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루트비히 필리프 칸토어
(Georg Ferdinand Ludwig Philipp Cantor, 1845년 3월 3일 - 1918년 1 월 6일)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독일 수학자로 집합론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유태인 상인이였는데
부친이 1856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한 후 독일에 계속 머물게 되었고
1863년에 스위스의 취리히 대핵에 입학하였는데 아버지의 사망을 이유로
다음해에 바로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와 수학, 물리학,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특히 그는 수학과 철학의 관계에 집중적으로 몰두한 그는
처음에는 정수론 , 부정방정식, 삼각급수에 있었는데
삼각급수의 미묘한 이론에 영감은 칸토어는 해석학의 기초에 관심을 두고
데데킨트의 기학학적 절단에 반영된 무리수와는
다른 무리수의 아름다운 취급법을 만들어냈죠.

하지만 칸토어는집합론과 무한이론에 몰두하였고
끝내 1874년에 "집합론의 한 고찰"이라는 논문집을 제출하였습니다.
칸토어는 수학 연구의 아주 새로운 분야를 창조한 것이고
특히 초한수이론을 발천시켜 유한수의 계산법과 유사한 초한수의 계산법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 수학계에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수학자이며
논문집 편집위원장으로 있던  "크로네커"가 편집실을 통해 발표를 억제시키고 말았는데
이일로 칸토어는 상처가 깊었고 크로네커와의 악연이 계속이어졌습니다.
크로네커는 직관주의자로 칸토어의 집합론에 대한 생각은 수학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했죠.

그 이유는 집합론의 초한수 대한 이론 자체가 직관과는 거리가 먼 이론이였기 때문입니다.
무한집합의 크기가 다른점, 유리수와 자연수의 수가 같은 것 그리고 실수집합의 비가산성
특히 여기서 대각선 논법으로 증명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연속체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칸토어가 인정받는 것은 1897년 취리히에서 개최된 제1회 국제 수학자 회의인데
집합론이 수학의 기초와 철학에 깊은 의가 있음이 인식되며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1901년에는 런던수학회의 명예회원으로,
1902년에는 크리스티나 대학 및 성앤드리우스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수여했고
1904년에는 런던 왈립 협회로부터 실베스터 메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크로네커 등과의 계속되는 갈등과 러셀의 역리등을 해결하는 인생속에서
칸토어는 신경쇠약 후에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고
이후 문학과 종교에 대한 글을 내기 시작해

신학과 관련이 있는 절대 무한의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결국에는  제1차 세계대전 내내 가난했고 심지어 굶주리기까지 하며 비참하게 살다가,
결국 독일의 할레지역 정신병원에서 한 천재는 삶의 끝을 맞이했습니다.

오늘날 칸토어의 집합론은 거의 모든 수학분야의 기초가 되고 있으며
특히 위상수학과 실함수론에서 중요하게 쓰여졌습니다.
사실 집합론에는 많은 역설이 나타냈으나 하나씩 보완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칸토어와 크로네커의 논쟁은 현재까지도 형식론자와 직관론자들의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수학 이론 > 수학자 그리고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르키메데스(위키)  (0) 2010.06.25
힐베르트(위키, 작성중)  (0) 2010.06.24
유클리드와 그의 원론  (0) 2010.06.24

아르키메데스(Αρχιμήδης, 대략 기원전 287년 ~ 기원전 212년)는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계 식민도시인 시라쿠사에서 태어난 그리스수학자, 천문학자, 철학자, 물리학자공학자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와중에 시라쿠사를 함락한 로마군 병사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버렸다. 도시가 함락되는 와중에도 수학문제 풀이에 골몰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대 그리스 최대의 수학자, 물리학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는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수학자요, 기술자인 동시에 발명가였다. 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동남 연안에 있는 항구 도시인 시라쿠사에서 태어났다.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의 왕인 히에론 2세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천문학자였기 때문에 아르키메데스는 어렸을 때부터 천문관측을 배우게 되었다. 아르키메데스는 당시 가장 높은 수준의 수학과 물리학을 가르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왕립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코논의 수제자였다.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아르키메데스는이론을 실용화 하고 응용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287년부터 212년까지 생존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플루타크의 영웅전에 나와 있는 그의 최후는 매우 유명하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참인 즈음, 로마 함대는 아르케메데스가 살고 있는 작은 도시 시라쿠사를 공격했다. 로마군의 지휘관 마르켈루스는 여덟 척의 군함을 연결하여 그 위에 높다란 하프형의 대를 만들어 대포를 설치하였다. 자만심에 들뜬 마르켈루스는 자신들의 명성만으로도, 많은 배를 보기만 하여도 시라쿠사인들이 항복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라쿠사인들은 아르키메데스가 만들어 낸 거대한 투석기로 몇 톤이 넘는 돌을 연이어 쏘아 로마군의 배를 파괴하였다. 또, 기다랗게 생긴 기중기와 쇠로 된 갈고리로 성벽 너머에 가까이 오는 배를 잡아 휘둘러서 바윗돌에 던져 가루로 만들어 버리거나 침몰하게 하였다. 그 후 정면 공격을 단념한 로마군은 배후에서 시라쿠사로 쳐들어왔다. 여신 아르케미스의 축제일에. 시라쿠사인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이와중에 아르키메데스는 땅에 원을 그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때, 로마의 병사 하나가 뛰어들어 그가 모래판에 그려놓은 도형을 밟고 지나가려 하자 아르키메데스는 "이 그림을 밟지마라!"고 호통을 쳤다. 무식한 병사가 이 위대한 과학자의 마음을 헤아릴 턱이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라는 말과 동시에 오랜 전쟁에서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이 로마 병사는 아르키메데스를 단칼에 썰어죽이고 말았다. 위대한 아르키메데스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던 침략군의 사령관 마르켈루스는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고 몹시 가슴이 아팠다. 그리하여 고인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빛내기 위해 원기둥에 구가 내접하도록 새긴 묘비를 세웠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기하학적 그림에 내포되어 있는 매우 아름다운 수학적 조화를 발견하고 늘 자신이 죽으면 그것으로 묘비를 삼아 줄 것을 가족들에게 부탁하고 있었던 사실을 사령관이 전해 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구의 체적은 외접하는 원주의 체적의 3분의 2에 해당된다는 자신의 발견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부력의 발견 [편집]

아르키메데스는 천문학자 피라쿠스의 아들이었다. 그가 이집트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서 피라쿠스가 왕에게 아르키메데스를 인사시키러 갔다. 그 때, 왕은 새로 만든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다른 물질과 섞였는지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왕의 이 문제를 풀어달라고 아르키메데스에게 부탁을 하자, 아르키메데스는 하루나 이틀 동안 시간을 요청했다. 피라쿠스가 고민 중인 아르키메데스에게 목욕이나 하러 가자해서 그들은 목욕탕에 갔고,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 속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목욕탕 물은 넘치지 않는데, 자기의 목욕탕물은 넘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든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알았다" 뜻의 그리스어)를 외치면서 몸으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르키메데스를 보고 정신병자라고 놀렸지만, 아르키메데스는 듣지 못했다. 문제를 풀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왕에게 간 아르키메데스는 물이 다 차 있는 그릇에 왕관을 넣었다. 그리고 같은 크기의 그릇에 물을 가득 붓고 왕관과 같은 무게의 순금 금화를 넣었다. 각 그릇에서 흘러나온 물의 양이 같은 것을 왕관과 순금 금화가 중량과 부피가 일치하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도 같은 물질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것을 추론해 냈다

'수학 이론 > 수학자 그리고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칸토어와 집합론  (2) 2010.07.30
힐베르트(위키, 작성중)  (0) 2010.06.24
유클리드와 그의 원론  (0) 2010.06.24

1862년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오토 힐베르트와 마리아 힐베르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모두 판사였다. 김나지움(독일의 고등학교)까지는 수학 이외의 과목에 흥미가 없어 그리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다. 그러나, 좀 더 개방적인 학교로 옮긴 후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수학에서 최우수 성적을 획득한다.

188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 하인리히 베버에게서 수론과 함수론 강의를 듣고, 와중에 당시 유행하던 불변식론을 접하게 된다. 힐베르트의 2년 연하인 헤르만 민코프스키도 베를린 대학에서의 청강을 마치고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왔고, 베버의 후임으로 π의 초월성을 증명한 린데만이 오고, 그와 같이 아돌프 후르비츠(Adolf Hurwitz)가 사강사로 부임하여, 힐베르트, 민코프스키, 후르비츠 세 사람은 평생의 친구가 된다.

대수적 형식의 불변성에 대한 문제를 독창적으로 풀어내고, 1884년 12월 구두시험을 통과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다음해 여름 후르비츠의 권유로 펠릭스 클라인이 있던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간다. 1886년 클라인의 권유로 파리 유학을 떠나, 당시 최고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Poincaré)등과 교우하고, 귀국길에 레오폴트 크로네커도 만나게 된다. 귀국 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불변식에 관한 논문과 가 장 일반적인 주기함수라는 제목의 강의시험을 통과하여 교수자격을 얻는다. 1888년파울 고르단(Paul Gordan)을 만나 고 르단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 후 라차루스 푹스, 헬름홀츠, 바이어슈트라스, 코르네커등을 방문한다. 1888년 9월 귀향하여 고르단의 문제의 답을 담은 논문을 제출한다.

1892년 30세의 나이로 결혼을 하고, 취리히로 간 후르비츠의 후임자로 부교수 자리에 오른다. 1893년 eπ의 초월성에 대한 기존의 증명과는 다른 증명을 내 놓는다. 곧 뮌헨으로 떠난 린데만의 뒤를 이어 정교수가 된다. 1893년 독일 수학회에서 민코프스키와 당시까지의 대수적 수론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1895년 괴팅겐 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수론보고서(Zahlbericht) 작성에 힘을 기울인다. 1897년 4월 자기 몫을 작성하지 못한 민코프스키와 별도로 수론 보고서를 발표하고, 이것으로 수학계의 명성을 얻는다.1898년 ~1899 년 겨울학기에 행한 기하학의 기초에 대한 강의를 정리하여 기하학의 기초를 발간한다. 여기서 힐베르트는 유클리드 기하학 공리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 나아가 한 공리체계는 완비적이고, 서로 독립적이고, 무모순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기하학의 연구를 계속하며, 디리클레 원리의 결점을 보완하며, 변분법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다.

1900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유명한 힐베르트의 문제들 23개를 제기한다. 1901년 이바르 프레드홀름(Ivar Fredholm)의 논문을 접하고 적분방정식론의 연구에 몰두한다. 1902년 베를린으로부터 푹스의 후임자리를 제안받으나 거절하고, 그 대신 괴팅겐에 민코프스키의 자리를 요구하여 관철시킨다. 1908년 오랜 미제였던 웨어링(Waring)의 문제를 증명하여 수학계를 놀라게 한다. 1909년 오랜 친구였던 민코프스키가 맹장염으로 사망한다.

1912년 적분 방정식에 관한 연구를 종합한 책을 발간한다. 이후 물리학을 수학과 같이 공리적 체계 위에 세우려는 노력을 시작한다. 1915년 11월 아인슈타인일반상대성이론과 거의 같은 시기에 물리학의 기초라는 논문으로 같은 결론을 얻는다.

1차 세계 대전후 브로베르(Brouwer)등의 직관주의에 대항하여 형식주의를 주장한다. 1925년 악성빈혈증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미국에 있던 제자들의 도움으로 다음해 쾌유한다. 1928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개최된 세계 수학자 대회에 독일의 수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의 수학자들을 이끌고 참석한다.

1930년 봄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다. 이 해 가을 쾨니히스베르크로부터 명예시민증을 수여받는다. 괴델의 결과로 어떤 공리체계의 무모순성의 증명이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조건을 약화시켜 증명론을 발전시키려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한다.

80세 때 길에서 넘어져 다친 후 병발증이 발생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2월 14일 81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위키백과 사전-


힐베르트의 묘비에는 그가 은퇴하면서 행한 고별 연설의 마지막에 남긴 유명한 경구가 적혀 있다.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독일어: 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

'수학 이론 > 수학자 그리고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칸토어와 집합론  (2) 2010.07.30
아르키메데스(위키)  (0) 2010.06.25
유클리드와 그의 원론  (0) 2010.06.24
알렉산드리아의 에우클레이데스(Ευκλείδης, 기원전 365년 경 - 기원전 275년 경) 또는 영어식으로 유클리드(Euclid)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그리스의 수학자이다.

유클리드의 저서 원론은 《스토이케이아》13권으로
《기하학 원본》 또는 《유클리드 원론
》으로 불리우며
수학 저서 중 최고의 베스트셀러이며 15세기 인쇄술 발명 이 후 천쇄이상 출판 되었고
현재 수학교사서 또한 유클리드 원론의 재탕이라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통은 '기하학의 아버지' 라 불리우나 사실 "엄격함의 아버지"라 하는 것이 더 옳다.
유클리드는 단지 5개의 주춧돌이 되는 공준을 가지고 단지 3가지 원칙으로 유클리드 원론을 완성 시킨것이다.
이런 공준에서 부터 결과를 이끌어 내는 논리적인 전개는 근대 수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기하학에 왕도는 없다"는 말은 유클리드 원론의 기하학은 어떠한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닌
수학적인 논리 이외의 길을 가지 않는 다는 말의 반증이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수백년 동안 변하지 않는 진리로 받아 들어졌지만

로바체프스키 리만 아인슈타인등이 제시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지금은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불린다.

----------------------------------------------------------

유클리드 원론의 5가지 공준

Ⅰ. 임의의 점에서 다른 임의의 점으로 한 직선을 그을 수 있다.

Ⅱ. 한 선분은 직선 위에엇 연속적으로 연장할 수 있다.

Ⅲ. 임의의 중심과 반지름을 갖는 원을 그릴 수 있다.

Ⅳ. 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

Ⅴ. 한 직선과 그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이 있을 때,

     그 점을 지나면서 원래의 직선에 평행한 직선을 오직 하나 그을 수 있다.


note. Ⅴ가 유명한 평행공리 이며 이때 평행한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 타원기하학

         평행한 직선이 두개 이상일 때의 쌍곡기하학의 존재가 성립함이 증명되어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생겨났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3가지 원칙

1. 눈금없는 자를 이용한다.

2. 컴퍼스를 사용한다.

3. 유한개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하지만 기하학 자체는 결과를 보여주는 용도이며

실제 증명은 그림이 아닌 논리로만 진행됨.


--------------------------------------------------------------------

《원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위키백과 사전

제1권에서 제 6권까지는 제5권을 제외하고 평면기하가 들어 있다.

  • 제1권 : 필수적이고 예비적인 정의와 설명 및 공준과 공리로 시작한다. 비록 오늘날의 수학자들은 ‘공리’와 ‘공준’이라는 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의 일부는 그것을 달리 사용했었으며 유클리드가 채택한 그 두 단어의 차이점은 공리는 모든 학문 분야에 공통인 초기 가정인 반면에 공준은 연구하고자 하는 특별한 분야에 특유한 가정인 것으로 여겨진다. 제1권의 정리 중에는 합동, 평행선, 직선으로 이루어진 도형 등에 관한 친숙한 정리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책의 마지막 두 정리인 정리 47과 48은 피타고라스 정리와 그 역이다.
  • 제2권 : 겨우 14개의 정리만을 포함하고 있는 작은 책인데 여기에서는 주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기하 대수학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정리 12와 13은 근본적으로 오늘날 코사인 법칙으로 알려진 피타고라스 정리의 일반화임을 지적했었다.
  • 제3권 : 39개의 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원, 현, 할선, 접선, 연관된 각의 측정 등에 관한 정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 제4권 : 16개의 정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와 컴퍼스를 이용한 작도, 주어진 원에 내접하는 경우와 외접하는 경우의 작도, 정다각형의 작도를 포함하고 있다.
  • 제5권 : 에우독소스의 비율 이론에 대한 대가다운 설명에 충당했다. 이 책은 수학적인 문헌 중에서 가장 훌룡한 걸작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 제6권 : 에우독소스의 이론을 닮음 도형의 연구에 응용하고 있다.

제7권에서 10권까지는 102개의 정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기초적인 수론을 다루고 있다.

  • 제 7권 : 두 개 이상의 정수에 대한 최대공약수를 구하는 방법(유클리드의 호제법)으로 시작된다. 또한 초기 피타고라스 학파의 비율 이론에 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 제 8권 : 주로 연비례와 그것과 관련된 등비수열을 다루고 있다. 만약 a : b = c: d가 성립하면 a, b, c, d는 등비수열을 형성한다.
  • 제9권 : 수론에서 중요한 많은 정리들이 있는데 먼저 정리14는 중요한 ‘산술의 기본 정리(Fundamental theorem of arithmetic)’즉 “1보다 큰 임의의 정수는 반드시 소수들의 곱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 단 한가지 방법으로 표현된다.”는 정리와 동치이다. 정리 20에서 ‘소수의 개수는 무한하다.’는 사실에 대한 매우 세련된 증명을 찾아볼 수 있다. 정리 35는 등비수열의 첫 n개의 항의 합에 대한 공식을 기하적으로 유도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정리인 정리 36은 짝수인 완전수를 만드는 놀라운 공식을 증명하고 있다.
  • 제10권 : 무리수들, 즉 어떤 주어진 선분과 같은 단위로 잴 수 없는 선분을 다루고 있다.

제11권에서 제13권까지는 입체기하가 들어있다.

  • 제11권 : 선과 면·면과 면·평행육면체·정육면체·각기둥
  • 제12권 : 원의 면적·각뿔·각기둥·원뿔·원기둥·구의 체적(단, 원주율은 쓰지 않음. 원의 면적은 지름의 제곱에 비례하고 구의 체적은 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함을 이용)
  • 제13권 : 정다면체(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의 다섯 종류만이 정다면체임을 증명함.)

'수학 이론 > 수학자 그리고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칸토어와 집합론  (2) 2010.07.30
아르키메데스(위키)  (0) 2010.06.25
힐베르트(위키, 작성중)  (0) 2010.06.2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