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또한 그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임을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사실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인생은 다분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라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에 먹은 대로 살게 된다.”고 영화에서 그리고 새 책에서 또는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느끼는 삶의 방향은 어떤가 묻고 싶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관여하는지 혹은 자기가 가는 방향이 정확한지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힙니다. 이것은 고민할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보통 희망적 인생관은 '현실'이라는 숫돌에 갈려나가는 순간 비극적으로 바뀌고는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희극’보다는 ‘비극’이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1. 우리가 우리의 삶을 선택하는가? - 동조현상 -

 우리나라의 기분 좋은 특성은 아니지만 한번쯤 언급할 가치가 있는 성향이 있습니다. 2002년 시청 광장에 붉은 물결을 띄웠고 같은 해 같은 장소를 촛불로 채운 과거의 성격이며 2002년 이후에 계속되는 K-리그의 침체와 미군과의 충돌에 무지한 현재의 성격입니다. 좋은 말로 하자면 단결력이며 나쁘게 말하자면 일면 냄비 근성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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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윤호상, 김철민이란 사람의 대학가에서 개그 공연입니다. 현재 제가 알리기로는 17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학로 등 거리에서 개그 공연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을 홍보하려는 것은 아니고 어렴풋이 남아있는 그들의 개그 한마디 입니다. “~~~~(각 나라의 웃음에 대해 설명 중) 한국 사람들은 언제 웃는 지 알아?” “(관중들).....” “다른 사람이 웃어야 웃어~ㅋㅋ” 이 말을 하고 나서 개그 2인조가 깔깔대고 웃었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웃고 그 다음에 제가 웃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아주 멋지게 정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애쉬(Solomon Asch)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격과 비슷한 심리를 실험을 통해 제시하였는데, 실험의 내용은 원탁 위에 7~9명의 사람들을 둘러앉게 한 뒤 다음 그림과 같은 문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다음 중 같은 길이의 막대는?>

당신의 눈에는 X와 같은 막대는 어떤 것인가?

 

 답은 무엇일까요? 이 실험의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모든 사람이 “A”라고 답하였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만약 실험이 이대로만 진행된 것이라면 아마 이 실험은 단지 착시현상에 대해서 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의 장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답변자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사람은 피실험자가 아닌 이번 실험의 스태프 즉 이 실험에서 정말로 실험 당하는 사람은 원탁에서 마지막 답변을 할 1人이였다는 것입니다. 그 들이 먼저 제시한 결과는 “A”였습니다. 만약 "A"가 당신과 생각이 같았다면 당신은 이 실험에 당한 것입니다. 왜냐면 당신이 눈이 보는 것처럼 답은 “B”이기 때문입니다.[각주:1]

 이 외로운 피실험자는 후에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되묻자 처음엔 자신의 눈과 뇌에서 “B”가 답임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이 모두 "A"를 부르자, 자신의 눈이 틀렸다고 생각해 같은 답을 이야기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런 말이 빠질 수 없습니다. “왜?”
 
 이런 현상은 동조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실험이라면 더 다양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약 3~5명이면 충분히 길거리에서도 가능한데, 3~5명이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하늘을 응시하면서 신기한 표정을 지어보면 됩니다. 그럼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 중에 무의식적으로 같은 곳을 응시하는 사람이 생기는데, 이중에 더 재미있는 일은 가끔 무엇이 신기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신기한 표정을 내비치는 사람들도 생긴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판단하는 대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정말 확실한 것인가요? 나는 삶의 선택 혹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하는 것의 어떤 부분은 나의 선택과 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자신을 소유함에 대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에 희극을 쓸 수 있을까요?

 이런 말엔 이런 반박이 예상가능합니다. "그 동조는 상황에 대한 자신의 선택이라 말할 수도 있다."라고 말입니다. 즉 답을 알고 있지만 체면상 혹은 분위기상 그리 선택했던 자신의 판단 이였다고 말입니다. 그럼 다음 에쉬의 또 다른 실험을 다시 주목해 봅시다.


2. 자신의 판단은 늘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되는가? - 인상 실험 -

 이번엔 피실험자 누구를 속이는 실험이 아니라 10명 전원이 피실험자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먼저 가상에 인물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하는데, 한 집단에게는 긍정적인 단어 제시 후 부정적 단어를, 한 집단에는 반대로 부정적 단어 제시 후 긍정적 단어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피실험자에게 그 가상의 인물에 대해서 평가해보도록 하죠.

같은 단어의 조합이지만 순서에 따라 평가가 다르다.



 분명 똑같은 단어들을 제시하였으나, 긍정적인 단어를 먼저 들은 A 그룹에서 이 가상의 인물에 대하 평가가 더 좋게(긍정적으로) 나왔습니다. 같은 설명인데도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판단하는 판단요소가 어쩜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단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순서만 뒤바뀌어도 다른 판단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원인은 바로 처음 들은 단어가 선행 이미지로 굳어져 따라 나오는 이미지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즉 긍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제시한 그룹은 처음으로 좋은 이미지를 갖은 상태(인상)를 갖추고 나중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이미 들어있는 긍정적인 이미지에 희석시키면서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현상을 이용하려는 듯 오늘 아침의 보험 광고에서도 좋은 말만 떠들다가 마지막에 아주 적당한 글씨와 속도로 독소조항을 읽어버리죠.

  결론적으로 '가난해서 빵을 훔친 장발장'은 구제 받을 수 있으나, '빵을 훔친 가난한 장발장'은 감옥으로 가야 합니다. 이게 ‘세상’이란다 발장아.

가난해서 빵을 훔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낫다.




3. 당신은 당신의 주변에 대해서 선택 가능한가?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의 정보에 무기력하게 반응하고 굴복하고 맙니다. 그러면 가장 처음에 이야기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선택 가능한 존재'인가?

정말 신은 당신에게 선택에 대한 자유의지를 준것이 확실한가?


  저 또한 무엇보다 자유를 선택하고 싶다만 정말 그런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위의 아주 작은 두가지의 실험만으로 선택의 가능성을 판단한다면 성급한 일반화 일 것 입니다. 또한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위의 실험은 
당연히 이미지가 굳어지는 상황 속 이였고 피실험자가 그런 이미지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과연 당신은 선택가능 한가?



 즉 단지 인상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사람이라면 갖는 당연한 오류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은 이미지에 대해서만 오류를 범한 것이고 그 후의 판단은 자신이 하는 것이라는... 분명 그런면은 존재 합니다. 그럼 그 부분을 인정하더라도 아직 우리가 자신을 선택하는 지에 대해서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그럼 이제 방향을 바꾸어봅시다. 과연 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다 안다 할 때 과연 자신이 원하는 것은 선택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오류의 방향이 남이 던져준 정보 였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잘못 판단하게 되는 자신이였는지에 대해 다음글로 잠시 미루어 보겠습니다.
  1. 사실 나는 당신에게 약간의 거짓말을 했습니다. 마지막 1人의 답이 오답인 사람은 전체 실험의 1/3이였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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