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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만에 블로그를 쓰는 것 같습니다...)
(다소 내용이 복잡해지는 것 같아 이전 글을 한번 총 정리하려 합니다.)

우리가 이름으로나마 알고 있는 수는 보통 '자연수', '정수', '유리수', '실수', '복소수' 정도 입니다. 이 수 체계는 수학적으로 어떤 편의나 임의적인 줄긋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연산'이라는 구조를 통해서 하나씩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연산의 확장에 그리 어려운 조건과 구조를 넣은 것이 아닙니다. 특히 연산이라고 하면 단지 '덧셈'과 '곱셈'에 대한 것입니다.


19. 일단 정리

그래서 지금까지의 수들을 구조적으로 재조명하기로 한 것입니다.(preview) 그 시작인 자연수는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입니다. 어떤 사물과의 직관적인 일대일 대응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특히 수로 쓰는 행위는 그 자체로 엄청난 효율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그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연산을 실시하는데 그것이 덧셈입니다.(part 1)

하지만 이 덧셈이란 연산이 구조적으로 의미 있기 위해서 고민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즉 덧셈이란 연산 자체가 구조를 생성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구조적으로 크게 필요한 것은 세 가지 조건에서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항등원, 역원, 결합법칙>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연산이 이 세 가지를 만족하는 집합과 연산을 묶어 군(group)이라 합니다.(part 2)

그러나 자연수에서 덧셈은 너무나도 허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허점을 채우기 위해서 자연수에 '0'과 '음수'를 첨가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뺄셈'이 정의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수를 정수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이는 적어도 덧셈에서 완벽한 집합입니다.(part 3)  덧셈이 완성되었기에(더불어 뺄셈까지 완성) 그 다음 관심은 곱셈으로 넘어갑니다. 특히 곱셈이 갖는 정의를 새로 하면서 덧셈에서 종속되는 것에서 약간 독립합니다. 특히 분배법칙은 덧셈과 곱셈을 이어주는 소중한 관계가 됩니다.(part 4)

 그 독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 이제 덧셈과 동일한 위상을 갖는 연산으로 곱셈을 상승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덧셈에게 부여했던 세 가지 조건을 이제 곱셈에도 부여해야 합니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결합법칙 : aX(bXc) = (aXb)Xc
2. 항 등  원 : 1이 항등원, aX1 = 1Xa = a
3. 역      원 : a가2의 역원,  2Xa = aX2 = 1



20. 이미 준비된 연산 '곱하기'

마치 모든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복잡한 느낌이 들지만 연산 '곱하기'는 위 세 가지 조건 중에 2가지 조건은 성립되어있습니다. 자세히 말하면 곱하기는 1번 결합법칙이 성립함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으며(사실 엄격하게 증명하면 어렵지만),  또한 2번의 항등원의 경우에는 어렵지 않게 '수 1'이 곱해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수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정수'에서 아무런 무리 없이 성립합니다.

그렇기에 곱하기가 정수란 체계에서 필요한 것은 이제 3번 조건 역원뿐입니다. 역원의 조건을 만족하면 곱하기 하나의 연산으로 구조를 세울 수 있기에 먼저 정수에서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2의 역원을 구하는 것은 다음의 답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정수 x에 대하여 2x=1의 해를 구하면?


만약 x의 값이 1/2로 나옵니까? 그럼 틀리신 것 입니다.
 x는 정수이기 때문입니다.

답은 '없습니다.'입니다.

즉 어떤 정수를 넣어도 답을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약수가 되는 특이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관계에서는 이렇게 역원을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의미를 지닐까요? 정수에서 곱셈의 역원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그 안에서 더 큰 구조적 의미를 찾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정수에서 곱하기가 구조적으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수의 확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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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가장 간편한 것은 집합론입니다. 사실 집합론 자체가 무한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집합론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한집합을 먼저 인식하지만 정의만큼은 무한집합으로 시작합니다.

 

자세히 말하면, 자기 자신과는 다르지만 자신 안에서 자신과 개수가 똑같은 집합을 고르는 작업이 가능하면 무한집합이라고 합니다. 아래 그림으로 보면 조금 더 확실한 무한 집합이 보이게 될 것 같습니다. 무한집합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연수이죠. 자연수는 자신의 부분집합인 짝수와 개수가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로)

 

집합론적인 무한은 자신의 안에 자기와 같은 개수의 집합을 담는 것 입니다. (플리커 h.koppdelaney님의 사진)

하지만 이런 엄격한 것으로 무한을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느끼는 무한은 큰 수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큰 수인 무한을 다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4. 무한의 이미지

 

실재로 학생들에게 무한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말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큰 수입니다. 무엇보다도 크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런 것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자랑하기'의 한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구슬이(뭔 요새로 따지자면 빨간 물약정도겠죠.) 100개 있어~ 나는 1000개! 그다음 나올 만한 것은 역시 '무한개'입니다. 즉 어떤 것이 무한개 있다는 것에 대한 가장 큰 이미지는 큰 수입니다.

 

이런 자연스런 이미지처럼 만약 무한에게 순서를 주게 된다면 아마 무한은 맨 뒷줄일 것입니다. 이런 이미지의 무한은 참으로 편합니다. 왕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만약 은행에서 번호표를 기다린다면 무한 번은 은행원의 얼굴도 맞이할 수 없다는 약간의 불편함은 있습니다.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한다면 무한의 자리는 여기에 없습니다.


 

이것에서 집합론에서 다루는 엄격한 무한보다 보다 정겨운 무한을 만날 수 있습니다. 훨씬 이미지에 와 닿습니다. 전통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것으로 우리는 무한을 포장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수보다도 큰 수'라는 당연한 이미지를 통해 말입니다.

 

즉, 무한은 모든 큰 수 보다 큽니다.

 

 


5. 큰 것보다 큰 것, 무한

 

그럼 무한을 표현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무한은 누구보다도 큰 '레전드 수'인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이런 것을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학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실수 M을 아무리 잡아보아도, 무한은 M보다도 크다.'

 

이렇게 표현한다면 우리가 무한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다룰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지 못한 곳으로 많은 것들을 보낼 수 있습니다. 가장 엄격해야할 무한이지만 어쩜 가장 두루뭉술한 방법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 자체가 엄격한 무한으로 다가가는 첫 번째 발걸음인 것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죽는 어느것보다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플리커 Super Mega Action Plus님의 사진)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만약 이 한국에서 무한대로 사는 사람‘X’가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사람들이 죽어서 어느 곳에 모여 이야기 할 때 한 영혼이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내가 31415년에 죽을 때, X가 나의 곁을 지켜주었지.’ 그럼 옆에 있던 한 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할아버지 저는 271828년에 죽을 때에도 X가 지켜주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끊이지 않고 어떤 사람이 나와도 X가 자신의 마지막의 자리를 지켜준 것입니다. 자꾸 영혼이 새로 올라와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한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X가 영원히 사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X의 정확한 나이를 말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6. 무한을 다루는 단서

 

그럼 우리는 이로써 하나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한을 표현하는데 있어 그냥 큰 수라고 말한다면 무한에게 주어진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수보다도 큰 수라고 표현한다면 많은 부분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무한에 대한 추측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정리하자면 ‘무한대는 정말 크다.’라는 말을 하고플 때, ‘X가 무한이라면 어떤 수 M을 잡아도 M<X 이다.’ 라고 쓴다면 다룰 수 없는 X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재미있는 문제를 보면, 우리가 흔히 쓰는 ‘자연수의 집합’이 무한하게 커진 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까요? 1+1=2라는 것만큼 이 문제는 아리송합니다.

 

다음 글은 이 문제를 통해서 우리가 무한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서 극한을 이해할 수 있는 시작점을 삼겠습니다.


자연수의 집합이 무한한 값을 갖는 다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플리커 THEfunkyman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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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주변인들에게 문의를 받는 수학 문제 중 하나가  "0.9999······=1"이라는 것입니다. 9가 한없이 이어지는 이 수가 과연 1과 동일한 것인지에 대한 것은 논란이 많죠. 분명히 모양이 다른 두 개의 값이 같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것은 1/2=2/4와 같이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 혹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확연하게 다른, 특히 1이 더 큰 수로 보이는 이 명제는 많은 이에게 의심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없이 이어지는 수의 값은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이를 쉽게 증명하는 이는 보통 “1/3 = 0.333······이므로 양변에 3을 곱하면 0.9999······=1이다.”라고 증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하게 증명하지 못한 하나가 남습니다. 그럼 정말 ‘1/3 = 0.333······’인지 말입니다. 적어도 무한번 나눗셈이 가능한지 부터가 문제이죠. 그렇기에 이 증명법은 단지 문제의 어려운 것을 잘 감추어 놓은 것[각주:1]뿐입니다.

1. ‘무한’의 덫

 위의 이야기에는 중요한 단어를 뽑아 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없이’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일상에서 수도 없이 써온 말입니다.(방금도 ‘한없이’의 비슷한 표현인 ‘수도 없이’가 나왔죠.) 우리는 이 말을 일단 ‘무한’이라고 합니다.(무한 = 한이 없다.) 같은 말이지만 왠지 ‘무한’이 더 간지 납니다.

 물론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한의 뜻과 느낌을 알고 있습니다. 해가 지는 바다 끝 수평선에서 상상되지도 않는 거리의 별에서 그리고 남은 제대 날짜 앞에서. 하지만 이 모든 예는 사실 ‘한없이’가 아닙니다. 수평선의 끝엔 아메리카가 있었고, 국방부 시계는 지금도 제대를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가 끝도 없다는 뜻으로 ‘한없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재로 그 단어를 접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제대를 위한 국방부의 시계도 결국 유한입니다.




 그렇기에 막상 ‘무한’을 맞이하면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많습니다. 0.9<1 이고 0.99<1 이며 0.9999999<1 인데, 유독 무한이라는 단어가 접해지는 ‘0.9999·····’은 1과 값이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무한에서 마라토너는 거북이 랑의 달리기경주[각주:2] 에서 전혀 이길 수 없는 것 같은 그런 환상도 제공하기도 합니다.(이 이야기는 이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무한을 말하는 법

 그럼 무한을 수학적으로 정확히 정해지고 싶어집니다. 물론 그 과정은 상당히 중요한 과정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무한 = 유한이 아니다.’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는 정의는 지금 다룰 필요성이 적어 다른 글의 링크로 대신합니다.(링크) 우선은 “한없이 크다.” 정도로 알고 있다 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정의가 되었으니 이것을 한번 써보고 싶어지는데 숫자 십은 ‘10’ 만은 ‘10000’ 억은 ‘100000000’로 쓸 수 있지만 1억을 1억 번 곱한 것 보다 큰 것인 ‘무한’은 이곳에 적기에 공간이 너무나도 좁습니다.  그러기에 무한의 수학적 기호를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8을 뉘어놓은 모습으로 우리는 무한을 표시합니다.



 그 기호는 이미 정해져 있죠. 바로 숫자 8을 옆으로 뉘어놓은 것 같은 모양인 입니다. 원이 두 개 겹친 이 모양은 영원히 반복한다는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그 상징성이 직접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주인공인 박사가 자신의 정신병과의 끝없는 싸움과 극복을 상징하며 자전거 바퀴로 그리는 무늬가 이 무한의 상징 ‘∞’입니다.


3. 무한을 다루는 법

 사실 수를 다루는 것은 상당히 쉬운 작업입니다. 예를 들어 ‘2x+1’이란 것의 ‘x’에 ‘10’을 넣으면, ‘2*10+1’이고 계산하면 ‘21’입니다. 그럼 여기에 ‘∞’을 집어넣을 수 있을 까요? 다시 말하자면 ‘2*∞+1’이란 것이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과연 2*∞+1은 무엇일까요?

 사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이는 큰 문제이며 중요한 점입니다. 앞으로 이 무한을 이용하서 우리는 수많은 이론을 펼쳐갈 것입니다.

 어떤 값은 근사치에 도달하기도 하고, 비교를 하기도 하면 무한히 반복되는 계산식의 값을 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해결 할 수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작업의 대상이 미지수인 x에 넣는 작업조차 못하는 것이 바로 ‘무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통해서 이를 해결할 것입니다. 우선 다음을 기초로 합니다.

a. 무한은 어떤 수 보다 큰 것이다.
b. 하지만 무한을 일정한 값으로 대입할 수 없다.
c. 그렇기에 수를 키워가면서 그 큰 수를 유추하고 가까워지는 값을 무한에서의 값이라 한다.

 위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가까워지는 값’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이제부터는 [극한]으로 부를 것입니다. 영어로는 고등학교 수학 시간 속 너무도 익숙한 단어 ‘limit’입니다. 이 극한이 바로 무한을 다루는 가장 기본적인 툴(tool)입니다. 즉 이 ‘극한’을 통해 무한을 다루는 것입니다.


4. 과연 ‘1= 0.999·····’인가?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정말 1= 0.999····· 인지 말입니다. 그럼 위의 방법대로 단번에 무한번인 0.999·····을 구할 수 없습니다. 즉 천천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0.9 그다음에 0.99, 0.999, ····· 이렇게 하나씩 구해서 그 규칙 혹은 가까워지는 값을 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한을 다루는 문제입니다. 더 자세한 방법은 아래의 절차를 따릅니다.

0.9    = 0.9
0.99   = 0.9 + 0.09
0.999 = 0.9 + 0.09 + 0.009
      .
      .
      .


 이렇게 계산을 하면서 1에 가까워짐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인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쉬움이 있지만 아직은 바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문제는 지금까지의 것으로는 설명하기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수평선과 저 별에 가기에는 아직 재료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극한(limit)에 대한 정확한 쓰임을 통해서 이 공포의 문제 ‘1= 0.999·····’에 대해 더 핵심적인 방법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정말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원하시면 공식으로 정리해 놓은 이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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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순환오류의 일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2. 보통 이 이야기를 제논의 역설이라 합니다. [본문으로]


이전 글에서는 자연수에서 정수로의 확장이 단순히 음수와 0의 추가가 아니라  <하나의 집합, 하나의 연산>의 쌍을 의미있는 구조(군, group)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확장을 하게 된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즉, '자연수'에서 가장 기초적인 연산인 '더하기'를 더 의미있게 활용하기 위해서 자연수에 음수와 0을 더해 '더하기'에서 완벽한 집합을 만들었는데 그 집합이 바로 '정수'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수는 '더하기'에서 완벽한 구조를 이룬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서도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사칙 연산에서 우리가 완성한 것은 '덧셈과 덧셈의 역 연산인 뺄셈' 정도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곱셈과 나눗셈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제 부터 주인공은 '더하기'에서 '곱하기'로 넘어갈 시점인 것입니다.

 
16. 연산 '곱하기'란 무엇인가 - 곱하기(곱셈)

우리가 연산 곱하기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동일하게 느껴질 것 입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와 아이의 첫번째 벽이 되기도 하는 '구구단'입니다. 구구단을 달달 외우면서 곱셈을 하나의 문자표처럼 외우면서 머리속에 '삽입'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 삽입에 대한 확인을 이용한 '놀이', 구구단 게임을 통해서 상대방을 무안하게 하거나 집단의 즐거움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물론 구구단을 통한 곱셈의 '삽입'은 복잡한 계산으로 난무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수 조건이긴 합니다만 이미 암산의 대상이 되어버렸죠.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일상에서 느껴온 곱셈은 구구단을 넘기가 힘듭니다. 또한 곱하기는 그 정의를 도입할 때 단지 '더하기의 축약판'이라는 점으로 처음에 적용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2 X 3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정의합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2를 3번 더한다고 어렵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곱셈은 쉽게 더하기를 반복계산으로 정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곱셈이 그 자체로써 연산의 위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더 복잡하기만 할 뿐 그저 외우는 '삽입'대상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곱셈이 하나의 유연한 연산으로의 도약을 꿈꿀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도약이 수의 구조상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이 정수라는 더하기에 대한 완성을 이룬 구조에 곱셈을 다시한번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먼저 곱하기에 대한 정의가 더하기의 반복계산이란 것에서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덧셈의 경우에서 처럼 이 과정을 상당히 복잡한 과정이고 그 과정이 불필요합니만 정확한 정의를 페아노 공리측면으로 아래에 조금만 접어 놓겠습니다. (정신 건강상 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17.  연산 '곱하기'의 결합성

      
이 모든 정의에 간단히 넘어가더라도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곱하기가 더하기를 이용한 정의를 갖지만 보조 연산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산으로 개별적으로 정의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하기 뿐만 아니라 곱하기도 하나의 당당한 연산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몇가지 연산으로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시행해 볼 요인은 바로 곱하기가 결합법칙을 성립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결합법칙에 대해서 이 전에 짧게 그  중요성을 이야기 한 적이 있어 자세한 설명은 링크(링크)로 대신합니다.(결합법칙에 대한 링크 / 구조에 대한 링크)

하지만 간략히 설명하면 결합법칙이란 것은 임의의 정수 A, B, C를 고를 때 곱하기에 대해 AX(BXC)=(AXB)XC 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질이 성립함을 보이는 것은 페아노의 공리를 통하면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지만 어렵지는 않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직관적으로도 금방 이 성질이 곱하기에서 문제 없음을 알 수 있죠.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은 집합위에서 자유로운 연산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연산으로 곱하기는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만, 이것으로 확실한 독립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사실 연산을 만드는 일은 상당히 쉽습니다. 규칙이란 것이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곱하기가 가장 기본 연산인 +와 함께 중요한 하나의 연산으로 대우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8. 곱하기를 중요하게 하는 요인 - 분배법칙 (배분법칙)

수많은 연산중에서 곱하기를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 까요?  단지 그냥 더하기의 반복 계산을 쉽게 계산하기 위한 하나의 구조일 뿐일까요? 이 답을 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구조를 단단히 하는 방법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에 설명했던 군(group)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구조적인 조건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 중하나가 바로 위에서 제시했던 결합법칙입니다. 그리고 곱하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은 바로 '분배법칙(배분법칙)' 입니다. 아마 대부분 수학책에서 한번쯤은 배운 내용이고 또한 열심히 배운 분이라면 '이게 뭐 대단한 것이지?'란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수능에 나오지 않을 뿐이지 분배의 법칙또한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선 분배법칙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집합 A 위에서 연산 x가 연산 +에 대해서 분배법칙이 성립한다는것은
집합 A의 임의의 원소 a,b,c의 원소에 대해 다음이 성립하는 것이다.

ax(b+c) = (axb)+(axc)
(a+b)xc = (axc)+(bxc)

하지만 이 관계가 갖는 구조적인 중요성에 대한 언급은 글의 길이 관계상 다음글로 미루겠습니다. 하지만 곱하기에 대해서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곱하기는 더하기와 아무 밀접한 관계(분배법칙)을 갖으면 그 스스로도 하나의 연산으로 온전히 설 수 있는 힘(결합법칙)이 있는 중요한 연산이란 것입니다. 이제 곱하기를 중심으로 수 체계가 재정립됩니다.

이제 진정한 곱하기의 역습이 되겠습니다.

이제 더하기과 곱하기는 동등한 입장에서 구조를 완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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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전 글에서 수학적 대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닫힘성 위에 결합성과 항등원 그리고 역원의 존재성에서 찾았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구조를 우리는 군(group)이라 합니다. 이 군에서는 수학적으로 상당히 강력한 성질들이 생겨납니다.

 


   이런 면에서 먼저 살펴보았던 자연수는 상당히 온전하지 않은 대수적 구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수는 더하기에서 조차 항등원과 역원을 포함하지 않는 불완전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몇 가지 체계를 더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다행이도 우리가 경험상 충분히 자연수가 결합적인 성질을 만족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한 가지 구조는 만족합니다. 따라서 지금 부터 2가지만 완성하면 더하기에 대해서 구조적 완성되겠습니다.

   

12. 더하기의 완성을 위한 확장 : 항등원 '0'

  먼저 1번부터 시작하는 자연수의 왼쪽에 슬며시 '0'을 붙여줍니다. 이렇게만 해도 우리는 '더하기에 대한 항등원'이라는 귀중한 구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이제 아무리 더해도 문제없는 고유의 원소가 자연수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실재로 자연수에 '0'을 포함한 집합을 '확장된 자연수'라고 하기도 합니다. 실재로 '0'을 쓰던 고대문명이 상당히 존재했던 사실로 부터 우리는 자연수처럼 쓰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수적으로 '0'의 쓰임이 명확해진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입니다.

태풍의 눈처럼 구조의 중심은 항등원이 가장 기초적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이전 글에서 항등원을 언급했습니다만, 다시 써보자면 어떤 자연수'N'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N + 0 = 0 + N = N 이 된다. 이 성질에서 우리는 덧셈에서의 가장 중심 구심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가장 적은 확장을 통해서 가장 큰 효과를 본 것이죠. 

'0'은 기본적으로 꼭 구조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얻는 바가 많습니다. 이 '0'하나 만으로 많은 철학적 논쟁이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말장난했었던 저번 글을 링크하겠습니다. ('0'에 대한 다른 글(링크)) 하지만 '0'하나만으로는 약간 부족합니다.

   

13. 더하기의 완성을 위한 확장 : 역원 '음수(음의 정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바로 역원입니다. 역원은 기본적인 의미는 '항등원으로 돌아가기' 입니다. 그러기에 원소마다 돌아가야 할 길이 다르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1은 방금 확장되었던 '0'으로 돌아기 위해서는 1만큼, 100은 100만큼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냥 1의 역원은 1 , 100의 역원으로 100으로 쓰게 된다면 표현상 엄청난 혼란이 오기 때문에 특수한 기호를 붙입니다. 바로 '-'인 음수[각주:1]입니다.

  즉 우리는 '-1'이란 것은 1이란 원소의 더하기에 대한 역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익숙한 '-'는 역원의 개념보다는 빼기의 개념으로 익숙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의 표현은 단순히 빼기를 위한 도구로 처음 도입되곤 하는데, 이 점으로 미루어보자면 굳이 어려운 역원의 이미지를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인간은 그와 상응하는 연산을 생각한 것 입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를 '빼기'라는 이미지 보다는 '더하기란 연산에서의 역원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수학적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이 ‘오십 보 백 보’란 속담을 생각을 하면 됩니다. 기본적인 의미야 ‘거기서 거기다.’라는 뜻이겠지만, 생각해 보면 ‘오십 보의 역원은 오십 보 백 보의 역원은 백 보가 된다.’란 역원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 말하자면 덤앤 더머더라도 덤과 더머는 다른 역원을 갖는 것이죠.

덤 앤 더머라도 서로 다른 역원을 갖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자연수의 개수만큼 '-'가 붙은 "음수"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음수의 발견을 통해서 우리가 계산에서 엄청난 이득을 구조상 획득하게 됩니다.


  

14. 정수에서 완성되는 '더하기' 

 자연수와 '0' 그리고 음수(음의 정수)에서 우리는 하나의 완벽함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 수체계를 정수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정수에서  x+3=5라는 방정식이 나왔을 때, 우리는 자신 있게 양변에 -3을 더함으로써 x=2임을 계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계산 과정은 +3을 등호의 반대편으로 보낼 때 '-'를 추가하여 계산하는 방법을 유추 방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즉 중/고등학교 수에서 방정식의 가장 중이한 풀이 방법 '이항'이 더하기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3+5 = 3+x라는 사실 역시 우리가 양변에 -3을 더하는 것으로 x=5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과정들은 역원의 합이 항등원이 되고 항등원은 더하기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아 사라지는 것을 이용한 것입니다. 뭐 간단한 계산이라고 생각되시죠? 하지만 그 간단한 계산 안에서는 정말 많은 구조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복잡한 배합 속에서 우리가 쉽게 20%의 산소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정수의 모형은 흡사 물의 원소 처럼 0을 중심으로 양수와 음수가 있습니다.


  그깟 더하기라고는 하지 말하면 지금까지의 의미가 무색해지겠지만, 자연수를 말할 수 있었던 근간은 태초부터 더하기뿐이었습니다. 과학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 복잡하고 어려운 인간의 것이란 것도 DNA 나선형의 작은 구조 시작된 계산입니다. 이 시작이 수로 말하자면 더하기 입니다. 반대로 기독교의 비유로 하자면 아담 같은 존재이죠.

  이 작은 구조의 확장이-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원소의 수도 변함없이(관련 내용 링크) - 구조적인 완성을 주게 됩니다. 이러한 완성이 아주 의미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정수의 구조를 바탕으로 만든 '정수론'만 접하게 되더라도 그 작은 차이가 방대한 이론을 낳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연수와 정수의 차이가 작아 보이더라도 구조적으로 볼 때 극복할 수도 없을 만큼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 하지만 만족하기엔 아직은 이른 '곱하기'

  맨 처음 자연수를 이야기 할 당시 더하기를 언급한 후에 아주 잠깐 '곱하기'를 언급했었습니다. 물론 곱하기의 정의 자체는 더하기의 간결한 표현이란 것으로 이야기 되었죠. 역시 정수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연산 곱하기는 정수로 확장된 이곳에서도 기를 펴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합니다. 하지만 곱하기에 따른 많은 이야기들이 진행되기는 합니다.

  유클리드 호제법이라든지[각주:2] 약수와 배수의 문제는 곱하기가 단순히 계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로써 충분한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정식의 문제로 돌아가자면 곱하기는 애물단지가 됩니다. 아주 간단한 방정식인 2x=1이란 것은 정수에서 풀 수 없는 숙제 일 뿐입니다. 물론 풀어내는 방정식도 있기 마련이지만 이런 간단한 계산조차 풀어내지 못하는 체계입니다.


곱하기는 다음


  이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구조적인 약점은 앞으로 더 나가갈 체계의 방향입니다. 자연수에서 가장 중요한 더하기를 위해서 우리가 정수를 만들었듯이 이제까지 ‘쭈구리’ 인생이었던 '곱하기'를 위해서 다시 그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길이 그렇게 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정수를 위했던 작업을 재실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다음글로 살며시 미루겠습니다.


<~이전글  / 다음글~>

  1. 엄격하게는 음의 정수입니다만 현재 자연수의 음수만을 이야기 하므로 음의 정수를 음수로 쓰겠습니다. [본문으로]
  2. 2개의 자연수의 최대공약수를 구하는 알고리즘 중 하나. 호제법이란 말은 두 수가 서로 상대방 수를 나누어 원하는 수를 얻는 알고리즘. [본문으로]

이전 글을 통해서 더하기와 곱하기를 통해서 자연수란 공간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이는 자연수란 구조가 그저 자연스럽게 쓰인다라는 쓰임이나 목적에서 벗어나 하나의 당위성 혹은 하나의 구조적 기초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자연수는 곱하기보다는 더하기로 생성된 공간입니다. 그러기에 자연수란 공간은 더하기라는 수학적 구조의 완성에 욕심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그럼 수학적 구조가 완성된다는 것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수학적으로 하나의 연산이 구조적으로 완성될 수 있을 까요? 가장 기초는 preview에서 언급한 닫힘성입니다. 어떤 구조든 그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연산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닫혀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을 이을 중요한 세가지가 있습니다. 카메라를 받혀주는 든든한 삼각대 처럼 말입니다.

좋은 구조는 튼튼한 삼각대 같습니다.




8. 큰 스승 - 항등원

두 가지 중에서 먼저 언급할 것은 '항등원'입니다. 고등학교에서 한번쯤 들어왔을 단어입니다만 조금 우화시켜보자면,  연산이라는 것을 아무리 시행해도 전혀 '쓸모 없는' 원소입니다. 사실 전혀 쓸모 없는 연산이지만 그것은 연산에서의 일이고 실재적으론 구조상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며 주인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쓸모 없다는 것을 하나의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항등원이 만약 e라고 한다하면
a ○ e = a
          = e ○ a 입니다. 조건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는 아래에 적겠습니다만 중요하진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떠한 원소를 상대(연산)하더라도 그 자신의 값을 돌려주는 것이죠. 그래서 항등원을 비유하자면 균형의 추 같은 역활입니다. 한 평생 조용히 한자리를 지키는 수도승과 같은 이미지 처럼 흔들림이 없는 값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한 구조와 연산에 항등원이 없다면 마치 모두를 지지해줄 큰 스승한명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항등원이 같은 특이점은 강조하기 부끄러울만큼이나 가득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실 연산에 대한 어떤 구조든 닫힘성만 보장된다는 전제하에서 가장 먼저 찾는 요소중에 하나가 바로 이 항등원입니다. 적어도 항등원이 있다면 출발점은 확보한 셈이니까요.


9. 되돌리는 힘 - 역원

항등원의 추상적인 역활에 비해 역원의 역활은 비교적 정확합니다.  '역원'이란 큰 스승 항등원으로 되돌려주는 것들 입니다. 역원은 각자에 따라 그 크기가 다릅니다. 만약 내가 어떤 곳을 100m 떨어져 나왔다면 그에 대한 역원이란 내가 태어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 거리만큼이 됩니다. 항등원의 상대가 모든 원소인데 반해 역원은 개별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간단한 식으로 적자면 우선 항등원을 e라고 했을 때, 이때 a의 역원이 되려면 다음을 만족는 x입니다
a ○ x = e
          = x ○ e 더 엄격한 설명을 접어 놓겠습니다.



온 만큼 다시 돌아가는 것을 역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개별적이고 변동적이긴 하지만 이 역원을 통해서 하나의 원소가 항등원으로 돌아갈 수 있음으로 구조적으로 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어떤 미지의 것에 대한 물음, 특히 수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방정식에서의 해답(근)을 찾는 데에 있어서 역원의 활동은 독보적입니다.

이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간단히 예들 들면 제가 동전 5개를 계산하면 내었더니 주머니에 3개가 남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5개를 내어준 것의 역을 생각하며 결국 처음에는 8개의 동전이 주머니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쩜 항등원 보다 역원이 더 중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원이 존재하기 위해서의 가장 1번 조건은 항등원의 존재입니다.


10. 구조를 위한 마지막 기둥, '결합성'

닫힘성 위의 두개의 조건만으로도 우리는 아무 멋진 구조를 갖을 수 있다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곳이든지 존재감은 없지만 없으면 완전 불편한 어떤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완성된 구조란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쩜 우리가 당연시 사용하는 조건일지도 모르나 잊지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결합성이라는 것입니다.

결합성이란 것을 간단히 예를 들어 이야기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3+5)+7=3+(5+7) 처럼 덧셈이 있는 상황에서 결합의 순서를 달리한다고 해도 결과에는 영향이 없을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간단히 3+5+7이라고 쓸수도 있지요.

더 자세한 정의는 접어 놓겠습니다.

결합성의 가장 큰 힘은 다 같이 연산 할 수 있음 입니다.



사실 이 것을 보면 '이게 뭐?'란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사실 마음속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하나 중요한 사실을 기초로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연산이란 본래 함수입니다. 그것도 두개씩 짝지었을 때 하나의 값이 나오는 함수이지요. 간단히 이야기 하면 +이란 연산은 (1,2)란 것을 3으로 대응시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사실 1+2+3이라는 것은 3개를 한번에 함수로 보내는 것이므로 사실 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위의 구조, 즉 결합성이란 조건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앞의 두개를 미리계산하거나 뒤의 두개를 미리 계산해도 어짜피 하나의 값이 나오기 때문에 괄호를 생략할 수 있는 것이지요.

어쩜 큰 행동을 하지 않는 조건이지만, 구조속의 연산에게는 자유로움을 선사하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11. 다시 돌아와서 자연수란.

그렇게 세가지의 조건을 만족하게 된다면 수학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구조가 됩니다. 단적인 예로 다음이 성립해야지만 '2+x=5'같은 계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중요한 구조는 수학에서는 '군(group)'이라 합니다. 그럼 이제 원론적인 수학 이야기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구조를 완성시키기 위해 자연수로 돌아와 그 자신을 만들어준 창조적인 연산 더하기와 함께 생각해봅시다. 과연 자연수가 이런 구조들을 만족하는 좋은 구조를 갖는 공간인지 시험해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잘 쓰고 있는 수에대해서 평가를 내리는 일이지요.

좋은 구조는 더 다양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도출 시킵니다.



먼저 자연수는 결합성의 조건을 간단히 만족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3+5)+7과 3+(5+7)을 각각 계산하게 되면 성립함을 알 수 있죠. 사실 엄격하게 증명을 하는 것보다 머리속의 직관으로 생각하시는 것이 건강에 더 좋음을 말씀드립니다

다음으로 더하기에서 항등원과 역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간단히 머리속에서 1+e=1을 그려본다면 성립하는 e는 바로 0이라고 쉽게 계산됩니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네요. 바로 자연수에서는 0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절망적입니다. 자연수를 만들게 해준 '연산 더하기'는 그 연산의 가장 기본적인 항등원을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역원은 항등원, 즉 돌아갈 원점이 없기 때문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자연수는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수의 구조이긴 하나 구조라고 쓰기에도 민망할 정도록 가장 기본적인 더하기에서조차 구조를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수만으로 절대 만족하면 않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연수란 곳에 적당한 수를 추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수 가장 보편적이지만 더 만족스러운 구조를 위해서 다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수'는 일상에서의 필요에서 나왔습니다. 특히 어떤 것의 개수를 확인해야 할 필요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가장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자신이 기르는 양의 수를 확인하기 위해 작을 돌멩이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일정한 대체물을 이용하는 것으로 '수'의 가장 기초가 되는 행동으로 볼 수 있는데, 이 활동은 일대일 대응이라는 함수적인 활동입니다.


4. 자연수, 큰 수를 발견하다.

양 두 마리가 돌 두 개 그리고 손가락 두 개 등 함수적인 대응들이 갖는 대표성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대응의 공통점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구조를 탄생시키는 데 그것이 바로 '수'입니다. 그리고 그게 더 정돈된 것이 바로 "2"입니다. 개수에 따라 대표되는 상징을 나름의 규칙에 따라 정하게 되고, 그에 대한 표현은 1, 2, 3, .... 이나 Ⅰ, Ⅱ, Ⅲ, ...... 등 주변인들과의 약속으로 결정하여 쓰게 됩니다.

'자연수'의 탄생입니다.

일대일 대응에서 자연수가 탄생합니다.



이 상징적인 체계가 갖는 의미는 상당합니다. 드디어 '큰 수'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수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수의 범위는 상당히 작습니다.[각주:1] 사람의 개수에 대한 인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직관적인 수에 대한 관념은 평균 20정도뿐인 것입니다. 대응을 통해서 더 큰 수를 셈하긴 했지만 그를 위해서는 더 많은 돌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수를 이용한 셈은 그다지 큰 댓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학교에서 자신의 순번을 몇 개의 숫자, 학년과 반 그리고 반안에서의 번호로 총 4개의 수를 통해서 자신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휴대폰 전화번호에 우리가 부여하는 숫자는 010 - XXXX - XXXX 으로 총 11자리 숫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상대방에게 전화하기 위해서 적어도 10000000000개의 돌멩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자연수 덕분에 이 많은 돌을 들고다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5. 가장 자연스럽고 강한 <연산, 더하기>

우리가 큰 수를 사용한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추구할 수 있음을 야기합니다. 사실 실생활에서 그렇게 큰 수를 사용할 필요성은 없으나 이미 개념이 생겨버린 수의 체계는 그 자체에서 더 큰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바로 연산 입니다. 연산이란 것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 쌍의 수'가 갖을 수 있는 '잘 정의'되어 있는 규칙입니다.[각주:2] 꼭 의미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요. 규칙만 맞으면 그게 바로 연산입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시작이 있기에는 사람이란 것은 너무나 감성적이지요. 첫 번째 의미를 갖는 연산은 바로 '더하기, +' 입니다. 이 또한 어떤 실험이나 합의를 통해 얻어졌다가 보다는 본능적으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규칙은 너무나도 쓸모 있고 가장 흔히 쓰이는 '연산'이 되었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가족이란 개념으로 부터 시작해서 생산, 전쟁, 합의 등 더하기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 곳까지 오는 길에 비해서는 더하기란 너무 쉬운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산'이란 과정으로 보자면 좀 더 알아볼 구석이 많습니다.

더하기는 자연수의 근간 그 자체입니다.



자연수는 '더하기'는 기초로 합니다. 어쩌면 근간 그 자체입니다. 수학적 정의로 자연수란 '1'이란 수에 '1'을  더한 것을 '2', 또 '2'란 수에 '1'을 더한 것을 '3'이라고 정의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수에 대한 더 깊은 구성과정에서 '더하기'가 빠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더하기를 통해 자연수는 더 많은 쓰임을 얻게 되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더하기에 대한 연산을 (조금 어렵게) 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접기로 합니다.(굳이 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결론적으로 <연산, 더하기>를 장착한 자연수는 구조적으로 더 강해졌습니다.




6. 더하기의 아류 <연산, 곱하기>

자연수의 다음 친구는 연산, 곱하기 입니다. 자연수에서의 곱하기는 사실상 더하기의 아류입니다. 더하기의 반복을 축약해주는 것으로 컴퓨터로 보자면 간단히 단축키와 같은 역할이죠. 구구단으로 고생했던 기억이 있으신 분들은 의아할 것 입니다. 그렇게 수학에서 중요하게 여긴 구구단이 그냥 단축키를 익히기 위한 것이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적어도 자연수에서는 말입니다. 힘이 빠지는 일이겠지만 더하기의 셔틀 연산, 곱하기는 무도 박명수 처럼 쭈구리이며 2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갖는 강한 편리성은  놓칠 수 없죠. 또한 이 곱셈이 덧셈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자연수라는 기초적인 체계에서 안전하게 계산되며 큰 수의 사용이라는 장점을 더욱더 극대화 시켜줍니다.

아류이지만 적어도 그 역활이 있습니다.



이로써 자연수는 더하기와 곱하기라는 두 가지 연산을 구조로 같으면서 자신의 체계를 굳혀갑니다. 사실 이로써도 삶에서 크게 불편함을 못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만 있는 한 존재가 있겠죠. 곱하기 입니다. 하지만 이 곱하기의 반전은 잠시동안은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7. 구조를 만드는 힘 : <성질, 닫힘성(closed)>

아이폰과 아이패드 그리고 맥 등 모바일 및 IT분야에서 지지 않는 태양이 되고 있는 애플의 가장 큰 장점 및 가장 큰 단점이 무엇이라 생각되십니까? 아마도 이 둘은 같은 단어 하나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바로 '닫힘성'입니다. 아이튠즈라는 허브를 통해서 애플의 모든 것들이 소통하지만 그 소통은 애플에 한하게 됩니다. 이는 안정적인 체계구축이라는 장점을 부여하지만 너무 닫혀있다는 단점도 됩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았을 때는 개방체제보다 더 안정적으로 구축되는 '구조'임은 틀림없습니다.

애플이 폐쇄적이면서도 사람들을 더 열광시키는 것은 닫혀있지만 '강한 구조' 때문입니다.



preview 에서 강조했다시피 '수'란 것에서 결국 '구조'를 찾아보는 것이 진정한 '수'를 찾는 일입니다. 자연수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연수란 수를 일상에서 얻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자연수에서 "어떤 구조가 이 체계를 지탱해 주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언급했던 <연산, 더하기>와 <연산, 곱하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더하기와 곱하기를 시행하는데 있어서 자연수란 공간이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이 두 연산이 자연수 안에서 온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수란 공간에 더하기와 곱하기가 잘 담긴다는 말입니다. 이런 구조를 수학에서는 '닫힘성(closed)'이라 합니다. 이는 간단히 말하자면 연산을 아무래 해도 그 공간을 벗어나지 못함을 이야기합니다.

닫힘성은 구조를 만드는 힘입니다.



자연수끼리 덧셈을 아무리해도 곱셈을 아무리 계산에 시간이 걸릴 뿐이지 이 계산의 결과가 자연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자연수를 더 완벽하게 합니다. 이 구조가 실재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크게 강조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히 설명됩니다.

조직에서 '반역자'를 좋아하는 규정은 없습니다.

이는 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수학에서 반역이 없어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어떤 구조든 불완전한 요소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이 그 조직의 완전함을 추구하는데 있어 더없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중요한 명제입니다. 본래의 구조만을 맹신하는 것은 발전이 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먼저 좀 더 완벽한 구조란 무엇인지 살펴본 다음, 이 자연수에 반역해 보겠습니다.

  1. 동물의 수에 대한 인지 능력 - 링크 : http://holicmath.tistory.com/22 [본문으로]
  2. 이 것을 어렵게(?) 설명하자면 동일 집합의 두 개의 원소를 묶어서 다른 것에 대응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우리는 언제나 수를 사용합니다. 실제로 어떤 교과서는 "수가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할까요?"를 주제로 수를 제외 한 일화들을 책의 한켠에 배치해서 수학을 배워야 한다는 뭐 좀 극단적인 의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수를 통해 수학을 배워야 한다.'에는 동의합니다만, 그를 제거하면 불편하니까 필요하다는 논리에는 살짝 불쾌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수를 먼저 배우고 나중에 사용한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모든 수학책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기본. '수'를 이야기해보면 그렇습니다.


1. '수'의 어머니는 '수학'일까?

그러기에 우리는 '수'란 것이 어느 곳에서 먼저 정의 되는지 알아 봐야 합니다. 네이버 사전을 인용하자면 '수'란 셀 수 있는 사물을 세어서 나타낸 것이며 두 번째 정의는 자연수, 정수, 유리수, 실수 따위를 통틀어 말한다고 나옵니다. 저는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나오는 한 마디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좁은 뜻으로는 자연수를 가리킨다.'

좁은 뜻으로 자연수를 가리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 유추할 것은 '수'란 것은 본디 수학적으로 정의된 것이 아니라 먼저 실생활에서 태어난 것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태생은 결국 일상 속의 자연수란 모습 이였다는 것이죠. 자연수라는 말은 딱 그 단어를 나누어 생각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자연스럽게 생성된 수'입니다.

사실 자연수를 정의한 페아노 공리는 이미 쓰임과 성질이 모두 정리된 상태에서 실행된 것입니다. 즉, 이미 있는 것에 대해서 정확히 그리고 전문적으로 정의한 것이죠.[각주:1] 다시 말하자면 자연수는 수 체계에 대한 어떤한 교육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물건과 물건 혹은 물건과 상징(손가락 혹은 셈하는 단위)에 일대일 대응[각주:2]으로 자연스레 쓰기 시작한 것이며 이 것이 여러 수 표현체계(로마자, 아라비아자, 한자등)를 거친 후에 정의 된 것이죠.

숫자는 단지 수의 표현 수단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단어 '수'는 본디 수학보다는 그냥 일상용어란 결론이 나옵니다. '공기'나 '운동'과 같은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기는 화학적인 부합물이기 전에 우리가 마시는 것이며, 운동은 우리가 물리적 역학이기 전에 걷고 뛰는 생활인 것입니다. 수도 마찬가지 입니다. 엄격한 '수'[각주:3]란 것은 수학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수'가 필요하니 '수학'을 하라는 것은 신에게 '피조물'이 필요하니 '공예'를 배우라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참 '예의 없는' 수학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수'에 대해 바른 입장으로 서보자면, "수학에서 '수'가 필요하니 일상을 더 참고하겠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여야 할 것 입니다.

'수'가 삶에서 필요하니 수학을 해야 한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일단 '수'가 일상에서 벗어나고 '수학'에 편입하고 나서는 의미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수학의 많은 논리성에 대한 하나의 위대한 '예시'가 되었습니다. 이만큼 정확하고 확실한 예시가 없지요. 그 후 수와 수 사이의 많고 많은 규칙들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 또 어떤 규칙을 찾아내는 반복적인 역사가 거듭될수록 '수'는 독립적인 수학의 분야로  진입합니다. 그 분야가 바로 대수학(algbra) 분야이지요.[각주:4]


2. '수'는 사라지고 '구조'만 남았더라.

이 대수학은 - 특히 추상대수학은 - 수의 체계로 부터 시작합니다. 맨 처음에 언급한 자연수부터 시작하여 정수, 유리수, 실수를 거쳐 복소수 그리고 해밀턴 4원수체 등 여러 수를 거치면서 구조를 만들어 간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덧셈이 가능하고 곱셈에서 닫혀있는 수의 체계가 바로 대표적인 자연수의 구조이죠.

수를 근간으로 한 대수학에서는 수는 사라지고 그 뼈대만 남아 버립니다. 하지만 그 뼈대가 이제 '수'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우리는 이제 구조만으로도 대수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1'이란 숫자는 자연수의 '1'이라기보다는 자연수와 같은 구조를 같은 구조를 갖은 원소의 대표적인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설명이 난해 한가요? 수학 외적인 예를 들자면 반복적으로 이미지가 찍어내어지는 앤디 워홀의 그림을 보면 수 많은 마를린 먼로의 그림에서 이미 먼로는 사라지고 '복제'라는 구조만 남는 것과 같습니다.

마를린 먼로는 사라지고 복제만 남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무료한 시간을 잡아내기 위해서 TV리모컨을 찾습니다. 이리저리 찾아 해메다 주방에서 발견되곤 했죠. 문득 TV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고 뇌 속의 해마가 이제 다 죽어간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걱정에 TV리모콘을 내려 놓고 고민하다. 다시 TV 앞으로 가서 리모컨을 찾지요. '수'와 '수학'도 이와 유사합니다.

그럼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3. '구조'는 중요할까?

그럼 대수학이 구조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면이 수학을 '수'에서 '구조'로 이동하게 하는 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구조'가 구조에서 끝이 난다면 의미 없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적어도 자신의 뇌의 해마가 죽어가는 것이 TV를 시청하는 일보다 중요합니다.

구조는 우선 대표성입니다. 하나의 구조가 정의되면 그에 따라 오는 모든 정리(성질)들이 같은 구조의 모든 것들에 적용이 됩니다. 따라서 수많은 개별적인 것을 구조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아주 미세한 예를 들자면 짝수의 모임과 정수는 같은 구조 입니다. 한쪽에 대해서만 완성되어 있다면 그 반대편에 대해서 다시 알아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공식'같은 존재이죠.

또한 '구조'를 연구하다 보면 새로운 '구조'의 발견이 보입니다. 결핍되는 구조를 채우기 위해 새롭고 더 강한 체계를 구축함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그 해결을 통해서 점점 완벽함을 모색하게 됩니다. 아마도 수에 대한 글 말미에는 조금이나마 완벽한 구조로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구조의 면으로 수를 써내려 가면 더 완벽함을 발견할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고 했지만 '구조'는 하나를 알면 같은 구조 전부를 알게 됩니다. 이러니 어찌 수학이 구조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1. 이에 대해 좀 더 전문적이고 자세한 설명은 다른 글의 링크로 대신하겠습니다. http://holicmath.tistory.com/41 [본문으로]
  2. 일대일 대응의 정의 : http://holicmath.tistory.com/13 [본문으로]
  3. 좁은 의미의 수 [본문으로]
  4. 보통 대수학이라고 하면 방정식의 계산만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 대수학은 정수론 선형대수 추상대수 등 수의 체계로 시작되는 모든 분야를 포함하는 학문입니다. [본문으로]

 휴직 교사에서 복직 교사로 지내다 보니 어느새 블로그에 손을 놓은 지 몇 달이 되었다. 사실 살짝 불안감이 드는 이유는 뭘까? 왠지 3월의 다짐 4월의 포기를 반복하는 나의 학창 시절의 반영을 그대로 실현하는 건 아닌지. 분명 내가 손때를 묻힌 수학책의 대부분은 집합과 명제였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반복적인 포기에 반항하기 위해 3월의 학교 폭풍 속에 조용히 키보드 질을 시작해본다.

 
1.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전 글에서 완벽한 진리를 말하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요상한 진실에 직면했다. 만약 진리란 것을 유토피아에 비유해보자면,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는 적어도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닌 무언가 존재해야 한다. 어떤 유토피아 속의 자신을 상상하든, 꿈에 부푼 자신을 떠받들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종(혹은 하인 혹은 도우미)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게 우리는 완벽함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덜 완벽함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언제나 진리의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수학에서 그 희생양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그 문제는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공리로 도망치는 일이다. 공리를 세우고 그 위에 수학을 한층 쌓아가는 일. 그 공리만 인정된다면 완벽한 논리를 향할 기분 좋은 진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은 저번 글 막바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연역적 명제는 전체의 축소만을 가져온다.[각주:1] 즉 말만 다를 뿐 우리가 원래 인정했던 것을 다시 확인하는 식이다. 명제를 확장하겠다고 공리‘만’을 확장한다면 그것은 점집에서 점술가가 던진 한마디를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각주:2]

연역적 진실은 작아질 수 밖에 없다.



 "히키코모리"라 불리는 자들에 대해서 혹시 들어보았는가? 우리나라 말로는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며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방에 갇혀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사실 연역적인 사고로만 명제를 키워간다면 그 끝은 히키코모리랑 유사 할 것이다. 자신만의 방에서 자신만의 만족을 갖고 사는. 수학도 마찬가지 이다. 연역만을 강조하는 진리는 결국에는 어느 부분에서 종점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다. 혹은 그 극한[각주:3]이 수렴한다 하더라도, 그 크기는 우리가 이미 정해놓은 대명제(맨 처음 명제)를 벗어날 수 없다. 결국 히키코모리와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기에 진리를 찾는 사고 방향을 더 키워야하는 것이다.

히키코모리들은 결국 자신의 틀에 갖히게 된 것이다. 진리도 이럴 수 있다.




2. 약한 진리에 대하여.

 이와 비슷한 논쟁을 과학에서 가져와 보고 싶다. 바로 아인슈타인과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이다. 이 둘은 양자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예측 가능한 양자역학을, 보어는 코펜하겐 해석[각주:4]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양자역학 모델을 선보였다. 이 와중 유명해진 아인슈타인의 말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란 명언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해석과 사고 실험[각주:5]들을 통하면서 명언은 지금까지 남았지만 아쉽게도 보어의 모델이 진리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즉, “예측 불가능”유일한 예측 가능한 변수인 것이다.

 이를 수학에서 다시 보자면 이제 우리는 ‘예측 가능한 진리’이란 편견에서 잠시 물러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덜' 진실하지만 '충분히' 진실하다고 말할 것들은 무엇일까?  또한 우리는 그것을 어찌 성립하는지 확신하는 것일까? 그 고민에 집합에서 잠시 다루었던 하나의 개념을 다시 들어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들어온 것은 그것은 바로 바로 퍼지집합이다.

양자의 예측 불가능을 수학에 적용해 보자.



 퍼지집합이란 어느 집합에 속하는 정도를 확률적인 시각으로 표시 한 것으로 0과 1이라는 선택을 (참고로 0은 절대적인 거짓, 1은 절대적 참을 의미한다.)  0<=x<=1이라는 것으로 확장시킨 모델이다. 자세한 설명은 링크로 대신한다. (이전 글 링크)

 '포함된다(=1), 포함되지 않는다.(=0)'란 선택에서 좀 더 확장된 기회를 제공한다면 우리가 편협했던 명제 관계를 좀 더 넓힐 수 있겠다. 즉, 포함관계라는 인과관계에서 다 이루지 못하는 진리를 이루는 하나의 가능성 약한 포함관계인 퍼지집합을 통해서 명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퍼지 논리에 대해서 나는 대학교 이상의 수준을 기록하려고 하진 않을 예정이다. 나도 그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펼칠 능력자는 아닐 뿐더러 오해의 소지를 더 만들 가능성이 있기에 기본적인 내용은 위키 링크로 대신한다.(그 내용은 위의 퍼지집합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판단하는 명제를 보어의 양자역학과 비슷한 확률적인 개념으로 접근하여 이전에 판단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수량화하고 논리화 하여 그 체계를 구성하는 일이다. 즉, 생각하면 다 이루어지는 100% 완벽한 유토피아는 어려우니 내가 조금 귀찮더라도 걷거나 말하거나 하는 99%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다.

진정한 유토피아에는 불완전함이 섞일 수 밖에 없다.



3. 퍼지 논리가 가리키는 진리는?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논할 중요한 한 가지가 아직 남았다.  '수량화된 진리'가 갖는 의미이다.  이 부분에서 오해할 여지를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오해의 가장 큰 정점은 바로 ‘진리의 줄 세우기’가 가능한지의 여부이다.

 만약 '0.99 진리'와 '0.01 진리' 사이에서 우리가 '0.99 진리'이 더 무거운 진리일지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단정한다면 이 이야기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예수도 석가도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이론들을 퍼지 논리 점수를 통해 '수량화'한다면 아주 후하게 주어도 '0.01 진리 주의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진실한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 이런 나의 말에 동의 할 것인가? 사실 이 사실은 나도 동의하기가 어렵다.

 더 자세한 예를 들자면 어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퍼지 논리 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점수는 몇 점일까? 하지만 모두가 그 말에 감동하지 않는가. 이런 모순의 원인은 '수량화'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수량화’가 그 명제를 진실 되게 만들 수 있을까? (사실 여의도 기독교는 그럴 수도 있다. 0.99 진실의 법칙으로 일본은 분명 쓰나미를 원수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 했으니.[각주:6]) 하지만 일반적인 기본 교육을 통한 사람이라면 예수의 '0.01' 진실에 손을 들어줄 것이다.

 다시 말해 '수량화'는 '의미'를 대표하진 않는다.

이런 수량화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은 완전한 넌센스다.




4. 수량화에 빠진 진리 구하기

 그렇다고 지금까지 수고했던 수량화된 진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결론짓는다면 그 또한 극단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렇다면 '수량화된 진실'이란 것에 다시 의미부여를 해봐야 한다. 이런 의미부여는 우리가 '수량화'를 선택했던 수단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 수단은 바로 '확률적'과 구별[각주:7]된다. 다시 말해서 0.51은 0.49이라 할 때, 우리가 좀 더 쉽게 이야기 하는 51%가 49%보다 2% 더 진실이 될 확률이 있다.”란 것이 아니라 2% 정도 더 보편적인 선택을 받는”진실이란 말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명제는 참/거짓에서 한 단계 더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51%와 49% 양립할 수 없는 명제라 할지라도 진리로 동시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0.01 진실'이란 것은 우리가 1%의 확률 빈도로 선택한다는 것.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독배’와 예수의 ‘원수 사랑하기’는 참으로 소수만이 선택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들을 성인이라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리 확률적으로 이를 정의해 보려 해도 ‘수량화’가 진실이라는 벽을 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다. 이런 면에서는 왠지 데카르트적인 절대적인 진실은 사라지고 푸코가 말하는 특정 법칙이나 관계에 의한 진실[각주:8]이 수학의 표면으로 자리 잡는 듯하다.

완벽한 형태가 아닌 관계가 말해주는 진리



5. 진실이란. 명제 파트를 마치며

 집합을 거쳐 명제에 대한 글을 써보면 진실이라는 것의 이중성이 보인다. 분명 어떤 흐름을 보여야하지만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이라는 것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진실이란 것은 어떤 절대적인 흐름을 바라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포함과 불 포함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부터 시작해서 집합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명제를 이야기 했다. 그들 사이에는 정확한 연결고리를 통해서 내가 알고 싶은 결과를 배출해낸다. 이런 고리를 절대로 끊을 수 없게 단단히 묶어 진실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연역을 통해서 보았다. 하지만 연역의 결정적인 문제는 고리는 온전하다 그 고리의 시작이 어딘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떤 '진실'이라는 것의 심각한 오류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발 물러나, 절대성을 버리기로 한다. 즉 상대성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인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여 '진실'이란 것을 '아무것도 아닌'것과 동일시하는 것 또한 피하도록 하자. 자신이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또 어떤 다른 것이든 지적 생물체(인간)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버리면 '진실'이란 호칭을 부여하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생겨버린다. 수치화된 점은 그저 그 명제의 빈도 혹은 확률로 제한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하려니 '진실'을 정의하는 일은 점차 미궁으로 빠질 수 밖에.

 그렇다면 진실이 피해야 할 그 곳은 어디일까? 자만하고 고집스럽지도 않으면서 적절히 의미화가 되는 그곳은 어디일까?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는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젠 '수치적 진실'이나 논리적 진실' 따위는 수학에서 찾을 수 는 없을 듯하다.[footnote][/footnote]

 하지만 수학 외적인 곳에서는 어느 정도 해답이 있지 않을 까 한다. 우리가 부르는 '공감'같은 단어에서 말이다. 하지만 '공감'만으로는 우리의 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실수를 포함해서는 안 되니, 나는 '조심스런 공감'정도로 마무리 짓고 싶다.
 

'조심스러운 공감'을 갖던 지난 날을 위해서~



  1. 그림과 같이 집합론 적으로 생각했을 때 명제의 진행에 따른 진리의 축소는 피할 수 없다. [본문으로]
  2. 그렇다고 해서 공리를 기반으로 한 수학이 의미 없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시 한다. [본문으로]
  3. 그 극한이 수렴하지 않고 진동 발산한다 하여도 결과는 변화지 않는다. [본문으로]
  4. 훌륭한 네이버 캐스트를 링크한다. 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1961 [본문으로]
  5. 어떤 실험을 제시하더라도 측정이나 도구의 불완전성에 의해서 보어의 승리가 확정될 수 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6. 여의도 기독교에 대해서 욕할 생각은 없으니 이번 발언은 분명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 [본문으로]
  7. 의미상의 구별이다. 일단 퍼지 집합을 구하는 과정에서 확률은 빠질 수가 없다. [본문으로]
  8. 그가 말하는 상대적인 진리를 어쩜 보어의 양자이론 혹은 퍼지 논리의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볼 수 있다. [본문으로]


진실게임 "진실만 말해라"


잠시동안 다분히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자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승에서의 생을 다하고 저승의 문턱에서 당심을 심판할 야수와 마주하고 있다고 하는데

나에게 영생과 영벌의 구별이 너무 어려워서 당신에게 기회를 주려합니다.




그 기회란 단 한번의 말로 완벽한 진실을 말하는 것 입니다.



당신을 원하는 야수가 진리에 굶주린 침을 흘리며 노려보고 있는 이 순간

자칫 이들에게 거짓을 고백하다 걸리게 되면 가차없이 돌이킬수 없는 곳으로 가게되는 상황이라면 

당신의 실수를 바라는 이 야수들에게 어떻게 진실을 이야기 할까요?


다시 말해 어떤 100% 진실을 이야기 할 것인가요?


이집트 신화의 명부의 신 오시리스. 심판의 시기에서 당신의 진실은?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실생활에서 아주 어렵다. 맘에 들지 않는 상사가 술자리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솔찍하게 말해달라고 한다하여 그 진실을 말하기는 너무 어려운 세상아닐까요?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혹은 우리의 말로써 진실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존재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당나귀귀를 외칠" 숲을 준다하더라도

정말 그 이야기가 진실일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럼 다시 돌아와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게 100% 진실임을 어찌 증명할 것일까요?


계속 되는 질문이 어지럽지만 이제 진실게임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


 참과 거짓이라는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명제를 도입했다.(이전링크) 보통 명제의 구조를 보자면



'(____ 1 ____)이면 (____ 2 ____)이다.'


란 꼴로 나옵니다.



이것을 풀어말하자면

"(1)이 참이라고 '가정'했을때, 과연 (2)가 참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1)번 자리를 가정, (2)번 자리를 결론이라 하고

그리고 간편하게(1) => (2) 라고 표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을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 이 구조로 환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명제도 일단 구조로 환원할 수 있다. 문제는 증명이다.


이처럼 어떤 것의 진실을 이야기 할때 가정과 결론이라는 도구로 말하면 대부분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죠.

이렇게 말할 수 있어도 이것이 진실인것을 '증명'해 내야 하는 것 입이다.

그런데 이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예를들어, <그자식 진짜 개념 없다.>라고 한다면 'x=그 자식 => x는 개념없다.' 라고 고쳐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완벽하게 참이나 거짓이로 구별하기 어려운데, 위 예에서는 '개념 없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명제의 개념 - 링크)

그러니 당신이 진실이라고 이야기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만약 당신이 야수 앞에서 자신의 영원을 걸고 진실을 이야기 해야 한다면? 함부로 말하지 못할 진실입니다.


 그렇담 우리가 무엇이든 진실처럼 이야기 하더라도 그게 진실인지 증명할 수 없는 것일까요?



진실에서 100%진실을 뽑아내는 법


 아직 실망할 단계는 아닙니다. 진실이 뭔지 정확하게 말하고 싶을때, 혹은 어떤 상황에서 완벽한 진실을 말하고 싶을 때에 쓰는 방법들을 연역법이라 합니다.




연역법이란 : 이미 증명된 하나 또는 둘 이상의 명제를 전제로 하여 새로운 명제를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연역(演繹, deduction)이라하며, 이러한 연역적 추리의 방법과 절차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을 연역법이라 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백과사전은 조금 어려운 말로 써야 기분이 풀리나 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미 진실이라는 몇가지를 기초로 새로운 진실을 만드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단,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게 진행해서 진실을 뽑아 내야 하는데, 이 연역법의 방법이 한가지는 아닙니다.

위키 링크가 있으니 한번 구경하고 오셔도 좋습니다.(연역 링크)

그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삼단논법인데, 다시 위키를 링크하지만 아래쪽은 보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삼단논법 위키링크)

삼단논법을 이용한 여러 논리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게 딱 이거 하나로 모아집니다.


바로 부분집합입니다.


A ⊂ B이라고 해보면,

A의 모든 것들은 결국 B에 들어갑니다. 이때, 이런 명제를 만들면 참이 되는 것입니다.

[A라면 B이다.]란 것은 참이 되는 것이죠. 삼단논법은 이를 뿌리로 합니다.


삼단논법의 가장 흔한 예를 들어보면


모든 동물은 죽는다. 

쥐집단은 동물이다.

쥐집단은 죽는다


그림을 보면 그저 위의 이야기는 수학적으로 부분집합 이야기가 되는 것 입니다.


쥐의 집합 ⊂ 동물의 집합  ⊂ 죽는 것의 집합


포함관계를 이용해서 완벽한 참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죽는 다고 말하기엔 너무 슬프다.)

 그러니 당연하게

쥐집단 죽는 것의 집합이 되는데,

그 렇다는 것은 모든 새밝은 쥐집단은 죽는 것의 집합의 표함이란 뜻이므로, 결국 쥐집단은 죽는다란 결론과 같습니다. 이처럼 삼단논법의 기본방법은 우리가 집합에서 가장 편하게 썼던 부분집합의 다른 해석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이 죽고 쥐집단이 동물이라는 두가지 진실에서 새로운 진실, '쥐집단이 죽는다.'를 얻어낸것이다.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가정을 공집합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공집합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어서 어디에가도 부분집합이 됩니다.


다시말하기 위해 아래를 보면

[ø인 것은 모두 A이다]라고 해보자. 당연히 ø ⊂ A이므로 참이됩니다.



이제 진실인가?.... 진리의 합의?


 이제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 하는 법을 배웠기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을 하늘의 나라 앞의 야수에게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가장 좋은 진실 하나가 있다면 멋드러지게 그 부분집합 이용해서 진실을 말하고 즐거운 발걸음을 하려는데,


문제가 하나 생겨버립니다.

바로

불완전성의 원리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 클릭)입니다.

요약하면


정말 진실이라도, 아니 진실 같아도 그것이 완벽하게 증명될 수 없다.



앞의 남자가 뒤에 손가락을 꼬은 이유는?



 이게 무슨 날벼락일까요.

어떤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그 근본은 결국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런 것입니다.

부분집합을 설명하고 죽음을 설명하고 쥐가 죽는다는 것을 설명해도 결국엔 이상한 개념의 벽에 막히고

결국에는 잘 모른다는 0.1%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진실이 100% 증명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말 동물은 다 죽는 것인가? 하는 것 부터가 문제입니다.)


결국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서있고, 야수는 미소를 짓겠죠.


그렇습니다. 사실 어떤 것도 절대적이진 못하지만, 절대적인 위치를 갖어야하는 것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실에 합의를 합니다. (그것을 공리라고 한다.) 그 합의점이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물음표에서 벗어납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인정하는 논리의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진리는 기초적으로 합의입니다.

죽음을 이야기 할 때, 이전에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음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단지 내가 나로써 합의한 공리인 것이죠.

나와 나의 생각의 공동체는 살아있음을 합의하고 내 존재가 죽음에 이른다는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의 없는 진실이 없습니다.



축구 경기도 하나의 합의로 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 다른 약점이 있다면, 진리를 더이상 넓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분집합, 즉 연역으로 만들어낸 진실은 이미 합의 된 진실에 이미 일부였다는 것이죠.

결국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다.


결국엔 지금까지의 노력이란 것은 결국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을 다시 써 놓은 것 뿐이라는 것이거나, 가정을 공집합을 두어서 별 쓸데도 없는 진실만 퍼부은 것입니다.


당신이 고민한다 하여도 결국엔 아무것도 해놓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일단 진실의 생성보다 축복의 길로 가는 것이 중요하니, 다시 야수의 앞에 돌아와보면,

마른 침이 계속 넘어가는 상황에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이제 축복의 길로만 들어서면 된다면 아직 끝은 아닙니다.


" 진실이 존재한다면 당신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럼 이제 상황은 되바뀌게 됩니다. 야수는 진실을 판단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어떤 진실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야수는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 증명은 결국 나의 고민(불완전성)에 다가섭니다.


만약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진실이란 집합이 공집합이 되므로 결국엔 이 명제는 참이 되죠. 그러므로 나는 축복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포기 하지 마라.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없어도 과정으로 이룰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고집스런 진실은 결국은 거짓입니다.

이 때문에 고집스런 진실과 이별할 필요가 있다. 대신 공리와 합의 안의 독립적인 진실과 살면 되는 것 입니다.

이제는 독립적인 진실로 이해해야..


 진실을 말하는 명제가 중요한 부분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연역이든 삼단논법이든 진실을 말하기 위한 이 구조를 만드는 것, 이 구조로 우리가 올바른 사고의 과정을 거치는 것, 이것이 딱딱하게 느끼는 명제의 무른 속 같습니다.


허술해보이지만 한번 맛보면 논리가 완성되는 것 자체가 맛나는 일이죠.


 수학도 마찮가지입니다. 마치 삶처럼!


하지만 줄어드는 지식에만 몰두할순 없죠. 그러기에 다음에는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높은 진실을 발견하는 방법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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