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영화에서 무의미한 피가 낭자하는 영화는 조금 꺼려진다.
누구의 피인지도 모른채 붉은 액체제 쓰러져가는 희생자나,
지극히 정상적인 부하라도,
멋진 액션 뒤에 총성에 혹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을 것 같은 멋진 검이..
통성명도 못한 이를 무너뜨릴때, 과연 죽음 맞이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지 항상 의심이 든다.
(나는 이래가지고 호러에 영감을 얻는 일은 나에겐 좀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입장에서의
아저씨..
복수의 날이 선 아저씨..
그리고 복수의 방법 또한 날이 서있는 행보.

사실 예고편을 보고 영화의 맥은 이미 눈에 익은 드라마와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영화관을 찾았고 별 고민없이 영화를 골랐다

쟁점이 점점 멀어지는 거 같다.. ^^ㅋ
(스포일러는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마음 다잡고 몇 단어의 연속으로 아저씨를 다시 이야기 하자.

--------------------------불행-----------------------------

영화의 막이 오르면
불안한 선위의 그리고 다소 친근한 에피소드의 계속이다.
평행선 같던 일상은 어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특수한 라인속에 처하게 되고
주인공에게 우연같은 필연의 끈에 묶이고 만다.

"불행"
1. 행복하지 아니함
2. 행복하지 아니한 일, 혹은 운수..

어쩜 휘말릴 필요가 없었고, 아무 책임도 없었을 텐데.
일상은 행복하지 아니한 운수를 몰고온다.

<운수의 일부인 불행은 아이러니 하게 필연으로 다가오고 만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느끼는 불행은
어떤 필연의 바다에서 쓸려내려오는 부산물이다.
이점이 참으로 불행한 것이다.

차태식도 마찬가지, 다르지 않다.
아저씨는 불행에서 시작한다.

--------------------------고행-----------------------------

불행의 시작은 고행을 낳는다.
가시밭길이라 하는것이 좋을지, 미로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나도 건전한 표현을 찾기는 어렵다.

확실한 것은
<이 불행은 고행을 낳는다.>
분명 걷고 싶은 길은 아니나 외길로 이어지는
고행을 피할 수는 없다.

차태식속의 무표정, 특히 눈에는 이 고행이 보인다.
순례자의 가시밭길을 걷는 뜨거운 발 위의 엄숙함 처럼 그는 의연하고 차갑다.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많은 이들은
차태식의 고행속을 걷는 눈을 보았으리라 믿는다.

더 중요한 것은 관객의 의식속에서 차태식의
고행(苦行 : 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통해 수행을 쌓는일)은
다른 의미의 고행(高行 : 고상하고 뛰어난 행동)으로 수렴된다.

나.. 또는 관객이 고행(苦行)을 고행(高行)으로 승화시킨 원동력이 무엇인가.

--------------------------복수-----------------------------

그것은 아저씨, 즉 차태석의 복수을 인정함에 있다.
부도덕한 인간과 그에 상처받은 인간을 가르고
힘없는 인간위에 서서 그는 반란을 일으켜 복수를 일으키는데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이다.

복수 : 원수를 값는 일이다.

모든 인과는 이제 원수를 값아준다는 복수에서 시작된다.
내가 불행했기에 고행을 함에 있어 가장 큰 요소가 바로 이것이다.

복수를 한다는 것은


원수가 있고 그 원수와의 필연의 인과가 있고
그 인과에 대한 피드백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저씨는 어떤 원수와 어떤 필연을 가지고
어떤 피드백을 주려한것일까?

아저씨, 그는 왜 복수를 택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의 복수에 왜 열광하는가.


----------------------열광 그리고-------------------------

우리는 아저씨에 열광한다.
(뭐 그냥 얼굴에도 열광하지만....)
특히 아저씨의 복수에 열광한다.

우리는 복수에 필요한 원수를 두지 않았고
의자에 앉은채 스크린을 봄에도 아저씨에 긍정한다.
아마도 우리는 스크린속 부조리안 현실에
우리가 흥분하고 있었던 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가 <아저씨>인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외롭다.
차태식의 외로움을 보며 우리 스스로 자신이 아저씨임을 공감한다



"아저씨"
사실 이 단어는 긍정적이지는 않다.
우리가 느끼는 현실속 에서는 아저씨는 그저 힘없는 존재이며
순수의 세대에서 천천히 벗어나는 객체이다.
묵묵히 잊혀져가는 외로운 존재..
극속의 차태식의 외로움은 왠지 실재의 아저씨와 유사하다.



실제의 삶에서 우리는 잊혀져간다.
잊혀짐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하는 존재..
그 존재의 상실은 아저씨의 복수를 정당화 한다.

우린 불행에 혹은 필연의 고행에 존재를 빼앗김에
슬퍼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저씨" 차태호에 공감할지도 모른다.

이에
차태식은 <현실 속 아저씨>의 불행을 짊어진다.
그리고 복수를 꿈꾼다.
아저씨, 그는 우리는 위해 복수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응원했다.


개인적으로 [파괴된 사나이]과의 가장 큰 차이는
인물에 대한 이질감으로 느껴진다.
파괴된 사나이의 주인공에게는 내가 전혀 개입되지 못한다.
또한 [시티오브갓] 처럼 인과없는 살상 또한 아니다

조금은 아저씨가 더 영화로 와닿는 이유인거 같다.

단점?.. 음..
사실 영화를 보며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차태식이다.(원빈이 아니라)
차태식이라 인물 설정에 약간의 무리수가 아니였나 싶다.

하지만 그 차태식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아저씨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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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으로 보는 두번째 이야기 "복제"

아무리 봐도 인셥션의 이야기 자체보다는 영화가 그리는 공간 체계에서 아름다움을 느껴지며
여러 인식의 층을 놓고 그 층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의미에 맞춘 공간이 펼쳐진다.
사실 수학쟁이라 보니 인문학이나 철학에는 영 문외하지만
내가 참 좋아라 하는 중권이형(진중권님께서 이렇게 불리길 좋아하신다니..)의 책을 읽으면서
인셉션을 한번 재구성 해볼까 한다.

기본적으로 각 인식의 층은 그 전층의 복사품이다.
아니 기본적으로 우리의 세상도 실제의 복사품이다..
이렇게 복제의 복제를 거듭하는 것을 "시뮬라크르"라고 한다

이런 복사에 관한 이야기를 중권이형의 책에서 본 떠 오자면

****시뮬라크르의 단계****
1. 실재의 반영
2. 실재를 변질
3. 실재의 부재를 감춤
4. 실재와 관계 맺지 않음
5. 자기 자신이 순수한 시뮬라크르

사실 이 이야기를 함수처럼 잇는 일은 나의 자의적인 생각뿐이니..=_=
(함수질 하는 것이 저의 일이라^^;)
(이것 또한 시뮬라크르이니라..=_=ㅋ)


-------------< 1. 현  실 = 실재의 반영>---------------

인셉션의 기본적인 무대는 꿈 혹은 뇌의 전기 신호속 세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가
실재한다는 현실은 받아들이는 우리의 뇌는 이미 오감 또는 육감으로 받아들여지는 전기적신호로의
복제이다.

우리는 실재 앞에서 복제를 느끼고 살고있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인식에 의존하고 있는지는
심심풀이로 올라오는 같은 길이의 선이 다르게 보이거나
멈춰있는 그림에 움직임을 느낀다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즉 우리의 실재는 시뮬라크르1단계 실재의 반영속에서 살 고 있는 것이다.

-------------< 2. 도시에서의 시가전 = 실재의 변질>---------------

꿈속에 들어간 우리 디카프리오와 용자들!
부드럽게 공항도착부터 시작된 계획된 일정 속에서
우리는 느닷없는 기차와(뭐 나중에 왜 기차인지 나오지만ㅋ) 방해하는 아저씨들을 만난다.
모냥새는 아직 실재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뇌로 복제했던 세상이지만 실재에서 느끼지 못하는 변질이 생겨난다.

좀 더 전에 설계자의 양육과정에서 계속 오르기만 하는 계단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나타난 실재의 변질은 인식의 변질을 나타내는데 실재 계획의 도시 시자전도 마찬가지이다.
복제된 도시는 선로 없이 관통하는 기차와  무작정 공격하는 존재가 등장한다..
계속 오르는 계단 처럼 어떠한 인과관계없이 일어나는 그 곳에는 이미 실재와 다른 길이 시작된다.

즉 꿈속의 그곳에서는 변질된 실재의 미로가 시작된다

-------------< 3. 호텔에서의 추격전 = 실재의 부재를 감춤>---------------

미로속으로 들어온 인식체는 호텔에서의 새 삶을 시작한다.
영화속에서 이 한마디
"잘 생각해봐... 항상 꿈은 처음이아닌 중간부터시작하잖아? 우리가 이카페에 어떻게 왔지? "
우리는 인과관계를 잊은 세번째층에서는 시작자체가 생략된다.
이미 실재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영화의 인셉션 대상에게 "찰스"는 지금 당신이 보는 것은 꿈임을 강조하며 다가온다.
레오나르도는 대상에게 현재 실재가 아님을 고하면서 더 깊이 대상을 지배한다.

이미 실재를 부정하며 다가서는 이곳에서 복제는 다시 시작된다.


-------------< 4. 설원을 가로지르는 전쟁 = 실재와 관계 맺지 않음>---------------

다시 들어온 꿈속의 꿈
이미 상황은 이미 실재와 멀어지고 있다.
전쟁은 하얀 설원을 가른다. 마치 현실은 이미 지워진 것같이...

숱한 총성들과 위기는 있어야 하는 원인과 전혀 상관없이 목적에만 따른다.
실재도 사라지고 이제는 목적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전부가 된것이이다.
신기한것 하나.. 나는 총성속에서 한편의 액션 영화를 꿈꾼다.

극의 긴장감은 인셉션을 향한 행보는 부드러운 비행기와는 이미 헤어졌다.

-------------< 5. 림보의 세계 : 자기 자신이 순수한 시뮬라크르>---------------

빠지면 여간해서 나오기 힘든 그곳...
림보에 빠진다는 그것,.. 무의식의 깊은 곳..

이곳 또한 시뮬라크르이다.
코브의 림보를 보면 과거의 기억과 또한 미래에 대한 복제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이곳은 인셉션 목적 또한 사라진 지역이다.
자신만의 세계이며 더이상 실재라는 개념은 없다.

림보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며 순수한 공간으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순수한 시뮬라크르세상에서 다시 꿈을 실현한다..


-------------<토템.. 복제를 구별하다?>---------------

극의 마지막 토템의 결과에 모든 관객들은 탄식했다.

그 결과가 어쨋든 토템은 현실과 시뮬라크르의 구별에 쓰이는 유일한 기준으로
자신만의 법칙을 마련한다.
하지만 기억하는 가
극의 코브는 설계자 애리어드니에게 토템의 비밀은 풀어 놓는다.
이 장면은 이미 결론의 무의미성을 예고한다
설계자가 토템까지 설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토템이 설계된 림보의 세계는 이미 순수한 시뮬라크르 즉, 또 하나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토템의 결과가 어떠하든

코브는 현실에 서있는 것이다.

모르는가...
계속 오르는 계단
혹시 우리가 오르는 실재라는 계단 뒤에는 복제가 아닐가?

그렇다면 이미 우리의 판단, 토템 또한 복제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가 꿈을 꾸는 동안은 그것은 진짜같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그것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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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 의식과 무의식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건너다..

사실 이 영화를 선택해서 본 이유는 다른 것이 없다.
본인은 예고편에 한번도 집중한 적 없고 인셉션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었다.
단지 이 영화를 보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는
다크나이트의 스캐일과 매트릭스의 미래가 만났다...는..
너무 자신감 넘치는(혹은 자만스런) 타이틀은 붙였다는 것과 언뜻 보던 포스터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중년 모습을 느꼈기 때문이다.

뭐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다크나이트보다 한층 좋아진 영상미는 인정하나
이 영화는 매트릭스의 미래라고는 할 수는 없다.
그저 인셉션이라는 또 다른 길을 열어주었다.

인셉션의 새로운 길에 두가지를 말하고 싶다.

part 1. 의식과 무의식

-------------------- 무의식 --------------------------
우리의 무의식 즉 프로이트이론으로 보자면 id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본능에 길들여진 본성이라 할 수 있다.
보통의 인간의 본능이나 감정의 원천으로 체계적이거나 논리적이지는 않는다.
다만 id의 생성은 기본적인 인간 DNA에서 유전된 원천자에
유아기때부터 습득된 경험에 영향이 섞인 아주 특이한 존재이다.

즉,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자극으로 부터 생겨난 카오스..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간의 무의식 id이다.

-------------------- 의  식 ---------------------------
ego. 자신의 거울이며 자신이고 싶은 존재이다.
id의 겉모습 역활을 하고 있으며 자신이 되고 싶은 존재이다.
언제나 드러남과 숨겨짐 사이에서 항상 합의의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닥치는대로 먹지 않으며 합의된 먹이에는 사정없는 호랑이의 이빨 역활을 한다.

즉 자신을 체계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장치로 논리를 느끼고 제어하는 자신의 자유의지...
평가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간의 의식 ego

-------------------  super-ego -----------------------
super-ego. 자신에 대한 ego의 합의를 견제하는 사회적인 자아이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지만 super-ego의 앞에서 또 한번의 합의를 거친다.
아이러니하게 super-ego의 과정은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가깝다.
ego의 합의에 압력을 넣는 존재로 학습되는 자아에
무의식적으로 옳다고 믿는 가치를 생성한다.

즉, 논리와 체계 혹은 사회 그 자체이나 자아의 협박자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마지막 협의자 super-ego


---------------------id와 ego의 아슬아슬한 경계-----------------------------

인셉션을 위한 특공대는 ego와 id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며
super-ego와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다.

기본적으로 id는 변화를 싫어한다. 자아의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며
만족을 주는 목표를 제시한다.

하지만 id의 카오스를 함부로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ego에 왜곡된 id의 만족을 내세워 왜곡된 합의를 도출시키기>
로 인셉션의 목표를 둔다.

사실 만약 정말 id의 세계를 제대로 그려냈다면
보는 것보다 더 변화무쌍하며 잔혹하고 본능적이였을 것이다..(12세임에 만족..)

여튼 영화에서 <림보>라 부르는 무의식 상태에 대한 두려움
그게 바로 id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super-ego의 아쉬움-------------------------

super-ego의 존재를 삽입하였으면 어땠을까 한다.
사실 꿈 속에서의 파수꾼들을 보면서 이들이 super-ego일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수련을 통한 방어라는 조금은 급조된 영역은 super-ego의 몫으로 남겨두었을면 어땠을까?
사실 꿈속의 파수꾼들과 닮은 점이 많다.

ego의 비정상적인 합의나 행동을 제어해주는 역활
그리고 그것이 학습의 효과이지만 자신의 의식과는 무관히 움직이는 것
또 새로 주입되는 이상에대한 반발!
이것이 바로 super-ego의 역활아니던가

본인은 수련을 통한 super-ego의 강화라고 위기를 지칭했다면 더욱 만족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했다


의식와 무의식의 아슬아슬한 공간속에서 수련된 파수꾼들(혹은 super-ego)를 피해
무의식의 새로운(혹은 변조한)메세지를 의식에 전달해
자신의 원하는 합의를 도출하기

인셉션..

그 안에 담긴 깊이에 나의 2시간 30분을 아낌없이 적는다.

(다음은 복제된 공간에서의 복제...란 개념으로 접근해 보겠다.)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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