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자체를 워낙 힘들어하는 성격 탓에 밤 10시에 하는 드라마타임을 지키지 않습니다. 때문에 유행의 중심에 서는 드라마 들은 한창 뜨고 난 다음에 아는 편이죠. 최고의 사랑이 그랬고 오늘 이야기 할 뿌리 깊은 나무도 그렇습니다. 늦었지만 뿌리 깊은 나무를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참 이런 왕이 있다면입니다.

  하지만 지금 드라마의 전체 스토리를 적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1022일 뿌리 깊은 나무의 마지막 편을 감상하면서 하루에 있었던 많은 생각들(특히 나꼼수의 정봉주 깔때기가 진짜 깔때기로 변하는 사건에 대한 사건)을 마무리 해주는 묘한 생각 덕에 키보드를 두들깁니다.

  

1. 세종대왕 이도와 밀본 정기준의 마지막 대화

  만약 정기준이 (슈욱 하는)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서 객사하며 호위무사의 품에 안긴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자신의 지난 일을 반성하며 착하게 살자.’하면서 마무리 되었다면 이 시간에 그저 밥 메뉴 걱정이나 하고 있지 않을 까 합니다. 참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이렇게 그냥 죽지 않아서.


 여튼 부상을 당한 밀본 수장 정기준은 비밀 통로를 이용해 궁 안 왕의 의자에 앉습니다. 또 그곳에서 세종대왕 이도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정기준 앞에서 왕의 첫마디는 당신 덕에 백성을 사랑할 수 있었다.’ 고백합니다. 당연히 정기준이 왕의 품에 안겨 사랑의 눈빛을 주고받는 본격적 멜로 막장이 아닌 이상 이 대화의 시작에서 무겁게 느껴지는 주제감은 극을 더 극적으로 만듭니다.


멜로는 이래야 제맛.


(아래 접어놓은 내용은 이도와 정기준의 마지막 대화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의 줄거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정기준이 한글의 반포를 막으려는 세력임을 그리고 왕 이도는 한글을 어떻게든 반포하려는 두 세력의 역사를 한 대화에 압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다소 극의 마지막이 칼부림과 피바람으로 약간 어색해지기도 했지만 이 드라마가 설정해 놓은 절정의 해소는 조용하고 어두컴컴한 궁의 한 곳에의 두남자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의 장을 그리고 그 내용을 곱씹어보고 싶었습니다.

   


2. 확대해석1 - 정기준이 왕의 자리에, 왕은 그 아래에 있었다.

  이 절정의 마무리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무엇보다 이도와 정기준의 위치 선정입니다. 왕인 이도는 아래에 서있습니다. 무엇인가 알고 쫒아 온 것처럼. 그리고 신하인 정기준은 왕의 자리에 있습니다. 권력의 기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바뀌어 있습니다. 역적이 왕의 자리에 앉아있고 왕이 그 자리로 들어옵니다.

  단지 극의 줄거리 상 정기준이 먼저 그 장소에 입장했기에 왕의 자리에 앉힐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자리는 권력의 상징입니다. 심지어는 정치에서 어떤 발표자를 둘러싼 위치만 에둘러 보더라도 그 권력 구조를 셈할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

  정기준이 갖는 마지막 죽음의 장소는 왕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를 질책하는 왕은 아래에 있습니다. 극을 처음부터 시청했던 사람이라면 이 자리배치는 당연한 것입니다. 극 내내 왕은 그 자리에 편안히 앉을 수 없었죠. 오히려 백정의 의자에 앉은 정기준이 더 왕 같은 권력을 행사합니다.

정기준은 왕의 자리에서 왕을 맞이합니다.


  그리기에 마지막 그 궁 안의 마지막 방이란 장소는 오히려 더 현실적입니다. 권력의 중심이 왕의 자리에, 그리고 그 자리의 원래 주인인 왕이 서있는 모습으로 반영된다고 봅니다. 동시에 그 장소는 조금 더 희망이 반영된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가짜이지만 힘을 휘두르는 권력자는 죽고 약하지만 진짜인 권력자(이도)는 제자리를 찾습니다.

  2011. 지금 어떤가요. 헌법상 왕인 국민이 헌법상 권력의 자리에 앉아있나요?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그 시간 혹은 그 장소가 있을까요? 전 있다고 봅니다. .

분명 이 희망의 장소는 언제든 도래합니다.


   

3. 확대해석2 - 권력자의 변명과 왕의 귀환

  백성의 왕, 혹은 헌법상 왕과 권력자와의 쓰라린 대화를 보면 그 희망의 시간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정기준이 이도에게 내뱉는 대화 중에서 한글을 통해 백성들은 더 속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결국 속아 이용당하는 말 알아듣는 개새끼로 백성을 비유합니다. 아무리 지혜를 갖더라도 결국 선동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왕의 반론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어떨 때는 이기고 어떨 때는 속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지기도 하겠지

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역사니까 또 지더라도 괜찮다. 수많은 왕족과

지배층이 명멸했으나 내 백성들은 이 땅에서 수 만년 동안 살아 왔으니까

또 싸우면. 되니까.

-세종대왕 이도 in 뿌리깊은나무-


  ‘또 싸우면 된다.’는 이도의 결론은 참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부분입니다.

  이때 드는 생각은 뿌리 깊은 나무에서의 한글‘SNS’혹은 진실이란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 이는 상당히 재미있는 대응이 나옵니다.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트위터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조선의 한글이 반포된 것과 같은 엄청난 전파 속도와 정보력을 제공합니다. 그 무서움은 정기준, 즉 권력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정치적인 판결로 유죄가 되었다는 의견이 SNS로 퍼지고 있습니다.


  특히 22일은 BBK스나이퍼라는 정봉주의 구속 확정 판결이 난 날입니다. 억울한 판결이야 언제든 법조계의 문제였지만, 오늘은 그 이전과는 다른 움직임이 보입니다. 바로 트위터-페이스북등 SNS의 힘입니다. 그들은 징역 1년의 사건에 분노하고 기억을 다짐합니다. 약자의 논리로 잊혀지며 끝났던 지난 사건들과 다르게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현실이 이제는 세상으로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되고 있습니다.

  '개인은 영리하나 집단은 우매하다.'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이 갖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한글을 통해서 먹통인 백성이 말하는 백성이 되었고, 정치 관심없던 집단을 표현하고 분출하는 SNS 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리한 집단의 시작입니다.

  또한 일전에 보수언론에서 트위터와 나꼼수를 괴담의 근거지라고 했습니다. 그말이 일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현실에서도 어떤 의도속에 속는 일 많죠.(문제는 그 가해자가 권력층이란 것이 문제이고요. 댓글 알바같은) 그렇기에 정기준은 한글로 인해 백성들을 기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경고합니다. 지배층의 변명은 동일합니다. 그런 현실에 당당히 헌법상 왕으로써 대처할 수 있는 대답이 바로 이도가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아도 좋습니다. 져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역사이고 또 싸우면 됩니다.

그럼 정기준이 왕의 자리에 있더라도 그 앞에서 당당한 이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의의 최후를 맞이하는 희망의 방이 곧 열리겠죠.

당당한 이도가 될 수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