볼트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것도 큰 고민 없이 말이죠. 그들은 실험을 위해 살인과 동일 수준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제 이 실험을 다시 이야기 하자면, 실제로 피실험자는 '교사'한명이였습니다. 즉 학생역활은 이 실험의 고용된 스탭이였으면 당연히 전기의자는 가짜였습니다. 이때 학생을 '연기'하던 그들은 교사 역활이 누른 볼트수를 방안에서 몰래 볼수 있었으며 그 볼트 수에 따라서 고통스런 연기를 했던 것입니다. 실험주제도 사실 <권의에 대한 복종>이였죠.

 실험 후엔 실험에서 교사역을 했던 실제 피실험자는 실험 후에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선택을 했던 것에 충격을 받아 정신 치료까지 받았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실험 책임자는 비윤리적 실험이였다는 비판 속에 대학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실제 모집 홍보물(출처 : 위키)


 그들은 정말 450볼트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은 이미 그 전기의자의 충격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택했습니다. 450볼트의 살인을. 역시 의문인 점은 그들이 굳이 실험을 통해서 살인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어쩜 우리는 복종하는 것이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이 실험을 적용하여 위 질문을 대답하자면 지옥 문앞에서 이런 후회를 하게 될 것 입니다. "어? 아까 어떤 사람이 지옥으로 가라해서 여기로 왔습니다."라고 말이죠. 즉, 결론을 알더라도 우리는 어떤 권위에 대해서 복종하는 심리적인 기저를 지닌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더 극적으로 설명하자면 그 것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나쁜 선택이라 할지라도 권력이라는 것에 우리는 '선택'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실험들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복종한다는 것을 말이죠.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복종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권력에, 어떤이는 연말 연봉협상에, 또 어떤 이는 실험진의 450볼트 전기충격하라는 명령에.


 
6.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이 불가능한가?

 
이렇게 글을 쓰고 보면 우리는 전혀 선택불가능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은 타인이 심어준 비의도적인 명령이거나(주제1) 혹은 정보의 순서에 따라 오판한 것인지(주제2) 혹은 상황에 너무 적응해버린 탓인지(주제4),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복종일것인지(주제5)...

복종은 우리의 본능일까?



 
사실 그렇다면 우리가 갖어야 할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게임을 해서 항상 이긴다고 하면 그것이 게임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맨유가 항상 이겨서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지는 적이 있어 더 재미있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선택이란 것을 계속 되뇌어봐도 그 결론이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저 나란 존재는 주변 자극에 너무나 쉽게 그대로 반응하는 수학문제집의 해설서 같은 느낌입니다.

 
사실 신에게 조금 묻고 싶은 면이 있는데, 그것은 그대가 갖는 신이라는 존재는 선택을 한 것인지 말입니다.

과연 우린 '선택'을 선택할 수 있을까?



 
하지만 분명 '선택'이란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무엇인가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 나는 확신합니다.(혹은 하고싶습니다.) 그러기에는 비극적인 실험결과만이 아닌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며, 무엇인가 이런 비극을 종료시켜줄 이야기를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가 나 자신도 모르게 복종하는 것이 본능이라면 우리가 스스로 '선택가능하다.'라고 느끼는 것은 분명 다른 곳에서 나오는 직감 아닐까요? 그 직감에 대한 처절한 증명은 다음글로 미루겠습니다.


  1. 집단에 소속되어서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본문으로]
  2. 나머지 인원은 예비인원임 [본문으로]
  3. 특히 다른 죄수들을 뒤돌아 있게 만든후 팔굽혀 펴기를 한 것은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방식과 유사했다. 유독 더 독특한 점은 교도관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본문으로]
  4. 대소변을 양동이에 보게 하기도 함. [본문으로]
  5. 강제로 실험에서 제외시킴. [본문으로]
  6. 이때 실험자에게 제시한 이 실험의 주제는 <징벌에 의한 학습효과>였다. [본문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또한 그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임을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사실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인생은 다분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라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에 먹은 대로 살게 된다.”고 영화에서 그리고 새 책에서 또는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느끼는 삶의 방향은 어떤가 묻고 싶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관여하는지 혹은 자기가 가는 방향이 정확한지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힙니다. 이것은 고민할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보통 희망적 인생관은 '현실'이라는 숫돌에 갈려나가는 순간 비극적으로 바뀌고는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희극’보다는 ‘비극’이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1. 우리가 우리의 삶을 선택하는가? - 동조현상 -

 우리나라의 기분 좋은 특성은 아니지만 한번쯤 언급할 가치가 있는 성향이 있습니다. 2002년 시청 광장에 붉은 물결을 띄웠고 같은 해 같은 장소를 촛불로 채운 과거의 성격이며 2002년 이후에 계속되는 K-리그의 침체와 미군과의 충돌에 무지한 현재의 성격입니다. 좋은 말로 하자면 단결력이며 나쁘게 말하자면 일면 냄비 근성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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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윤호상, 김철민이란 사람의 대학가에서 개그 공연입니다. 현재 제가 알리기로는 17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학로 등 거리에서 개그 공연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을 홍보하려는 것은 아니고 어렴풋이 남아있는 그들의 개그 한마디 입니다. “~~~~(각 나라의 웃음에 대해 설명 중) 한국 사람들은 언제 웃는 지 알아?” “(관중들).....” “다른 사람이 웃어야 웃어~ㅋㅋ” 이 말을 하고 나서 개그 2인조가 깔깔대고 웃었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웃고 그 다음에 제가 웃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아주 멋지게 정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애쉬(Solomon Asch)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격과 비슷한 심리를 실험을 통해 제시하였는데, 실험의 내용은 원탁 위에 7~9명의 사람들을 둘러앉게 한 뒤 다음 그림과 같은 문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다음 중 같은 길이의 막대는?>

당신의 눈에는 X와 같은 막대는 어떤 것인가?

 

 답은 무엇일까요? 이 실험의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모든 사람이 “A”라고 답하였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만약 실험이 이대로만 진행된 것이라면 아마 이 실험은 단지 착시현상에 대해서 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의 장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답변자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사람은 피실험자가 아닌 이번 실험의 스태프 즉 이 실험에서 정말로 실험 당하는 사람은 원탁에서 마지막 답변을 할 1人이였다는 것입니다. 그 들이 먼저 제시한 결과는 “A”였습니다. 만약 "A"가 당신과 생각이 같았다면 당신은 이 실험에 당한 것입니다. 왜냐면 당신이 눈이 보는 것처럼 답은 “B”이기 때문입니다.[각주:1]

 이 외로운 피실험자는 후에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되묻자 처음엔 자신의 눈과 뇌에서 “B”가 답임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이 모두 "A"를 부르자, 자신의 눈이 틀렸다고 생각해 같은 답을 이야기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런 말이 빠질 수 없습니다. “왜?”
 
 이런 현상은 동조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실험이라면 더 다양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약 3~5명이면 충분히 길거리에서도 가능한데, 3~5명이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하늘을 응시하면서 신기한 표정을 지어보면 됩니다. 그럼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 중에 무의식적으로 같은 곳을 응시하는 사람이 생기는데, 이중에 더 재미있는 일은 가끔 무엇이 신기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신기한 표정을 내비치는 사람들도 생긴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판단하는 대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정말 확실한 것인가요? 나는 삶의 선택 혹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하는 것의 어떤 부분은 나의 선택과 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자신을 소유함에 대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에 희극을 쓸 수 있을까요?

 이런 말엔 이런 반박이 예상가능합니다. "그 동조는 상황에 대한 자신의 선택이라 말할 수도 있다."라고 말입니다. 즉 답을 알고 있지만 체면상 혹은 분위기상 그리 선택했던 자신의 판단 이였다고 말입니다. 그럼 다음 에쉬의 또 다른 실험을 다시 주목해 봅시다.


2. 자신의 판단은 늘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되는가? - 인상 실험 -

 이번엔 피실험자 누구를 속이는 실험이 아니라 10명 전원이 피실험자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먼저 가상에 인물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하는데, 한 집단에게는 긍정적인 단어 제시 후 부정적 단어를, 한 집단에는 반대로 부정적 단어 제시 후 긍정적 단어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피실험자에게 그 가상의 인물에 대해서 평가해보도록 하죠.

같은 단어의 조합이지만 순서에 따라 평가가 다르다.



 분명 똑같은 단어들을 제시하였으나, 긍정적인 단어를 먼저 들은 A 그룹에서 이 가상의 인물에 대하 평가가 더 좋게(긍정적으로) 나왔습니다. 같은 설명인데도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판단하는 판단요소가 어쩜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단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순서만 뒤바뀌어도 다른 판단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원인은 바로 처음 들은 단어가 선행 이미지로 굳어져 따라 나오는 이미지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즉 긍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제시한 그룹은 처음으로 좋은 이미지를 갖은 상태(인상)를 갖추고 나중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이미 들어있는 긍정적인 이미지에 희석시키면서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현상을 이용하려는 듯 오늘 아침의 보험 광고에서도 좋은 말만 떠들다가 마지막에 아주 적당한 글씨와 속도로 독소조항을 읽어버리죠.

  결론적으로 '가난해서 빵을 훔친 장발장'은 구제 받을 수 있으나, '빵을 훔친 가난한 장발장'은 감옥으로 가야 합니다. 이게 ‘세상’이란다 발장아.

가난해서 빵을 훔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낫다.




3. 당신은 당신의 주변에 대해서 선택 가능한가?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의 정보에 무기력하게 반응하고 굴복하고 맙니다. 그러면 가장 처음에 이야기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선택 가능한 존재'인가?

정말 신은 당신에게 선택에 대한 자유의지를 준것이 확실한가?


  저 또한 무엇보다 자유를 선택하고 싶다만 정말 그런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위의 아주 작은 두가지의 실험만으로 선택의 가능성을 판단한다면 성급한 일반화 일 것 입니다. 또한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위의 실험은 
당연히 이미지가 굳어지는 상황 속 이였고 피실험자가 그런 이미지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과연 당신은 선택가능 한가?



 즉 단지 인상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사람이라면 갖는 당연한 오류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은 이미지에 대해서만 오류를 범한 것이고 그 후의 판단은 자신이 하는 것이라는... 분명 그런면은 존재 합니다. 그럼 그 부분을 인정하더라도 아직 우리가 자신을 선택하는 지에 대해서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그럼 이제 방향을 바꾸어봅시다. 과연 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다 안다 할 때 과연 자신이 원하는 것은 선택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오류의 방향이 남이 던져준 정보 였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잘못 판단하게 되는 자신이였는지에 대해 다음글로 잠시 미루어 보겠습니다.
  1. 사실 나는 당신에게 약간의 거짓말을 했습니다. 마지막 1人의 답이 오답인 사람은 전체 실험의 1/3이였습니다. [본문으로]


최초의 체벌, 불


어느날 최초의 인류 혹은 그와 비슷한 인류가 살고 있을 때

신의 노여움을 대표하던 번개


하늘이 온통 검게 변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격노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어느새 자신의 머리위까지 점령한 검은 구름은

분노의 빛을 땅에 꽂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수 없는

붉은 빛과 열이 번져나간다.


바로 불이다.


하늘이 성난 시간 순식간에 내려온 불은 초원을 태웠고

땅에서 생명을 얻은 것은 불 앞에서 힘을 잃었다.


거기에 대앙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던 인간은

그저 분노가 가실때 까지 얻는 것은

두려움 밖에 없다.

신과 의 최초의 체벌 관계, 불



이제 그들은 하늘이 보낸 재앙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한다.


불, 이건 신의 심판이다.

그들의 믿음 처럼 나와 신이 존재한다면


이 불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초의 체벌이 될 것이다.



우리의 뜨거운 불


우리가 체벌을 동의하는 경우는 대부분 경험에 의존한다.

나 잘난 맛?

좋지 않은 극단 적인 예는 뭐 이런 식이다.

"예전에 이렇게 해서 이만큼 맞았어~"

"그후로 내가 이렇게 잘 된거 아니야"

음...

사실 보통 여기서의 논제는 체벌의 중요성을

강조 하는 것이 아니라

1번 : 나는 이렇게도 맞아 봤삼

2번 : 나 잘나심

뭐 이 정도가 (剿等適) 논점인데 가끔 부수적인 논점으로


"맞아야 정신 차려"라는 논제를 펼친다.


워 일부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인 경우도 있으나

보통의 경우는 그 말은 이렇게 써야 정상이다.


"맞아야 나를 거슬리는 그일은 절대 다시 않할 꺼야"


보통 "불" 같은 심판은 분노를 대동한다.

우리 최초의 인간이 불을 보면 심판을

잘못하면 재앙

신의 분노와 동일시 하는 것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오해하고

남용하는 체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체벌이 이런 마음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사실 위의 좋지 않은 예에서 잠깐 볼 수 있는

인간적인 연결이 그렇다,


다시 말하자면 정.

그 체벌의 기저는 정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관심의 정이라고 하자.

내가 관심이 있기에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 심판을 내 비친다는 것,

보통 체벌을 하는 마음도 그 부분이라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알고 있고 경험했던 것은

(범죄적인 것을 제외하곤) 이런 뜨거운 정의 체질이라 하고 싶다.


단, 나는 이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최초의 인류의 행동을 고치게 만든 그 것의 원인는?

바로.. 다 타고 남은 재를 보면서 후회하는 일이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초원을 잃고 상처를 입고서야 그 다음을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과연 현재 우리가 바라는 교육과 상응하냐는 것이다,


바로 상처와 후회의 교육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교육과 얼마나 부합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쩜 우리는 의미는 잊은채 뜨거운 정에 집착해

모든 것을 불싸르게 하는 신은 신이되

나쁜신 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



차가운 불의 등장


진중권의 호모코레아니쿠스란 책에서 교육에 관한 재미있는 부분을 읽었다.

요약하자면



자리가 하나 남은 버스에 어머니와 두 형제가 탑승했고

남은 자리에 형이 앉았다.

그 자리가 탐이 났던 동생은 어머니에게 떼를 쓴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한다.


한국 : 형이면 형답게 동생에게 양보를 해야지 형이라면서!

독일 : 않되지! 형이 먼저 앉았으면 그건 형의 자리인데 너가 뺏으면 않되는 거야!




뭐 이 책의 의도는

우리나라의 역활론이 강조되는 상황을 이야기하려 한거지만,

나는 왜인지 더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인간적으로 느끼는 뜨거운 불과 다른

또 하나의 불,

즉 1인칭과 2인칭 사이의 뜨거운 불이 아닌

3자가 되어 원칙으로 바라보는 차가운 불


우리나라가 느끼는 행동은 1인칭과 2인칭의 관계에 따른다.

즉, 다시말하자면

관계에 따라서 역활이 달라지고 그 역활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형이라 함은 뜨거운 마음으로 동생을 위할 줄 알아야 하며,

동생은 그 형을 존경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어긴다는 것은, 그 관계을 어긴다는 것이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체벌은 관계속에서 나오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

부모 혹은 선생님이라는 관계에서의 당연한 역활이였다.


독일의 경우는 어떤가.

어머니이지만 한순간 법관으로 빙의(?)한다.

어떤 역활은 규칙에 따라 정해지고

그 온도는 상당히 차갑다.

형제의 역활이 아니라

규범을 지쳐야 하는 시민이란 면을 이야기 한다.

자기자신에게도 그것으니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체벌? 그들에게는 체벌은 폭행이라는 규범과 동일하다.


즉, 관계와 역활은 별개의 문제를 보이게

그들의 교육은 차가운 불과 같다.

그리고 그 불은 공평하다.

3인칭으로 바라보는 교육은 차가운 불 같다.



우리가 필요한 불의 온도는?


심판의 의미의 차가운 불이든,

역활에 의미의 뜨거운 불이든,

어느 한쪽에 치우지는 교육은 자칫 역효과를 낼 수 가 있다.


단지 지금은 뜨거움속에 진행되는 교육에 치우쳐져 있다는 것

그래서 이제 우리는 뜨거운 불에서 약간 물러날 시간이다.


현재 우리의 교육이 입시란 독을 머금은 이 후

목적이 대입과 능력으로 맞추어지면서 과열된 불이 교육계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어쩜 이번 인권조례안 역시 이런 취지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차갑다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잘못하면 우리의 관계 전부를 잃을 수도 있다.


이번 인권조례안 이후에

(인원조례안과 체벌없는 평화로운 학교 만들기 파일)


많은 반발이 있어 서울시는

성찰교실과 서울시 교육청의 학생지도 메뉴얼을 발표했다.

문제는 이것이 탁상공정이라는 비판인데

아래의 동영상이 쉽고 꽤 논리있게 말해주고 있는 부분이다.


Get Microsoft Silverlight




또한 체벌금지에 대해서는

그 외 여교사 모욕이라는 동영상을 교총에서 공개(링크)하기도 했다.


사실 내 의견에는 인권조례안에는 찬성이고 성찰교실은 보완이 필요하며

사례집에 대해서는 비판점이 너무 많다 너무...

인권을 위한 교육과 그에 때른 역치 해결에는

아직은 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그러기에 교육에 관한 것은 한걸음 한걸음 놓치면 조심히 떼어야 한다.


그것 아는가?

만약 사람을 들어 아주 뜨거운 물과 아주 차가운 물에

한쪽 다리씩 집어 넣으면 어떻것을 먼저 느낄 까 하는 실험이 있었던 것.


그 결과는

바로, "아프다" 였다.

섣부른 차가운 교육과 고집스러운 뜨거운 교육이

잘못만나면 결국에

교육은 아플수 밖에 없다,



불의 역설


불이란 것, 우리의 것이 아닐 때는 댓가와 파괴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 불을 이용하고 쓸때는 보호와 생성의 도구이다.

불의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이다.


교육과 체벌의 양면성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체벌은 뜨거운 교육 안에서

1인칭과 2인칭에서 나오는 관계를 통해 나와야만 하는 행위였고

동시에 파괴를 통해서 그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였으면

우리가 더 필요한 차가운 교육은은

행위에 대한 평가레 공정성을 요구하고

그에 부합한 일에 자신이 책임을 지는 거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의 교사는 그저 3인칭의 법관과 같다.


사실 교육이 입시와 결부되면서 상처가 났다고 본다.

그 상처에 뜨거운 불이 과하다 보니

염증이 지고 고름이 새어

이제는 차가운 불이 필요한 시기인 것에 개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조심하지 못하면 그 불은 결국 재앙이 된다.


불은 그 쓰임이 어떻냐에 따라 달라진다.


정말 우리가 필요한 불은 어떤 것일까?

그에 대한 답보다는

회초리의 의미로 마무리 하려한다.





회(回) 초(初) 리(理) :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이런 의미에서 지금 교육에 가장 필요한 것은

회초리가 필요한 거 같다.


입시 이전에 가르침,

그 이전에 아끼는 마음 혹은 사랑이라 생각한다.


교육자, 교사 혹은 부모들

정말로 교육을 원한다면

일단 우리 스스로 회초리를 가지도록 하자.



 휴직교사의 체벌에 관한 편지 1...- 어느날 한의원에서..

1. 어느날 한의원에서.. 

 

근래에 어머님과 한의원에 간적이 있었는데 어머니 진맥을 받으실 동안

나는 쇼파에 앉아 TGIF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옆 쇼파에 한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있었는데

아이가 너무 떠들어서 미안했었는지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아이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자꾸 떠들면 의사 선생님이 침 놔줄꺼야~!"

침과 떼끼로 아이 길들이기?

 

그러자 아이가 조금 나아지는가 하더니

금새 다시 이리저리 신기한 것들을 만지고 다녔더니

그걸 지켜보던 아이의 어머니가 다시 하는 말이

"너 정말 자꾸 그럼 옆에 아저씨가 떼끼한다~!!"

 

사실 그 아이에게 별로 관심이 없던 터라

그 아이가 어떻게 떠들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래도 옆 사람들을 위해서이겠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의사와 나를 동원해서 아이의 행동을 저지하려했다.

 

나를 언급함에 돌아보던 나의 눈이 아이와 맞았을때..

어떤 이유에서인지(정말 하나도 이해할 수 없지만!!)

아이가 조용해졌다.

(나는 날 언급함이 좀 불편해 본 것 뿐이였는데..)

그냥 나를 언급함이 싫은 거였다..

절대 날 아저씨라고 불러 그런거 아니다 절대!!.. (쳇.. 나 이십대인데..ㅜ.ㅜ)

 

여튼 나의 감정은 각설하고 과연 그 아이를 조용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였을까?

이런 생각에 빠졌을때 나는 여기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거... "체벌"

 

2. 체벌..., 폭력 vs 필요악

 

사실 체벌에 대한 관심은 교사를 하던 시절 부터

지금까지 늘 생각거리 중에 하나였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건데 아직도 체벌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다.

 

가벼운 모자의 작은 일화에 내가 체벌을 생각한 것은

사실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짧은 시간 속에서 느끼는 바는 상당히 컸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먼저 아래 링크는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서울광역시 체벌 금지에 대해서

체벌금지라는 길의 바른 예와 혼란스럽다는 평가를 쓴 기사를 각각 링크 한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의 체벌 일체 금지


'문제아' 체벌 대신 악수 청하는 교감 - (클릭)

'왜 때리냐' 체벌 금지 첫날 성토장이 된 학교 - (클릭)

(굳이 모든 기사를 읽을 필요는 없다. 제목만 봐도 느낌이..)

 

사실 두 매체의 특성이 다르다

위의 긍정적 기사는 일명 진보적 언론으로 불리며

아래의 부정적 기사는 보수적 언론으로 불리는 곳이다.


지금 언론의 성향을 보자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체벌에 대한 생각이 극명하게 갈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읽어본 바 두 매체의 혹은 여러 매체의 체벌에 대한 이미지는 이렇다.


폭력 vs 필요악


과연 체벌은 '폭력인가 아니면 필요악인가.'의 논쟁은

사람에 따라 사상에 따라 극명하게 갈릴 수 밖에 없다.

이 판단에 대해서 지금 언급할 생각은 없다.

나는 오히려  부정적 기사(성토장이 된 학교)의 한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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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학생들은 -

‘왜요? 때릴 건가요’

“좀 있으면 학생인권조례인가 뭔가도 나온다면서요. 핸드폰 좀 먼저 갖고 다니면 안 되는 거예요?”

 

- 어떤 학부모들은 -

'애 잘못되는 데 보고만 있을건가. 괜찮으니까 차라리 때리라’고 하셔서 난감할 때가 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 생활지도를 소홀히 할까 봐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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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말이 아닌 학생과 학부모의 말이다.

난 여기에서 폭력도 필요악도 아닌 무서운 교육을 느낀다.

 

3. 체벌 이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무서운 교육 S - R

 

대학교 시절  전공은 알코올이고 취미는 수학이고

알콜 전공시간에 시간을 보내는 안주는 교육이였다.

좋지도 않던 학점을 유지중에서도

소름끼치게 무서웠던 하나의 교육을 기억한다.

 

그건 바로 자극과 반응을 뜻하는 S-R이론 인데

바로 우리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자극과 반응의 결합체라는 이론 이다.


길게 설명할 것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파블로프의 개",

종이 울리면 먹이를 주기전에 침을 흘리던 그 개 이야기는 대부분 기억한다.

실제 파블로프 실험에 쓰였던 개


이것은 R-S-R이라는 S-R의 변형이지만

기본적인 특은 유사하게 보면 된다.(뭐 교육의 방향은 다를지라도..)

왜 나는 기사를 읽으며 이 소름을 다시 느끼게 되었을까?..

 

그건

위의 학생과 학부모의 말이 전부

체벌이라는 틀을 벗어났을 때 보이는 반응의 하나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나는 수학쟁이니니 반대로 생각하보자.

지금까지 우리가 학생을 잡아 놓은 것이 바로 "자극"인데,

그것도 바로 "반응"을 위한 자극이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자극으로'만' 가르치고 반응으로'만' 배우고 있는 것인가.

 

이 교육을 정확히 비유하자면,

아니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비약해서 비유하자면

교육자나 학생이나S-R교육은 마약과 동일하다.

 

왜?

빠른 반응이 이루어지기에 교육자에게 마약이며

책임을 계량화 할 수 있기에 학생에게 마약이다.


현재 복직을 준비중인 휴직교사로 깊히 반성하자면

반응을 곧바로 갖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은 나의 역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빠른 반응을 받는 것은 교육자.. 아니 이럴때는 주입자에게 최고의 옵션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포기 할 것인가?

체벌하는 것과 체벌 받는 것이란..

 

또한, 나의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나의 외박의 댓가 혹은 나의 유흥의 댓가는

내가 후에 감수할 자극의 수량을 계산하게 된다.

 

그러기에 이건 마약이다.

그러기에 이 체벌에 대한 반응에 소름이 돋는다.

우리는  S-R 마약에 취한 중독자이기 떄문이다.

 

그러기에 이건 비극이다.

 

4. 다시 한의원.. 그리고 체벌...

 

그렇다고 S-R의 자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사실 이행 되는 대부분 교육의 원천은 기본적인 본성은 S-R이다.

하지만 그게 주가 되기때문에 문제가 되는데

말하자면 S-R은 이성과 본성 중에 본성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좋다.

 

"싫은 자극을 주어 원하지 않는 반응을 끊어 버린다."라는

마치 본능적이고 변하지 않는 함수를 지향하는 교육,

다소 불편한 진실이지만 사실 체벌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체벌, 가끔 보이는 장풍식의 폭력이 아니라면

그 목적은 항상 나쁘다고 보기는 어렵다.

행동을 교정하고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하려는 목적이

다소 의례적인 학교라는 장소에서 불편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쯤에서 나는

이제..

다시 한의원으로 돌아가고 싶다.

 

우리는 떠드는 아이에게 불법적인 의사의 침이나

아저씨(ㅜ.ㅜ?)의 떼끼가 아이들에게 부정적 자극으로 다가가

아이가 하는 행동을 제한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그렇게 심어준 생각은 과연

"한 사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면 않된다"

라는 것을 배울 것인가, 아니면

"떠들면 혼난다?" 를 배울 것인가.

내 생각이 옳다면 후자를 배울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교정되는 모습을 보면 부모도 교사도

그리고 학생 그 자신도

체벌이란 것에 무던해질 수 밖에 없다.

왜? 남이 바뀌고 내가 바뀌니까...

그 동안 그 행동교정의 목적은 상실되고 결과만 쌓인다.

 

그러기에 적어도 이 체벌,

이 체벌을 받아들이는 이것은

다시 한번.. 비극이다.

 

체벌,

그것은 S-R의 덫은 아닐까..

혹시 나도 그 덫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반성!

 

- 막거리를 홀로 마시며, 자신을 욕하고 비판중인.. -

- 휴직중이고 복직대기 중인 교사 노군올림.. -

 

P.s

오장풍교사 사건..

그리고 이번 서울시 교육척의 학생 인원 조례로 비추어 보았을때,

체벌에 대해서

그 대안이 무엇이고 지향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그건 술깨고 고민해봐야지..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오늘 오유 노군의 노래방이 이야기에 폭소를 터트렸다.

 

-왜 내 앞에서는 쇼파에서 뛰지 않아??ㅋㅋ-

 

난 그저 솔찍히 설명했다.

당연히 내 사람 앞에서는 더욱더 긴장하기 마련이고

만나온 기간에 상관없이 지키고픈 사랑이야기라는 것..

 

만약에 왜 100%를 다 보여주지 않아 라고 묻는 다면...

 

금괴이야기에 비유하고 싶다.

금괴는 99.9%란 순도로 판매 된다.

거래라는 분명한 개념속에서

왜 100%라는, 즉 완벽이라는 뜻을 쓰지 않는 것일까~

 

이 유는 그리 어렵지 않다.

100%는 신의 영역이며 완전의 상징이다.

만약 100%금괴안에 연마하던 주조물의 1개의 원소가 섞였다면?

그것은 신의 영역에서 탈락이며 불완전하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또 한 귀납적으로 모든 것을 판명하기엔

인간이란 또는 인간이 만든것이란 어떤것도 미흡하기 그지 없다..

 

만 약 100%순도의 금괴가 거래된다면

신이 선사한 성물이 아니라면 99.9%거짓이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100%란 것은 99.9% 거짓이다.

 

그럼 0.1%의 의미는 무엇일까

당신에게 100%를 보여주고 싶지만

당신에게 거짓을 고하고 싶지 않은

 

겸손한 사회적 합의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99.9% 연애 중이며

오늘의 사랑에 후회가 없다.


자유롭게 날고자 하여 나의 날개를 살펴보니

 

날개에 비해 너무 커버린 나를 발견하다.

 

 

과거만을 그리며 날지 못함에 슬퍼하다가

 

고개를 숙여보니

 

나에게 두 발이 있었고

 

비로소 나는 이 땅위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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