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교사에서 복직 교사로 지내다 보니 어느새 블로그에 손을 놓은 지 몇 달이 되었다. 사실 살짝 불안감이 드는 이유는 뭘까? 왠지 3월의 다짐 4월의 포기를 반복하는 나의 학창 시절의 반영을 그대로 실현하는 건 아닌지. 분명 내가 손때를 묻힌 수학책의 대부분은 집합과 명제였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반복적인 포기에 반항하기 위해 3월의 학교 폭풍 속에 조용히 키보드 질을 시작해본다.

 
1.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전 글에서 완벽한 진리를 말하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요상한 진실에 직면했다. 만약 진리란 것을 유토피아에 비유해보자면,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는 적어도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닌 무언가 존재해야 한다. 어떤 유토피아 속의 자신을 상상하든, 꿈에 부푼 자신을 떠받들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종(혹은 하인 혹은 도우미)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게 우리는 완벽함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덜 완벽함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언제나 진리의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수학에서 그 희생양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그 문제는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공리로 도망치는 일이다. 공리를 세우고 그 위에 수학을 한층 쌓아가는 일. 그 공리만 인정된다면 완벽한 논리를 향할 기분 좋은 진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은 저번 글 막바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연역적 명제는 전체의 축소만을 가져온다.[각주:1] 즉 말만 다를 뿐 우리가 원래 인정했던 것을 다시 확인하는 식이다. 명제를 확장하겠다고 공리‘만’을 확장한다면 그것은 점집에서 점술가가 던진 한마디를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각주:2]

연역적 진실은 작아질 수 밖에 없다.



 "히키코모리"라 불리는 자들에 대해서 혹시 들어보았는가? 우리나라 말로는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며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방에 갇혀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사실 연역적인 사고로만 명제를 키워간다면 그 끝은 히키코모리랑 유사 할 것이다. 자신만의 방에서 자신만의 만족을 갖고 사는. 수학도 마찬가지 이다. 연역만을 강조하는 진리는 결국에는 어느 부분에서 종점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다. 혹은 그 극한[각주:3]이 수렴한다 하더라도, 그 크기는 우리가 이미 정해놓은 대명제(맨 처음 명제)를 벗어날 수 없다. 결국 히키코모리와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기에 진리를 찾는 사고 방향을 더 키워야하는 것이다.

히키코모리들은 결국 자신의 틀에 갖히게 된 것이다. 진리도 이럴 수 있다.




2. 약한 진리에 대하여.

 이와 비슷한 논쟁을 과학에서 가져와 보고 싶다. 바로 아인슈타인과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이다. 이 둘은 양자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예측 가능한 양자역학을, 보어는 코펜하겐 해석[각주:4]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양자역학 모델을 선보였다. 이 와중 유명해진 아인슈타인의 말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란 명언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해석과 사고 실험[각주:5]들을 통하면서 명언은 지금까지 남았지만 아쉽게도 보어의 모델이 진리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즉, “예측 불가능”유일한 예측 가능한 변수인 것이다.

 이를 수학에서 다시 보자면 이제 우리는 ‘예측 가능한 진리’이란 편견에서 잠시 물러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덜' 진실하지만 '충분히' 진실하다고 말할 것들은 무엇일까?  또한 우리는 그것을 어찌 성립하는지 확신하는 것일까? 그 고민에 집합에서 잠시 다루었던 하나의 개념을 다시 들어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들어온 것은 그것은 바로 바로 퍼지집합이다.

양자의 예측 불가능을 수학에 적용해 보자.



 퍼지집합이란 어느 집합에 속하는 정도를 확률적인 시각으로 표시 한 것으로 0과 1이라는 선택을 (참고로 0은 절대적인 거짓, 1은 절대적 참을 의미한다.)  0<=x<=1이라는 것으로 확장시킨 모델이다. 자세한 설명은 링크로 대신한다. (이전 글 링크)

 '포함된다(=1), 포함되지 않는다.(=0)'란 선택에서 좀 더 확장된 기회를 제공한다면 우리가 편협했던 명제 관계를 좀 더 넓힐 수 있겠다. 즉, 포함관계라는 인과관계에서 다 이루지 못하는 진리를 이루는 하나의 가능성 약한 포함관계인 퍼지집합을 통해서 명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퍼지 논리에 대해서 나는 대학교 이상의 수준을 기록하려고 하진 않을 예정이다. 나도 그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펼칠 능력자는 아닐 뿐더러 오해의 소지를 더 만들 가능성이 있기에 기본적인 내용은 위키 링크로 대신한다.(그 내용은 위의 퍼지집합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판단하는 명제를 보어의 양자역학과 비슷한 확률적인 개념으로 접근하여 이전에 판단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수량화하고 논리화 하여 그 체계를 구성하는 일이다. 즉, 생각하면 다 이루어지는 100% 완벽한 유토피아는 어려우니 내가 조금 귀찮더라도 걷거나 말하거나 하는 99%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다.

진정한 유토피아에는 불완전함이 섞일 수 밖에 없다.



3. 퍼지 논리가 가리키는 진리는?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논할 중요한 한 가지가 아직 남았다.  '수량화된 진리'가 갖는 의미이다.  이 부분에서 오해할 여지를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오해의 가장 큰 정점은 바로 ‘진리의 줄 세우기’가 가능한지의 여부이다.

 만약 '0.99 진리'와 '0.01 진리' 사이에서 우리가 '0.99 진리'이 더 무거운 진리일지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단정한다면 이 이야기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예수도 석가도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이론들을 퍼지 논리 점수를 통해 '수량화'한다면 아주 후하게 주어도 '0.01 진리 주의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진실한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 이런 나의 말에 동의 할 것인가? 사실 이 사실은 나도 동의하기가 어렵다.

 더 자세한 예를 들자면 어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퍼지 논리 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점수는 몇 점일까? 하지만 모두가 그 말에 감동하지 않는가. 이런 모순의 원인은 '수량화'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수량화’가 그 명제를 진실 되게 만들 수 있을까? (사실 여의도 기독교는 그럴 수도 있다. 0.99 진실의 법칙으로 일본은 분명 쓰나미를 원수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 했으니.[각주:6]) 하지만 일반적인 기본 교육을 통한 사람이라면 예수의 '0.01' 진실에 손을 들어줄 것이다.

 다시 말해 '수량화'는 '의미'를 대표하진 않는다.

이런 수량화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은 완전한 넌센스다.




4. 수량화에 빠진 진리 구하기

 그렇다고 지금까지 수고했던 수량화된 진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결론짓는다면 그 또한 극단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렇다면 '수량화된 진실'이란 것에 다시 의미부여를 해봐야 한다. 이런 의미부여는 우리가 '수량화'를 선택했던 수단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 수단은 바로 '확률적'과 구별[각주:7]된다. 다시 말해서 0.51은 0.49이라 할 때, 우리가 좀 더 쉽게 이야기 하는 51%가 49%보다 2% 더 진실이 될 확률이 있다.”란 것이 아니라 2% 정도 더 보편적인 선택을 받는”진실이란 말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명제는 참/거짓에서 한 단계 더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51%와 49% 양립할 수 없는 명제라 할지라도 진리로 동시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0.01 진실'이란 것은 우리가 1%의 확률 빈도로 선택한다는 것.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독배’와 예수의 ‘원수 사랑하기’는 참으로 소수만이 선택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들을 성인이라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리 확률적으로 이를 정의해 보려 해도 ‘수량화’가 진실이라는 벽을 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다. 이런 면에서는 왠지 데카르트적인 절대적인 진실은 사라지고 푸코가 말하는 특정 법칙이나 관계에 의한 진실[각주:8]이 수학의 표면으로 자리 잡는 듯하다.

완벽한 형태가 아닌 관계가 말해주는 진리



5. 진실이란. 명제 파트를 마치며

 집합을 거쳐 명제에 대한 글을 써보면 진실이라는 것의 이중성이 보인다. 분명 어떤 흐름을 보여야하지만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이라는 것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진실이란 것은 어떤 절대적인 흐름을 바라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포함과 불 포함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부터 시작해서 집합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명제를 이야기 했다. 그들 사이에는 정확한 연결고리를 통해서 내가 알고 싶은 결과를 배출해낸다. 이런 고리를 절대로 끊을 수 없게 단단히 묶어 진실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연역을 통해서 보았다. 하지만 연역의 결정적인 문제는 고리는 온전하다 그 고리의 시작이 어딘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떤 '진실'이라는 것의 심각한 오류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발 물러나, 절대성을 버리기로 한다. 즉 상대성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인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여 '진실'이란 것을 '아무것도 아닌'것과 동일시하는 것 또한 피하도록 하자. 자신이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또 어떤 다른 것이든 지적 생물체(인간)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버리면 '진실'이란 호칭을 부여하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생겨버린다. 수치화된 점은 그저 그 명제의 빈도 혹은 확률로 제한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하려니 '진실'을 정의하는 일은 점차 미궁으로 빠질 수 밖에.

 그렇다면 진실이 피해야 할 그 곳은 어디일까? 자만하고 고집스럽지도 않으면서 적절히 의미화가 되는 그곳은 어디일까?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는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젠 '수치적 진실'이나 논리적 진실' 따위는 수학에서 찾을 수 는 없을 듯하다.[footnote][/footnote]

 하지만 수학 외적인 곳에서는 어느 정도 해답이 있지 않을 까 한다. 우리가 부르는 '공감'같은 단어에서 말이다. 하지만 '공감'만으로는 우리의 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실수를 포함해서는 안 되니, 나는 '조심스런 공감'정도로 마무리 짓고 싶다.
 

'조심스러운 공감'을 갖던 지난 날을 위해서~



  1. 그림과 같이 집합론 적으로 생각했을 때 명제의 진행에 따른 진리의 축소는 피할 수 없다. [본문으로]
  2. 그렇다고 해서 공리를 기반으로 한 수학이 의미 없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시 한다. [본문으로]
  3. 그 극한이 수렴하지 않고 진동 발산한다 하여도 결과는 변화지 않는다. [본문으로]
  4. 훌륭한 네이버 캐스트를 링크한다. 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1961 [본문으로]
  5. 어떤 실험을 제시하더라도 측정이나 도구의 불완전성에 의해서 보어의 승리가 확정될 수 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6. 여의도 기독교에 대해서 욕할 생각은 없으니 이번 발언은 분명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 [본문으로]
  7. 의미상의 구별이다. 일단 퍼지 집합을 구하는 과정에서 확률은 빠질 수가 없다. [본문으로]
  8. 그가 말하는 상대적인 진리를 어쩜 보어의 양자이론 혹은 퍼지 논리의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볼 수 있다. [본문으로]


진실게임 "진실만 말해라"


잠시동안 다분히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자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승에서의 생을 다하고 저승의 문턱에서 당심을 심판할 야수와 마주하고 있다고 하는데

나에게 영생과 영벌의 구별이 너무 어려워서 당신에게 기회를 주려합니다.




그 기회란 단 한번의 말로 완벽한 진실을 말하는 것 입니다.



당신을 원하는 야수가 진리에 굶주린 침을 흘리며 노려보고 있는 이 순간

자칫 이들에게 거짓을 고백하다 걸리게 되면 가차없이 돌이킬수 없는 곳으로 가게되는 상황이라면 

당신의 실수를 바라는 이 야수들에게 어떻게 진실을 이야기 할까요?


다시 말해 어떤 100% 진실을 이야기 할 것인가요?


이집트 신화의 명부의 신 오시리스. 심판의 시기에서 당신의 진실은?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실생활에서 아주 어렵다. 맘에 들지 않는 상사가 술자리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솔찍하게 말해달라고 한다하여 그 진실을 말하기는 너무 어려운 세상아닐까요?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혹은 우리의 말로써 진실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존재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당나귀귀를 외칠" 숲을 준다하더라도

정말 그 이야기가 진실일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럼 다시 돌아와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게 100% 진실임을 어찌 증명할 것일까요?


계속 되는 질문이 어지럽지만 이제 진실게임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


 참과 거짓이라는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명제를 도입했다.(이전링크) 보통 명제의 구조를 보자면



'(____ 1 ____)이면 (____ 2 ____)이다.'


란 꼴로 나옵니다.



이것을 풀어말하자면

"(1)이 참이라고 '가정'했을때, 과연 (2)가 참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1)번 자리를 가정, (2)번 자리를 결론이라 하고

그리고 간편하게(1) => (2) 라고 표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을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 이 구조로 환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명제도 일단 구조로 환원할 수 있다. 문제는 증명이다.


이처럼 어떤 것의 진실을 이야기 할때 가정과 결론이라는 도구로 말하면 대부분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죠.

이렇게 말할 수 있어도 이것이 진실인것을 '증명'해 내야 하는 것 입이다.

그런데 이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예를들어, <그자식 진짜 개념 없다.>라고 한다면 'x=그 자식 => x는 개념없다.' 라고 고쳐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완벽하게 참이나 거짓이로 구별하기 어려운데, 위 예에서는 '개념 없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명제의 개념 - 링크)

그러니 당신이 진실이라고 이야기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만약 당신이 야수 앞에서 자신의 영원을 걸고 진실을 이야기 해야 한다면? 함부로 말하지 못할 진실입니다.


 그렇담 우리가 무엇이든 진실처럼 이야기 하더라도 그게 진실인지 증명할 수 없는 것일까요?



진실에서 100%진실을 뽑아내는 법


 아직 실망할 단계는 아닙니다. 진실이 뭔지 정확하게 말하고 싶을때, 혹은 어떤 상황에서 완벽한 진실을 말하고 싶을 때에 쓰는 방법들을 연역법이라 합니다.




연역법이란 : 이미 증명된 하나 또는 둘 이상의 명제를 전제로 하여 새로운 명제를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연역(演繹, deduction)이라하며, 이러한 연역적 추리의 방법과 절차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을 연역법이라 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백과사전은 조금 어려운 말로 써야 기분이 풀리나 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미 진실이라는 몇가지를 기초로 새로운 진실을 만드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단,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게 진행해서 진실을 뽑아 내야 하는데, 이 연역법의 방법이 한가지는 아닙니다.

위키 링크가 있으니 한번 구경하고 오셔도 좋습니다.(연역 링크)

그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삼단논법인데, 다시 위키를 링크하지만 아래쪽은 보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삼단논법 위키링크)

삼단논법을 이용한 여러 논리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게 딱 이거 하나로 모아집니다.


바로 부분집합입니다.


A ⊂ B이라고 해보면,

A의 모든 것들은 결국 B에 들어갑니다. 이때, 이런 명제를 만들면 참이 되는 것입니다.

[A라면 B이다.]란 것은 참이 되는 것이죠. 삼단논법은 이를 뿌리로 합니다.


삼단논법의 가장 흔한 예를 들어보면


모든 동물은 죽는다. 

쥐집단은 동물이다.

쥐집단은 죽는다


그림을 보면 그저 위의 이야기는 수학적으로 부분집합 이야기가 되는 것 입니다.


쥐의 집합 ⊂ 동물의 집합  ⊂ 죽는 것의 집합


포함관계를 이용해서 완벽한 참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죽는 다고 말하기엔 너무 슬프다.)

 그러니 당연하게

쥐집단 죽는 것의 집합이 되는데,

그 렇다는 것은 모든 새밝은 쥐집단은 죽는 것의 집합의 표함이란 뜻이므로, 결국 쥐집단은 죽는다란 결론과 같습니다. 이처럼 삼단논법의 기본방법은 우리가 집합에서 가장 편하게 썼던 부분집합의 다른 해석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이 죽고 쥐집단이 동물이라는 두가지 진실에서 새로운 진실, '쥐집단이 죽는다.'를 얻어낸것이다.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가정을 공집합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공집합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어서 어디에가도 부분집합이 됩니다.


다시말하기 위해 아래를 보면

[ø인 것은 모두 A이다]라고 해보자. 당연히 ø ⊂ A이므로 참이됩니다.



이제 진실인가?.... 진리의 합의?


 이제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 하는 법을 배웠기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을 하늘의 나라 앞의 야수에게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가장 좋은 진실 하나가 있다면 멋드러지게 그 부분집합 이용해서 진실을 말하고 즐거운 발걸음을 하려는데,


문제가 하나 생겨버립니다.

바로

불완전성의 원리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 클릭)입니다.

요약하면


정말 진실이라도, 아니 진실 같아도 그것이 완벽하게 증명될 수 없다.



앞의 남자가 뒤에 손가락을 꼬은 이유는?



 이게 무슨 날벼락일까요.

어떤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그 근본은 결국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런 것입니다.

부분집합을 설명하고 죽음을 설명하고 쥐가 죽는다는 것을 설명해도 결국엔 이상한 개념의 벽에 막히고

결국에는 잘 모른다는 0.1%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진실이 100% 증명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말 동물은 다 죽는 것인가? 하는 것 부터가 문제입니다.)


결국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서있고, 야수는 미소를 짓겠죠.


그렇습니다. 사실 어떤 것도 절대적이진 못하지만, 절대적인 위치를 갖어야하는 것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실에 합의를 합니다. (그것을 공리라고 한다.) 그 합의점이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물음표에서 벗어납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인정하는 논리의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진리는 기초적으로 합의입니다.

죽음을 이야기 할 때, 이전에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음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단지 내가 나로써 합의한 공리인 것이죠.

나와 나의 생각의 공동체는 살아있음을 합의하고 내 존재가 죽음에 이른다는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의 없는 진실이 없습니다.



축구 경기도 하나의 합의로 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 다른 약점이 있다면, 진리를 더이상 넓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분집합, 즉 연역으로 만들어낸 진실은 이미 합의 된 진실에 이미 일부였다는 것이죠.

결국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다.


결국엔 지금까지의 노력이란 것은 결국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을 다시 써 놓은 것 뿐이라는 것이거나, 가정을 공집합을 두어서 별 쓸데도 없는 진실만 퍼부은 것입니다.


당신이 고민한다 하여도 결국엔 아무것도 해놓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일단 진실의 생성보다 축복의 길로 가는 것이 중요하니, 다시 야수의 앞에 돌아와보면,

마른 침이 계속 넘어가는 상황에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이제 축복의 길로만 들어서면 된다면 아직 끝은 아닙니다.


" 진실이 존재한다면 당신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럼 이제 상황은 되바뀌게 됩니다. 야수는 진실을 판단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어떤 진실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야수는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 증명은 결국 나의 고민(불완전성)에 다가섭니다.


만약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진실이란 집합이 공집합이 되므로 결국엔 이 명제는 참이 되죠. 그러므로 나는 축복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포기 하지 마라.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없어도 과정으로 이룰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고집스런 진실은 결국은 거짓입니다.

이 때문에 고집스런 진실과 이별할 필요가 있다. 대신 공리와 합의 안의 독립적인 진실과 살면 되는 것 입니다.

이제는 독립적인 진실로 이해해야..


 진실을 말하는 명제가 중요한 부분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연역이든 삼단논법이든 진실을 말하기 위한 이 구조를 만드는 것, 이 구조로 우리가 올바른 사고의 과정을 거치는 것, 이것이 딱딱하게 느끼는 명제의 무른 속 같습니다.


허술해보이지만 한번 맛보면 논리가 완성되는 것 자체가 맛나는 일이죠.


 수학도 마찮가지입니다. 마치 삶처럼!


하지만 줄어드는 지식에만 몰두할순 없죠. 그러기에 다음에는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높은 진실을 발견하는 방법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이전 / 다음~>


프리뷰에서 언급했다시피,

진리라는 개념 파악을 위해 명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모든 문제가 “그렇다”와 “아니다”의 조합만이 아니기 때문에

명제를 도입하는 일 자체가 큰 어려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면

“똥 뭍은 쥐가 겨 뭍은 인간에게 너 참 더럽고 공정한 사회가 아니구나!”라고 말한 다면

과연 이 명제는 맞는 것일까요?


그럼 이런 모호함이 왜 나오는 것일까요?

그리고 모호함의 원천은 어디일까요?


---------------- 모호함을 피하기 ----------------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그는 살인이란 범죄를 저지른 것이지만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모호함은 명제의 몸통, 조건에서 나옵니다.


가벼운 예를 들어보면,

“전과가 있는 사람은 나쁜 놈이다.”이란 명제를 보면,

보통 우리는 14범정도 된다면 대부분 정말 나쁜 놈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전과가 있는 사람은 나쁘다는 것은 맞는 말일까요?


일제시대의 안중근을 보면

그는 살인이라는 일을 저질렀고 그것은 분명 전과자 입니다.

하지만 그는 현재 뮤지컬 “영웅”의 주인공일 만큼 우리 사회에서는 강직한 사람으로 통힙니다.

이럴 경우에 사람을 죽인 사람이 나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범죄를 다르게 보이는 것은 바로 “나쁜 놈이다.”라는 조건의 모호성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서 모든 사람이 동의하기 어렵다.


조건에 감정이나 선입견이 들어가 버리면 보편적 진리 찾기에서는 이미 탈락됩니다.


진리라는 것은 슈퍼스타K처럼

“제 점수는요”라고

 각기 다른 결론이 나오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여튼 조건이란 것이 모호해져 버리면 명제가 되기 어렵습니다.


즉, 조건의 명확성이 완성되어야 명제의 모호성이 제거된다.


이런 모호함을 조금이나마 제거한 명제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수학”을 도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먼저 조건이 명확한이라는 정의를 이미 포함한 “집합”을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 집합과 명제의 관계도 ----------------


먼저 집합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면,


집합이란!

[어떤 모임에 포함되는지 포함되지 않는지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모임]


여기서 명제와 비슷하게나마 공통된 점을 찾을 수 있나요?

(밑줄을 이미 쳐놓았지만...)  <명확하게 구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줄긋고 확실하게!!

<너는 여기 모임의> “소속임!” 혹은 “소속이 아님!” 이라

확실히 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또한 모든 집합은 조건제시법으로 표현가능한데,

집합이란 것을 다시 이야기해 보자면

“조건이 제시되고 그것이 만족되는 것들의 모임.”인 해석을

“조건에 대해서 참이 되는 것들의 모임.”이란 명제적 문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집합과 명제는 공생의 관계를 유지한다.



명제의 참과 거짓을 명확히 구분 짓는 명제와 조건으로 원소를 갖아야 하는 집합이

서로의 필요를 위해서 동일하게 만납니다.


여기서부터 

집합과 명제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둘의 공생이 시작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해보면

이제 어떤 조건 p가 있다면, 이 조건에 참이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모아 놓은 집합을 P라 했을 때,


일 때,

집합 P를 조건 p의 진리집합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보면

포유류의 진리집합


만약 [ 조건 p : 포유류 이다! ]일 때,

친구집 강아지는 포유류이고,

시골집 닭은 조류입니다.


이를 집합으로 그리면 위의 벤다이어그램과 같죠.

이렇게 하면 진리집합 P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 어려운 길은 돌아가면 된다. ----------------


기본적으로 명제가 양산되는 논리학은 어렵다.

말장난 같이 보이기도 하고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르겠다합니다.


멋진 그림이 항상 직활강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말의 순서 조차도 어려운 것이 바로 명제이지만 이 길은 돌아갈 수 있는

사실 지름길은 아니지만 완만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집합입니다.


스키에서 직활강을 타는 것이 더 빠르지만 위험하기에 우리가 돌아가듯이

진리가 앞이라고 명제로 직활강하기 보다는

살짝 수학의 집합에 안착해서 가보는건 어떨까 합니다.


다음은 실제적으로 명제를 집합을 통해서 판단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전 / 다음~>

  / 다음 ~>


명제, 진리의 근원점에 서다.


진리 앞에서서


인간의 삶의 판단에 앞서 자신의 가지는 진리를 먼저 봅니다.

앞서 가진 진리의 경중 혹의 방향에 따라 사람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철학적 진리에서 잠시 벗어나 사전을 펼쳐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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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 네이버 국어사전


1 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

2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

 형식적 의미로 사유의 법칙에 맞는다는 의미에서의 사고의 정당함을 의미한다.

3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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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진리는 보편적 사실을 향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편적”이란 것에 주목하면

이 보편성이란 것이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보편적이 사실이라 칭할까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위의 사전 내용처럼 언제 어니서나 불변하는 그것은 어떤 것을 이야기 할까요?.



보편성을 잡아라!


이 보편성이 라는 것, 쉽게 보면 강을 갈아엎고 바닥파는 것처럼

무엇이 보편성에 부합한지 정확히 판단 가능하기도 하지만,

햄릿의 고민처럼 불완전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그 보편성이란 것이 어렵기만 합니다.


갈대 같은 마음을 제대로 잡아주는 것을 그리스에서는 철학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의 근원을 명제에서 그 근원을 두었죠.

바로 이 보편성을 적용하기에 가장 좋은 실험의 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보편성을 잡을 가장 좋은 무기는 어떤 것일까요?

가장 가까운 후보는

바로 참과 거짓이라는 기본적인 문제를 다룬 명제입니다.


보편성이라는 큰 수확을 위해

수많은 답을 가진 생활의 혹은 사회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1과 0의 문제,

즉 참과 거짓을 가지는 단순한 문제에서 접근해보겠습니다.


참과 거짓이란 불가분의 관계는

모든 문제에 존재할 것 같지만 사실상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쉽게 만나기는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나와 너가 다르지만

각자 자신을 “나”라고 부르는 것 처럼

개념은 확실하지만 각자의 위치에서의 참과 거짓은 참 모호하죠.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도구가 더 필요합니다.

바로 수학입니다.



수학, 참과 거짓의 원천이 되다.


참과 거짓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

간단히 예를 들어 보면,

"K대학교 02학번 OU양은 아름답다." 

라는 하나의 문제를 보겠습니다.

우리가 

“K대학교 02학번 OU양”이라는 대상이 “아름답다”라는 것과 연관관계를 지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보았을 때에는

완벽하고 고귀한 사실이지만 눈이 디옵터 -6이하인 사람에게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죠.

이는 어떠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에서 “나와 너”의 관계처럼

참과 거짓이 모호하게 꼬여있고 그 답은 사실 없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잠재적 범죄자의 99%는 휴대폰을 사용할 때 엄지손가락으로 문자를 쓴다”

이것 역시 대부분 참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범죄자가 한번쯤 핸드폰을 시도해본다면

아마 99% 엄지로 문자를 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면 대부분 99% 엄지로 문자를 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99%의 당위성에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이처럼 참이나 거짓이 거의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보편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보편성이 될 수 없습니다.


정리하면, 위의 두 가지 예처럼

일반적이 생활에서는 그 목적과 상태에 따라서 그 답이 변하기 때문에

아직 참/거짓이 가져야 하는 보편성이 모호하기도 하고 그 보편성이 갖는 당위성의 수준이 낮아지기도 합니다.


이런 완벽함을 갖추기 위해 보편성과 가장 비슷한 수학의 우리는 “명제”를 이야기하며

보편성과 진리에 근접해보고자 합니다. 



수학은 명제 위에서 논리적이 되고 명제는 수학 위에서 당위성을 얻는다.


이는 우리가 수학교과의 한 파트에서

당당히 “명제”란 이름으로 제목을 거는 이유이며

우리가 명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수학을 이용하는 이유입니다.



“명제”에 들어서기

그럼 참과 거짓의 보편성을 찾는 일이 과연 명제와 어떤 관계일까요?

간단히 명제를 정의 해보면


“명제” - 참과 거짓을 명확하게 판단되는 것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명제는 참과 거짓을 위한 수많은 질문들 중에서

우리가 이것은 명확히 '참!' 혹은 명확히 '거짓!' 이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 꽃은 아름답다”라는 것은

질문은 될 수 있지만 명제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지독한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꽃을 혐오할 수 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명제가 정말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 집 강아지는 포유류이다.”는 참이다.

(내가 강아지라 부르는 그것이 다른 사람이 부르는 강아지와 동일하다는 가정안에서요.)

이것은 포유류의 분류에 강아지가 확실히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위는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너무 돌아온 것 같아 정리해보면

이제 우리는 진리를 찾기 위해 보편성을 찾아야 하고

그 중 가장 근원적인 참과 거짓을 판명하기 위해 “명제”가 필요합니다.


또한 이제부터

명제는 이제 가장 큰 친구 수학을 통해서 그 모습이 구체화 될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보편성은 이제 딱딱한 숫자의 놀음에 들어왔지만

신이 그랬듯 고난의 길 뒤에는 위대한 뜻을 내뿜을 것이고

그 목적 뒤에는 보편성을 갖는 진리라는 파트가 그 다음 숙제로 남을 것입니다.



  / 다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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