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쩜 후광효과부터 피그말리온 효과는 예언을 바라는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선택을 꿈꾸는 이 글의 목적을 되새겨 보면 이 본능에 대해서 더 살펴보면 어느정도 자율적인 선택을 꿈꾸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희망적 생각[각주:1]을 첨부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얼마나 예언에 밀접해 있을지가 가장 먼저드는 고민입니다. 삶의 모든 시간에 대한 것은 이미 오랜시간 혹은 그 전에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바랍니다. 지금 이 의문과 넋두리는 종교적인 어떤 부분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선택이 예언에 종속되는 기본적인 매커니즘이 중요합니다.

즉 종교적 의미의 예언보다는 지금 우리에게 끼치고 있는 비종교적 예언과 선택의 매커니즘에 집중 되어야 합니다.


11. 예언을 원하는 기본적인 본능, 뇌바보

먼저 우리가 예언을 원하는 기초적인 본능은 어디서 나올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정말 그 기초를 잡았다면 저는 지금 스위스에서 상 받을 준비를 하고 있겠죠? 최근에 우연히 어떤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제가 보는 신문은 아닙니다만 SNS의 힘으로 접하게 된 것이요. 바로 '뇌바보'입니다.[각주:2]

이 '뇌바보'는 말 그대로 뇌가 바보라는 것에 대한 것으로 이에 대한 언급은 간단한 행동으로 설명 합니다. 이 글의 저자가 강연할 시에 한 학생을 일으켜 세워놓고 이런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라고 공지 한 뒤에 "당신은 능력이 있으며~"라고 말합니다. 즉 거짓말이라고 하고 나서 세상의 온갖 칭찬을 다하는 거죠. 결론은요? 아시겠지만 거짓말을 들은 그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 더 정확히 말해서 뇌가 기분 좋아 집니다. 개인적으로 이 사실을 접한 저는 너무나 신기해 보였습니다. 바보처럼 말입니다.


뭐 그냥.. 뭐... (출처 : 뉴스뱅크이미지)


그리고 이어지는 근거 실험에 대한 설명은 더욱더 흥미를 끌었습니다. 실험은 1995년의 실행된 실험으로 뉴욕대학에서 실시된 심리학 실험입니다. 7.5m의 통로를 지나가는 실험인데, 젊은이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결론은 평균 7.3초. 이 실험은 심리학 실험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통로를 걷기 전에 노인에 대한 문제를 풀었고 통로를 지난 시간은 앞 선 집단의 평균보다 1초 이상 웃돌았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은 두 집단이 있는데 한 집단에게는(줄여서 무례집단) '무례하다. 침입하다.  공격적이다' 같은 단어를 한 집단에게는(줄여서 예의집단) '예의바르다. 정숙하다. 양보하다.'의 단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다음 실험을 받게 한다며 다른 장소로 이동시킵니다. 실험은 여기서 시작되는데, 앞 선 두 사람이 이런 저런 문답을 계속 이어나가고 피실험자는 그들을 기다립니다. 결론이 예측되시죠? 무례집단은 5분 정도 안에 끼어들어 대화를 시도하고 예의집단은 10분 이상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뇌는 정보에 무기력한 바보입니다.



'노인이란 단어', '무례한 단어', '예의바른 단어'가 대체 무슨 일을 꾸민 것일까요? 그것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몇 개의 단어가 뇌에게 직접적인 반응을 유도하게된 것입니다. 네. 본능적으로 받아들인 예언입니다. 우리의 뇌는 이미 그냥 지나가는 몇 개의 단어에 사로잡혔습니다.


12. 바보가 하는 선택? - 뇌바보와 사이비 종교

바보인 뇌는 몇 개의 정보를 실재적인 자신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성격 마저 지나가는 몇개의 흘러가는 정보를 통해 형성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는 교육적 의미로 엄청난 현실입니다.[각주:3] 우리가 주변의 상황에 오류를 범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우리 자체가 상황, 혹은 작은 예언들을 따를 수 밖에 없는 본능이란 것입니다.

최근의 시사 고발 TV에 한 수련원을 보게 되면 이런 본능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종교적 행사중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는 데 이 고백이 정말 판타스틱합니다. '수련원의 돈 3억을 횡령했다.'부터 시작해서 '도둑질을 했다.', '원장을 살해하려 했다.' 등[각주:4]의 말은 반복적으로 듣고 반복적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결론은 예상하는 그대로 입니다.

H수련원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들은 그 3억을 갚기 위해서 수련원에 돈을 내고 기부를 하며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충성합니다.

그들이 과연 멍청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또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종교인은 집단 최면과 흥분 상태를 이용한 것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메시아의 통로라는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 뒷면에서는 수많은 성적 도착증을 보인 이야기도 나옵니다. 당했던 사람들을 모아보면 극히 정상적이고 혹은 더 존경을 받는 위치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있다면 절대로 이 교주같은 목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실재로 녹회된 영상에는
아방가르드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비상식적 결과를 도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상식 그 이상입니다. - '그것이 알고싶다' 스틸컷



사람은 들어오는 정보가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더라도 그 안에 '정보[각주:5]에 대한 믿음'이라면 어떤 논리적 설명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쩜 뇌바보에서 부터 나오는 인간의 수동적 선택의 본능일 것입니다. 이런 본능의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택에 대해서 수동적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에게 '자유러운 선택'이란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13. 예언과 선택

선택을 사로잡기 위해서 예언을 언급했습니다.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우리가 선택을 하는 일에 대한 것을 약간 이나만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예언을 언급할 것 입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어쩌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반(反)자유'이고 나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일 수 도 있습니다. 이에 비관적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어 라고 말 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제가 '선택'을 계속 궁지에 밀어 넣은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근거가 없는 의미 있는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의미 있는' 선택이란 단어의 정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린 올바른 선택을 하기에 앞서 올바른 근거를 찾아야 하고, 그 올바른 근거를 찾기 위해 예언을 찾았습니다. 꼭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내용이 아니라도 예언은 개인에게 존재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예언의 기원을 찾다보면 분명 선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것입니다.



물론 언급한 '예언'은 사전적 단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포괄적인 것입니다. 어떤 선택과 판단의 근거가 되는 그 이전에 선택된 것으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선택에 강요되는 부분을 지칭하는 단어로 썼습니다. 이런 예언이 없이 우리가 판단할 구석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홀로했다고'믿는' 선택보다는 그 근거 다시 말해서 선택 이면의 예언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뇌바보에서 보는 것 처럼 '예언'이 근사하고 화려하게 생겨나고 방대한 정보의 것만이 아니라 단지 나도 모르게 스쳐지나가는 혹은 집중하지 않았던 어떤 것들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엑스칼리버 처럼 몇 백년을 이어나가는 예언도 분명 존재하나 오늘 아침에 나온 아침 식사 또한 예언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침식사의 짧읜 메뉴가 당신에게 예언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조금더 예언을 자세히 그리고 조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그 예언은 어디서 오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을 다음 글에 해볼 고민으로 남기겠습니다.

  1. 혹은 예언 [본문으로]
  2. 중앙일보 - http://bit.ly/ohDVrY [본문으로]
  3. 교육적인 면은 다른 주제로 다룰 예정입니다. [본문으로]
  4. 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19금이라 생략합니다. [본문으로]
  5. 그들에게 주어진 특정 예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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