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체벌, 불


어느날 최초의 인류 혹은 그와 비슷한 인류가 살고 있을 때

신의 노여움을 대표하던 번개


하늘이 온통 검게 변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격노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어느새 자신의 머리위까지 점령한 검은 구름은

분노의 빛을 땅에 꽂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수 없는

붉은 빛과 열이 번져나간다.


바로 불이다.


하늘이 성난 시간 순식간에 내려온 불은 초원을 태웠고

땅에서 생명을 얻은 것은 불 앞에서 힘을 잃었다.


거기에 대앙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던 인간은

그저 분노가 가실때 까지 얻는 것은

두려움 밖에 없다.

신과 의 최초의 체벌 관계, 불



이제 그들은 하늘이 보낸 재앙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한다.


불, 이건 신의 심판이다.

그들의 믿음 처럼 나와 신이 존재한다면


이 불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초의 체벌이 될 것이다.



우리의 뜨거운 불


우리가 체벌을 동의하는 경우는 대부분 경험에 의존한다.

나 잘난 맛?

좋지 않은 극단 적인 예는 뭐 이런 식이다.

"예전에 이렇게 해서 이만큼 맞았어~"

"그후로 내가 이렇게 잘 된거 아니야"

음...

사실 보통 여기서의 논제는 체벌의 중요성을

강조 하는 것이 아니라

1번 : 나는 이렇게도 맞아 봤삼

2번 : 나 잘나심

뭐 이 정도가 (剿等適) 논점인데 가끔 부수적인 논점으로


"맞아야 정신 차려"라는 논제를 펼친다.


워 일부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인 경우도 있으나

보통의 경우는 그 말은 이렇게 써야 정상이다.


"맞아야 나를 거슬리는 그일은 절대 다시 않할 꺼야"


보통 "불" 같은 심판은 분노를 대동한다.

우리 최초의 인간이 불을 보면 심판을

잘못하면 재앙

신의 분노와 동일시 하는 것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오해하고

남용하는 체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체벌이 이런 마음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사실 위의 좋지 않은 예에서 잠깐 볼 수 있는

인간적인 연결이 그렇다,


다시 말하자면 정.

그 체벌의 기저는 정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관심의 정이라고 하자.

내가 관심이 있기에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 심판을 내 비친다는 것,

보통 체벌을 하는 마음도 그 부분이라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알고 있고 경험했던 것은

(범죄적인 것을 제외하곤) 이런 뜨거운 정의 체질이라 하고 싶다.


단, 나는 이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최초의 인류의 행동을 고치게 만든 그 것의 원인는?

바로.. 다 타고 남은 재를 보면서 후회하는 일이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초원을 잃고 상처를 입고서야 그 다음을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과연 현재 우리가 바라는 교육과 상응하냐는 것이다,


바로 상처와 후회의 교육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교육과 얼마나 부합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쩜 우리는 의미는 잊은채 뜨거운 정에 집착해

모든 것을 불싸르게 하는 신은 신이되

나쁜신 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



차가운 불의 등장


진중권의 호모코레아니쿠스란 책에서 교육에 관한 재미있는 부분을 읽었다.

요약하자면



자리가 하나 남은 버스에 어머니와 두 형제가 탑승했고

남은 자리에 형이 앉았다.

그 자리가 탐이 났던 동생은 어머니에게 떼를 쓴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한다.


한국 : 형이면 형답게 동생에게 양보를 해야지 형이라면서!

독일 : 않되지! 형이 먼저 앉았으면 그건 형의 자리인데 너가 뺏으면 않되는 거야!




뭐 이 책의 의도는

우리나라의 역활론이 강조되는 상황을 이야기하려 한거지만,

나는 왜인지 더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인간적으로 느끼는 뜨거운 불과 다른

또 하나의 불,

즉 1인칭과 2인칭 사이의 뜨거운 불이 아닌

3자가 되어 원칙으로 바라보는 차가운 불


우리나라가 느끼는 행동은 1인칭과 2인칭의 관계에 따른다.

즉, 다시말하자면

관계에 따라서 역활이 달라지고 그 역활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형이라 함은 뜨거운 마음으로 동생을 위할 줄 알아야 하며,

동생은 그 형을 존경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어긴다는 것은, 그 관계을 어긴다는 것이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체벌은 관계속에서 나오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

부모 혹은 선생님이라는 관계에서의 당연한 역활이였다.


독일의 경우는 어떤가.

어머니이지만 한순간 법관으로 빙의(?)한다.

어떤 역활은 규칙에 따라 정해지고

그 온도는 상당히 차갑다.

형제의 역활이 아니라

규범을 지쳐야 하는 시민이란 면을 이야기 한다.

자기자신에게도 그것으니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체벌? 그들에게는 체벌은 폭행이라는 규범과 동일하다.


즉, 관계와 역활은 별개의 문제를 보이게

그들의 교육은 차가운 불과 같다.

그리고 그 불은 공평하다.

3인칭으로 바라보는 교육은 차가운 불 같다.



우리가 필요한 불의 온도는?


심판의 의미의 차가운 불이든,

역활에 의미의 뜨거운 불이든,

어느 한쪽에 치우지는 교육은 자칫 역효과를 낼 수 가 있다.


단지 지금은 뜨거움속에 진행되는 교육에 치우쳐져 있다는 것

그래서 이제 우리는 뜨거운 불에서 약간 물러날 시간이다.


현재 우리의 교육이 입시란 독을 머금은 이 후

목적이 대입과 능력으로 맞추어지면서 과열된 불이 교육계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어쩜 이번 인권조례안 역시 이런 취지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차갑다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잘못하면 우리의 관계 전부를 잃을 수도 있다.


이번 인권조례안 이후에

(인원조례안과 체벌없는 평화로운 학교 만들기 파일)


많은 반발이 있어 서울시는

성찰교실과 서울시 교육청의 학생지도 메뉴얼을 발표했다.

문제는 이것이 탁상공정이라는 비판인데

아래의 동영상이 쉽고 꽤 논리있게 말해주고 있는 부분이다.


Get Microsoft Silverlight




또한 체벌금지에 대해서는

그 외 여교사 모욕이라는 동영상을 교총에서 공개(링크)하기도 했다.


사실 내 의견에는 인권조례안에는 찬성이고 성찰교실은 보완이 필요하며

사례집에 대해서는 비판점이 너무 많다 너무...

인권을 위한 교육과 그에 때른 역치 해결에는

아직은 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그러기에 교육에 관한 것은 한걸음 한걸음 놓치면 조심히 떼어야 한다.


그것 아는가?

만약 사람을 들어 아주 뜨거운 물과 아주 차가운 물에

한쪽 다리씩 집어 넣으면 어떻것을 먼저 느낄 까 하는 실험이 있었던 것.


그 결과는

바로, "아프다" 였다.

섣부른 차가운 교육과 고집스러운 뜨거운 교육이

잘못만나면 결국에

교육은 아플수 밖에 없다,



불의 역설


불이란 것, 우리의 것이 아닐 때는 댓가와 파괴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 불을 이용하고 쓸때는 보호와 생성의 도구이다.

불의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이다.


교육과 체벌의 양면성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체벌은 뜨거운 교육 안에서

1인칭과 2인칭에서 나오는 관계를 통해 나와야만 하는 행위였고

동시에 파괴를 통해서 그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였으면

우리가 더 필요한 차가운 교육은은

행위에 대한 평가레 공정성을 요구하고

그에 부합한 일에 자신이 책임을 지는 거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의 교사는 그저 3인칭의 법관과 같다.


사실 교육이 입시와 결부되면서 상처가 났다고 본다.

그 상처에 뜨거운 불이 과하다 보니

염증이 지고 고름이 새어

이제는 차가운 불이 필요한 시기인 것에 개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조심하지 못하면 그 불은 결국 재앙이 된다.


불은 그 쓰임이 어떻냐에 따라 달라진다.


정말 우리가 필요한 불은 어떤 것일까?

그에 대한 답보다는

회초리의 의미로 마무리 하려한다.





회(回) 초(初) 리(理) :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이런 의미에서 지금 교육에 가장 필요한 것은

회초리가 필요한 거 같다.


입시 이전에 가르침,

그 이전에 아끼는 마음 혹은 사랑이라 생각한다.


교육자, 교사 혹은 부모들

정말로 교육을 원한다면

일단 우리 스스로 회초리를 가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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