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전 글, 성찰 수학을 꿈꾸다에서 이어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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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권의 책에 함축된 내용이 많았던 건지, 아니면 내가 아직 수다를 더 떨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번 글로는 왠지 할 말을 다 못한 수업 같이 찜찜하다. 이제 한번 더 성찰이란 책 앞에 노트북을 펴본다. 우선 앞에서는 데카르트의 기본적인 수학 관념을 분석해 보았다. 이전 내용을 다시 펼쳐보자면, 존재를 정의역으로 사유를[각주:1] 공역으로 하여 기본 함수를 만들고 그에 대한 기본적인 함수 성립[각주:2]은 '신의 기만하지 않음'에 기대어 봄을 알 수 있었다. 혹여나 이번 글을 먼저 접하게 된 이가 있다면, 그리고 이 글에서 함축된 내용들이 궁금하다면 이전 글을 먼저 읽고 오는 것을 추천한다.(링크) 이번 글은 저번 글에 이어서 '신의 증명'에서는 무한이란 개념이 쓰이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사유적으로 쉽게 여겨질 무한에 대한 오해를 살펴보려한다. 또한 여기에 추가되는 몇 가지 요소들을 더 정리해보고 동감하는 것뿐만 아니라, 데카르트가 세운 공리들이 파괴되었을 때 변화되는 많은 요소에 대해 잡담해 보겠다.


 6. 신보다 앞선 개인 - 신을 법정 앞에 세우다.

 데카르트의 신의 증명이 6가지의 성찰 중에 최초로 나오는 것은 3성찰 그리고 성찰을 거듭할수록 추가되는 요소를 다시 정리해 다시 신 증명을 시도하는 것은 5성찰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이 자체로도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분명 테카르트의 세상은 중세로 어떤 관념 혹은 어떤 존재보다 먼저 생각되고 정의되어지는 것이 바로 "신"이였다. 자세히는 기독교적인 신[각주:3]이다.  어느 종교보다 절대적인 이런 신을 먼저 개념으로 세우지 않고, 가장 먼저 찾은 정의는 바로 "사유하는 나"[각주:4]였다. 즉, 아직 그에겐 신은 아직 없었다.

 데카르트는 '신'에 대해 믿음이라는 도구를 버렸다. 대신 증명이라는 것을 들고 나왔는데, 이는 결국 신을 존재의 법정 앞에 세운 것이 된다. 그러니 얼마나 혁명적이고 흥미롭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닌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수많은 반박과 항의를 받았다.[각주:5] 아마도 그가 세워논 증명이라는 것이 신성모독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현재의 이 시대에도 데카르트를 설명하면 기분나빠하는 사람들이 많다. 역시 세상은 바뀌어도 사람은 바뀌기 어려운 법인가 보다. 만약 내가 신이더라도 자기를 믿지 못해 증명하려 드는 피조물을 본다면, 뭐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신은 자비롭고 '기만하지 않아서' 그런지[각주:6] 신은 나와 같진 않았다. 데카르트의 이 사고를 이성의 시작으로 세워준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을까 싶다.

 자 이제 데카르트가 성찰해서 증명했던 신을 다시 적어 보겠다. 대신 이전 글에 이미 언급한 내용이라 이전 글을 접한 분을 위해 아래에 접어 제시 하겠으니, 기억이 나지 않거나 처음 접하는 것이라면 아래의 펼치기 버튼을 열기 바란다.





 증명 과정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어질 곳은 무한한 신의 관념이다. 데카르트는 '무한한 신의 관념', '유한한 나의 존재'로서 마지막에 모순을 유도한다. 여기서 무한과 유한을 이용한 관념이 이용되는데 이 부분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쉽게 의심될 수 있는 것은 "과연 신이 무한한 관념 일까?" 이다.[각주:7] 이때 신의 무한성을 부인한다면 데카르트 성찰의 대부분이 무너지게 되므로 다른 면으로 접근해 보자. 바로 이 점 "나는 과연 유한한 존재일까?" 이다. 사실 데카르트가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없어 확증하긴 힘들지만, 아마도 나의 사유의 유한성에 기초한다고 문맥상 유추할 수 있다. 내가 가진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데카르트가 '무한'이라는 문턱 앞에서 놓친 개념이 있다.

 바로 "밀도[각주:8]"이다.

 무한을 위해 자주 들어보는 예를 꺼내보자면, (0,1)이란 유한의 공간에 있는 이 구간 안에는 사실 무한한 원소가 들어있다. 그뿐 아니라 이 안의 원소는 실수 R과 동일하다.(설명 - 링크, 아래 그림 참조) 이를 데카르트적인 사고에 집어 넣어본다면, 내가 만약 연속적인 사유를 하는 동안의 전체의 사유와 동일한 개수를 갖는다. 아마 또다시 무리해서 유추해 보건데, 그는 사유 공간의 유한성(예를 들면 (0,1)처럼)을 보았지만 연속성에 대해 사고해보지 못한 것 같다. 우리가 연속을 느낀다면 충분히 우리는 전체와 같을 수 있다.
 


 그래 여기에서 그에게 한걸음 양보하여 우리가 사유하는 관념 하나하나씩 꺼내어서 줄 세워야 겨우 사유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자. 하지만 이때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한한 사고뿐만 아니라 유리수 같은 개념도 생각할 수 있다. 유리수는 아무리 구간을 잘라도 존재하게 할 수 있다.[각주:9] 또한 우리가 분모를 기준으로 정렬시킨다면 자연수와 같이 끊어서 사유 할 수 있다. (아래 접기선 안의 링크 참조) 우리는 이런 것 들을 countable[각주:10]이라 한다. 여기서 데카르트에게 마지막으로 양보하여 제안하고 싶다. 내가 유한하고 신이 무한하다는 말보다는, "나는 countable한 사유밖에 못하고 신의 관념은 uncountable[각주:11] 하므로" 수정하도록 말이다.
 

그래도 그의 사고방식과 공간을 존중하면서 책갈피를 꽂고 다음으로 넘긴다.
(재미있는 것을 추가하자면, 글 중에서는 "무한을 유한의 역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라고 나오는데, 실제로는 무한을 먼저 정의하고 유한을 그 역으로 정의한다.)





7. 대수적 구조, 정신과 물체(신체)를 가르는 칼이 되다.
 
 6성찰을 잠시 인용하면, "정신과 신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즉, 물체는 본성상 언제나 가분적인데 비해, 정신은 전적으로 불가분적이다."라는 곳이 나온다. 과연 가분성이 왜 정신과 신체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을까? 이는 현대대수학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어떤 집합과 연산[각주:12]이 있는 구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기초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성질(structural propertie)"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대수학에서 구조적인 성질이란 것은 어떤 구조의 특성을 나타내는 성질로, '원소의 수가 유한'이라든지. '연산에 대해 가환(ex. ab=ba)'이란 것이  있다. 만약 두 가지의 구조가 동일하다고 판명될 시에는 같은 구조적인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 오해를 말아야 할 점은 이름 그대로 이런 성질은 겉모습과는 무관하다. a, b이 란 집합과 0.1이란 집합이 있을 때 무늬는 다르지만 구조적인 성질이 같을 수 있다. 이때 대수학에서는 이 구조적 성질이 완벽히 일치한다면, 둘을 같은 것으로 본다.

 이때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체(신체)가 같지 않다는 것을 '구조적 성질이 다르다.'라는 것으로 간단히 마무리 하였다. 그 다른 구조는 '가분성'이다. 실재로 대수에서 '가분성'은 구조적 성질에 속한다. 아래 그림의 예처럼 {0, 1, 2, 3 }과 { e, a, b, c }로 서로 다른 연산을 만들었을 때, 앞의 두개는 같은 구조이지만 뒤의 하나는 모양은 같아도 가분적으로 다른 구조가 된다. 상당히 대수적인 이론[각주:13]이라서 간단히 보고 넘어가는 것이 일단 건강에는 좋다.




 사실 이 부분도 반박할 것들이 만다. 과연 우리가 '물체를 가분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 것인지' 혹은 '정신이 나뉘는 경우(이중인격처럼)는 어찌 되는지?'에 대한 것 말이다. 하지만 이런 소소한 부분보다 좀 더 멀리 바라보자면 이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다. '무엇과 무엇이 같음'도 중요하지만 '다름'을 증명하는 것도 중요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것이 더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이럴 때 이렇게 '구조적인 성질'을 파악하고 비교함으로 '다르다'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쩜 더 의미 있는 일이다.

8. 왠지, 반박하고 싶어!(공리를 부정한다면)

 이전 글에서 말했다시피 데카르트의 많은 부분은 공리적이다. 그래도 인정할 부분은 우리가 인정해야할 부분 중 최소의 부분만을 공리로 만들려는 노력이다. 아무리 말을 잘한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인정되는 부분이 없다면 완벽 증명에 속할 명제는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신까지 공리에서 빼버린 것은 다분히 혁명적인 것이다. 하지만 나의 못된 심정이 이 공리에 대해서까지 의심을 겨누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의 지식의 양이 워낙 좁아서 의심의 결과까지 다다르기가 어렵다. 이에 다른 사람들의 지식까지 동원해 앞으로 나가련다.

A. 경험하지 않아도 아는 이성이 존재 할까?

 원인과 결과에서 우리는 존재-사유라는 관계를 얻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의 존재 및 성질을 증명했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가 정말 존재하고 그 원인이 결과를 도출하게 될 것인가? 이 공리적인 부분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내 지인의 철학과 지식을 빌려보면) 지인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탁자를 탁 치는 것'과 '내가 소리를 듣는 것'의 사이에 무엇이 빠졌느냐?" 우스갯소리 같지만 정답은 '과'였다. 즉 우리가 이성만으로는 절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과' 처럼 직접 말을 들었을 때만 인지할 수 있는 '과'이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와는 무관하다. 존재하는 '과'의 대한 사유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흄'의 이론인데, 경험하지 못한 이성이 존재 가능한가?로 시작한다. 데카르트처럼 의심으로 시작하지만 공리가 다른 그 둘은 현저히 다른 길을 걷는다.

B. 우리가 인식한 사유가 과연 존재에서 나오는 것일까?

  비슷하지만 다른 이야기는 명석 판명한 사유라고 하여 사유만으로 그것이 '존재 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다. 이런 공리를 깨는 것엔, 칸트는 실재하지 않는 것도 명석 판명하게 사유 할 수 있다고 증언한다. 충분히 우리는 붉은 사과 뿐만 나니라 보라색 사과 파랑색 사과를 명석 판명하게 사유할 수 있지만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 이런 면에서 칸트는 외부의 경험을 우리가 능동적으로 사유한다고 말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칸트는 형식론자와 경험론자의 의견을 일부 수용과 일부 반대 입장으로 보인다.
 
C. 우리가 명석판명하다고 느낀 사유가 진실일까?

 우리가 명석 판명하다고 느낀 사유가 기만하지 않는 신에 의하여 진실이라 답하지만,(데카르트의 의견)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HansHoon의 글에서도 등장하지는 현상학에서의 후설의 경우가 있다.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회의적인 성찰을 시도하나 모르는 것을 괄호 즉 빈 칸으로 채워간다. 자시한 내용은 그의 글에서 충분히 볼 수 있고, 주목할 적은 후설의 예이다. 만약 우리가 원뿔을 보고 있을때, 아래서 보면 원으로 옆에서 보면 삼각형으로 사유할 수 밖에 없다. 즉, 우리가 그 물체를 직접들어보지 않는 경우에는 그 물체에 대한 사유 만으로 판명할 수 없다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유에 대한 일차적인 함수였다면, 후설의 주장의 경험까지 미지수로 둔 2차적인 함수가 되겠다.

9. 모든 것을 마무리 하며...

 어찌 되었든 데카르트의 사유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보아질 성찰들을 생성해내었다. 과연 그것이 모두 진실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오류로 쓴 것인지 우리의 오류로 잘못 읽히는 것인지, 혹은 이 책 자체가 오류인지는 누구도 확증할 수 없는 것들이다. 마무리로 그의 공리의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은 어느 정도 선 이상에서는 의미 없다. 그 이유는 그 공리를 부정함으로 데카르트적인 공간을 벗어나 자신의 공간이 생성되기 떄문이다.
 하지만 '취미는 수학'으로 한번 데카르트를 분석해보고 또 반박해보는 시도를 하는 이유는 그저 즐거움이 따름으로 오기 때문이다. 그의 사고의 결과 보다는 그 사고의 과정에서 서고 나면 그 즐거움이 배가 되는 것 같다. 항상 아쉬운 부분은 그가 지금 나와 상호보완적인 대화를 할 수 없음이다.  그래도 주변엔 잡담할 인재들이 즐비하고 발광할 세상이 있으니 데카르트에게 건넨 아쉬움은 조심히 뭍고 다음을 기약하겠다.

PS. 요녀석... 정말 어렵네요.

이글은 @HansHoon @anspruch @No_Goon 이 함께 하는 잡담-발광의

제 1주제에 대한 글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다른 글은 여기 - http://luminescence.tistory.com/3를 참고 하세요


  1. 명석 판명한 것으로 제한되지만 [본문으로]
  2. 잘 정의됨 (well-define): 함수가 잘 정의 됨이란, f: X -> Y 에 대해서, a. f가 하나의 x가 함수값을 같는다.b. 그 함수 값은 하나이다.라는 두가지를 만족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 여호와 혹은 예수 [본문으로]
  4. 이 코기토라 볼 수 있다. [본문으로]
  5. 이는 머리말에서 상세히 기록했다. 몇 개의 반박을 제외하고는 의미 없는 것이라 일축했고, 의이 있었던 반박에 대해서는 곤욕스럽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본문으로]
  6. 데카르트가 기본적으로 같은 공리적인 생각이다. [본문으로]
  7. 이 부분에 대해서는 @HansHoon의 글에서 접할 수 있다. [본문으로]
  8.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조밀성이다. 특히 연속적인 사고에서 보면 인간의 사유를 조밀하게 볼 수도 있다. [본문으로]
  9. 이를 조밀하다 한다. [본문으로]
  10. 우리나라 말로는 가산이라 하고, 순서대로 셈이 가능 한 것을 말한다. 정확한 정의는 유한이거나 자연수와 동일한 개수이다. 영어 표현이 더 확실하게 느껴지므로 영어로 표기했다. [본문으로]
  11. countable의 반대말로, 순서로 표현할 수 없는 수들을 말하는 데 유한과 자연수와 동일한 것을 제외한 무한이다. [본문으로]
  12. 연산 자체는 함수로 정의된다. [본문으로]
  13. 사상과 군론등을 미리 알아야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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