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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글을 통해 “독립적으로 선택”을 찾기 위해 많은 실험들을 반례로 들면서 예언과 선택의 서로의 상관관계를 파악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하는 선택에서 기본적으로 예언이 갖는 위치는 상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의 삶에 종속되지 않듯이 선택이 예언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영향력이 클 뿐이고 예언의 힘이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혹은 본능)의 영역에서도 작용하기 때문에 여러 실험으로 마주하는 결과가 예언에 힘을 실리는 것이죠.

  이제는 반대로 나가려고 합니다. 나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는 예언의 성립하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신에서 찾을 생각은 없습니다. 신을 근거로 들기에는 전 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그리고 하나의 교실 안에서 조차 어느 누구도 반론하지 않는 신을 증명하기에는 제가 누구말대로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확실히 말하지만 지금부터 언급되는 ‘예언’은 좁은 의미의 종교적 색체가 강한 것이 아닌 행동을 만드는 기저 상황인 넓은 의미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14. 예언의 성립 조건 - 합리성

  예언의 조건은 여러 면에서 추측이 가능합니다. 가장 먼저 예언은 ‘과정의 합리성’이 있어야 합니다. 일부 예언은 합리적인 면이 상실되면 그것은 예언으로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 신화나 혹은 우리의 우화들 그리고 성경들을 예로 들자면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조건이 없을 수 있겠지만 번개를 다스리는 ‘제우스’가 있고, 말하는 ‘미운 오리’가 있고, 또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 인과관계는 달라지지만 그 과정의 합리성은 완성됩니다. 만약 합리성 없는 예언이라면 그것은 그저 주어가 없으니 사실이 아니라는 변명 같은 일이겠지요.

아무리 신화적인 이야기도 그 안에 합리성을 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말하는 미운 오리’가 있다면 태생적인 문제가 있는 자신에 대해서 통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은 전혀 합리성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만 말을 하는 오리일뿐 그 과정 그리고 그곳에서 얻는 예언들 그리고 그 성취는 공감이 가는 교훈 혹은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이 합리성이 아예 없다면 그것은 예언의 규모도 될 수 없을 뿐이고 그 가치 또한 얻기 어렵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렸던 예언이 그 의미나 가치를 획득한 것은 식민지 상태의 이스라엘이 ‘상상할 수 있는 메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합리성 때문입니다.

 

15. 예언의 성립 조건 - 비합리성

  하지만 오히려 완벽한 논리의 조건과 추측은 예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나는 내일도 아침에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겠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예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조건의 확률이 아주 높은 쪽에 대한 판단일 뿐입니다. 즉 현실 그 자체는 예언에 속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약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힘껏 발길질하는 아이의 태동을 보면서 축구선수를 보면서 체육인으로 키워 냈다면 그것은 ‘예언’이 될 수 있습니다.(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말이죠.)

  기독교의 메시아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아가 아무나 될 수 없기에 이것은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아예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비합리적인 면이 예언의 지위를 확립시켰고, 예수의 행적에 권위를 주는 것입니다.

신이 죽는 이 장면은 절대 비합리적이지만 그렇기에 신이 될 수 있다.


  예언에 대해서 이 두 가지만 생각해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둘을 모순 관계이라는 것 있습니다. 즉 예언은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언의 그 과정의 합리성을 그리고 현실과 너무 부합하면 안 되는 비합리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하기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이라는 존재는 모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합리성과 비합리성이 부딪치는 이 상황에서 예언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 모순관계에서 예언이 그 위상을 유지하는 데에는 사람들의 한자기 독특한 습성이 있습니다.

   

16. 모순과 상관없는 예언? - 인지 부조화 이론

  하지만 보통 예언이라고 하면 느끼는 것은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그 능력이 나온다 합니다. 이는 예언이 성립이라는 것을 갖추었을 때 힘은 얻는다고 오해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성립을 하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예언의 조건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성립이란 조건이 없이도 예언은 그 위상을 잃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성립이 없는 예언’이라고 하면 ‘신성 모독’이라고 할 것 같은 예상에 한 가지 심리학 이론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지 부조화 이론’입니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람들이 어떠한 태도들이 또는 태도와 행동이 서로 모순인 관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이 그 태도에 대해서 반성하기 보다는 그 태도를 유지하게 되는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그 원인은 일관성이 깨지는 것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바로 종말론자입니다.

사람의 인지 않에 모순 혹은 부조화가 생기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2000년 밀레니엄이라는 ‘산술’적인 모델 앞에서 많은 이들은 종말을 논했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종교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산술적인 장난은 신이 될 수 없었고 이에 많은 이들이 종말론 자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무엇이었을까요? 반성 보다는 자신들의 말들을 위해 행동합니다. 완벽한 부조화입니다. 그 실체나 판단보다는 먼저 경험했던 행동이나 그 태도가 바로 그들의 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합리성을 버리고 비합리성만을 갖은 예언을 따라가는 것이죠.

  그들은 예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순적이 부조화라도 말입니다. 즉, 예언이란 것은 부조화 혹은 실현과는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혹은 그것이 더 강할 수도 있습니다. 실현된 예언은 검증이라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처럼.

   

17. 모순이 완성하는 예언 - 2012년 또 다른 종말론을 맞이하며

  2012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은 또 다른 예언들이 넘쳐날 듯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마야인 들의 달력 덕분이죠. 이는 합리적인 마야의 계산법에 비합리적인 종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언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개인의 몫입니다. 혹은 이루어지지 않은 종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조화이론의 실천을 통해 계속 믿는 것 역시 개인의 것입니다.

2012년 종말을 이야기 하는 영화 '2012'


  다시 말해 예언과 성립은 상당히 중요한 합리적 고리이지만, 그것이 성립이 되지 않는 모순을 겪더라도 사람은 그 예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모순이 더 깊은 믿음과 행동의 근거가 됩니다.

  즉 이런 인간의 부조화적인 심리적 방향성이 합리성과 비합리성이라는 두 가지 모순으로 만들어지는 예언을 더 강하게 완성시킵니다. 또 그 예언은 우리가 이전 글까지 언급한 대로 선택에 가장 중요한 기저가 됩니다.

  이슬람종교가 여타 종교보다 더 많이 소유한 규제 및 행동 규약 들은 사실상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무신론자들이 보기에는 기독교인이나 불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모순적인 행동의 근원은 비합리적이라도 어떤 하나의 ‘예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언’의 비중이 높은 종교가 더 큰 충성심을 보이곤 합니다. 그리고 이 충성심은 행동에 대해서 더 강한 선택을 유도하게 합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입니다.(르네마그리트 )

  따라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언은 인지적인 조화이든 인지적 부조화든 혹은 성립이든 그것이 아니든 예언은 선택을 종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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