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똑똑한 지인이며 친구인 이의 조언에 따라 경어체로 바꾸어 봅니다.>
앞서 이야기 한 듯이 우리가 이미 '선택'이란 것이 이제 더 이상 '독립적'선택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구석이 너무나 많습니다. 의지를 구성하기 에는 다양한 방해요소가 생성되며, 우리는 그 방해에 순종하는 것이 대부분이죠. 자신이 인지 못한 상황, 아니 인지하는 상황이더라도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하기도 하고, 또는 타인의 선택에 속기도 하며 심지어는 제시되는 정보의 순서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선택의 방해물에서 잠시 벗어나 선택 자체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7. 경솔하게 선택하고 신중하게 유지하다.

먼저 유신론과 무신론을 들먹거리고 싶진 않습니다. 나의 전공이 아닐뿐더러 지금 여기서 내세우고 싶은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각주:1] 모든 사람은 선택하고 그 결과를 기대합니다. 만약 그 결과에 대한 환상이 클수록 선택에 신중을 기하는 경우가 많고 만약 이루어질 확률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해집니다. 그에 반하는 경우나(문구점의 뽑기) 혹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우(로또)에는 정말 터무니없게 경솔하기도 합니다. 신중과 경솔의 사이 속에는 무엇인가 '독립적인 선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신중함에서 선택을 찾을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저는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선택한다."를 찾고 싶은 것입니다. 한 가지 가설을 올립니다. 신중의 정도가 높을 경우에 우리는 좀 더 자발적일 수 있을까요? 이 가설이 옳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의존적인 선택의 실험들은 '신중함'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신중함'이란 것을 찾아 가봅시다. 최고의 신중함을 찾으려면 가장 결과가 큰 곳으로 가야 하겠죠? 그래서 저는 이 가설에 '신'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보통의 유신론(특히 종교) 속에서는 우리는 한정된 삶의 영원한 다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 그 '결과'란 것은 (그 믿음에 성실할 경우에) '로또'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이겠죠.

그런데 재미있는 '종교'의 특징은 보통 경솔하게 선택하고 신중하게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신앙이란 것의 고비마다 결단과 선택의 순간이 존재하죠. 예를 들자면 세례나 출가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신중하고 싶은' 과정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처음에 입문하는 순간을 보자면 상당히 우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의 종교란 것도 상위세대의 종교의 세습과 동아리 활동 등의 의도치 않은 순간들의 결과입니다. 갑자기 종교와 입문의 경솔함을 언급하는 이유는 과연 결과에 부여된 가치가 크다 해서 선택이 신중하지는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종교적 '간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의 길을 인도한 것은 신이였다. 내가 우연히 마주하게 된 곳은 신이 나를 멱살 잡아 내팽개친 그곳 이였다. 아멘. 혹은 나무아비타불.

본디 경솔함이 인간의 몫이고 신중은 신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린 어디에서 신중했던 걸까요? 신이 우리를 이 자리에 '모셔'왔다면 우리가 대체 신중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긴 한 것일까요?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믿는 신의 현현(석가나 예수)은 신중했던 존재였다는 것 말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바로 이 신중했던 선인 및 신이라 불릴 존재에 대한 믿음이겠죠. 결국 태초부터 경솔했던 우리는 신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내세운 가설 "결과가 클수록 신중할 것"은 그다지 좋은 가설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작은 것에 신중하며 큰 것에 대해서는 경솔할 수도 있습니다. 신은 경솔하게 선택하고 의례는 신중하게 하는 우리에서 모습에서 말이지요.


8. 당신이 선택을 한 신에 대해서

사실 '경솔'이란 단어가 '신중'이란 단어의 반대 개념으로 적용하기에는 충분히 독선적인 면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어쩜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종교와 선택이란 자유의지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왠지 더 역설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사실 종교로 들어가자면 정말 계획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신이니까요. 그런데 무신론자들은 다를까요?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또한 사실과 증명이라는 것에 종속되어있긴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까?'입니다. 사실 저는 많은 실험들을 통해 글을 진행해 오면서 그렇지 않다고 계속 속삭이고 싶습니다. 어쩜 정말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개인적으로 슬플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조금 주제를 돌려볼까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는 법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알고 있기에 이쪽으로 이야기 하자면, 예수의 마지막 말 중 하나가 바로 "다 이루었다.[각주:2]"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한마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란 존재의 역할이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 역할을 끝까지 따라 온 것입니다. 이것에 '예언'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에 비춰 볼 때, 예수 본인도 예언을 쫒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철저히 '구약'이라는 기독교 전통 역사서의 모든 예언을 실행합니다. 출생부터 죽음 그리고 거듭남 까지 말이죠.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그의 올바른 길 혹은 올바른 선택을 존중하고 종교로 신봉합니다. 사실 그마져도 모든 행적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예언의 선택 이였죠. 그러므로 그가 선택한 것은 '그 예언'인 것입니다.



9. 인류를 가장 빨리 종말 시키는 법. <피그말리온 효과>

<피그말리온 효과>, 개인적으로는 귀에 익숙한 음악처럼 들리는 단어입니다. 교사를 위해 처음으로 교육학이란 것을 시작할 때 배웠던 것으로 저에게는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실험입니다. 다들 어쩌면 한 번씩은 들어보았을 실험이기도 합니다. 우선 이 실험 내용의 간략한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이 효과는 로젠탈 효과라도 불리며 로젠탈은 이 실험의 발의자입니다. 사실 정성스럽게 키운 쥐가 미로를 더 잘 찾는데서 시작된 이 실험은 인간에게 특히 학생에게 직접 적용되었는데 먼저 진단평가를 본 다음 보통 수준의 아이들을 두 반에 나누어 배정한 다음에 이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한 반은 앞으로 수개월 내에 월등하게 향상될 반 이라 소개하고 나머지 한 반은 기대치가 없는 반으로 소개합니다. 물론 처음에 능력차이가 없었죠. 하지만 결과는?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수치로 능력을 인정받은 처음 반이 평균 이상의 성적을 그 반대 반은 평균 이하의 성적을 보였습니다.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어버린 것이죠.[각주:3]

사실 피그말리온이라는 단어의 어원 역시 이와 비슷한 사건의 그리스 신화를 기초로 한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피그말리온이라는 키프로스지역의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이 사랑한 것은 다름 아닌 조각상 이였습니다. 그 조각상에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던 왕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축제에 간절히 소원을 빌었고 그 결과 그 조각상에 고운 여인으로 변하였습니다.
 

조각에서 여인으로 변모한 것은 그가 지속적으로 예언한 덕분입니다.


 
왜 로젠탈효과를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바램 혹은 무의식적으로 들어간 예언이 실제로 사람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을 그렇게 만들고 말지요. 사실 이 효과에 대해서 미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실제로 재 실험 결과 생각보다 높지 않은 결과도 있었죠. 하지만 이는 분명합니다. 예언은 분명 영향을 미칩니다.

언젠가 인류를 가장 빨리 종말 시키는 법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습니다. 핵폭발? 유성충돌? 핵폭발이 있어도 벙커 안에서는 파티가 열리는 세상이며, 유성이 온대 해도 화성으로 가는 편도 우주선[각주:4]에 오른다면 적어도 비행선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모든 사람들이 곧 인류가 종말 할 거라고 믿게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벙커도 만들지 않고 화성 편도 우주선도 탑승치 않고 그리고 영웅도 나타나지 않고 멸망의 길로 갈 꺼라 생각합니다. 사실 약간의 과장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더라고 변함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분명 우리가 예언을 하게 되고 ,그 예언은 분명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 예언은 길게 이어왔던 선택의 본질로 향하는 길을 열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쟌다르크는 예언으로 영웅이 되었고 또한 그 예언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예언이 영웅을 탄생시킵니다.




10. 바위의 엑스칼리버를 뽑아들 영웅은 누구인가.

하지만 피그말리온 효과는 그들에게 속여진 예언입니다. 어쩜 후광효과(링크)와 비슷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 예언이 혹시 거짓임을 알고 있을 때도 예언 실현이 가능할까요? 만약 정말 거짓임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 후광 혹은 그 예언을 뿌리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전에 저의 개인적일 일 하나를 언급하려합니다.

저는 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꿈에 대한 해몽을 그다지 믿지는 않죠. 그래도 주변에서 꿈자리가 사납다면서 나에게 연락을 할 때면, 왠지 횡단보도 앞에서도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서 신호를 대기합니다. 이는 분명 의식적으로 아니라고 믿었던 예언마저 저에게 실현되고 있는 것 입니다. 저는 전혀 믿지 않았는데 말이죠. 

또 한가지는 주변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아무 숫자나 이야기 해봐요." 대답의 경우는 상당히 다양했습니다. 당연한 것이죠. 그것은 임의 선택이니까요. 그리고 다음 질문을 했습니다. "왜 이 번호를 선택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보통은 "좋아서요", "학번이였어요", "전화번호 끝자리예요" 등 으로 대답했습니다. 질문은 아무 숫자였는데도 대답은 임의의 선택이 아니라 예언된 선택이였습니다.[각주:5]

대부분은 예언으로써 선택한다.



이 이야기는 어떤 동생과의 대화중에서 발췌합니다. 그는 기독교의 많은 위인 중에서 요나[각주:6]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그는 신에게 어떤 지역으로 가서 예언을 하라는 명령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이 자신에게 위험하다 판단하여 도망치죠. 그러나 도망치는 배에 올라탔을 때 풍랑이 일고 결국에는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그는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는 신세이죠. 머, 고래의 위는 건강하지 않은가 봅니다. 그는 그 위에서 살아나 신이 예언하라 보낸 그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요나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신의 예언을 거절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쩜 우리는 예언을 받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혹시 내가 선대에서 부터 선택되어진 '그' 사람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바위에 꽂혀있는 칼을 내가 집어 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죠.

가끔 바위에서 칼을 뽑아 드는 상상을 합니다.

 

위의 세 가지를 잘 적용해보면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앞서 또는 선택한 후에 예언을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본능적으로 피그말리온 효과를 찾는 것일지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선택에 대한 결과를 회피하기 위한 방어기제 일지도 모르죠. 무엇이 진실에 가깝든 이것은 일치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예언'을 원합니다.


즉, 바위에 꽂힌 엑스칼리버를 뽑기 전에 우선 예언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언에 의존하는 성질은 어디에서 부터 일까요? 다음에는그런 예언의 주체를 생체학적으로 찾아보는 실험을 통해서 계속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1. 개인적으로 나는 회의론적 유신론자라고 하고 싶습니다. [본문으로]
  2. 요한복음 19:30 [본문으로]
  3. 이때 성적이 떨어진 집단에 대한 효과를 '골렘 효과'라고 하고 비슷한 실험으로 위약효과로 알려져 있는 '플래시보효과'가 있다. 이는 실험자들이 가짜 약을 먹고도 신경증이 완화되는 효과며 그 원인은 피그말리온과 비슷하다. [본문으로]
  4. 이미 이 여행의 경쟁률은 400명을 넘어섰다. 참고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111712411&code=970211 [본문으로]
  5. 모든 사람이 그렇게 대답한 것은 아닙니다. 몇 몇은 아무런 숫자를 뽑으라 하지 않았냐 하고 반문했죠. 수학전공자들이였습니다. [본문으로]
  6. 열왕기하 14: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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