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빌려간 돈


우리가 하나의 상황을 상상합시다.

어느날 가장 친한 친구가 급한 곳에 쓰겠다며 100만원을 빌리고 싶어합니다.

사실 그 100만원이 당신에게도 큰 돈이라서

살짝 고민은 되었지만 친구의 상황을 알기에 빌려주었죠.


하지만 어느날에서부터 그 친구가 당신을 피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고

점점 친구와의 만남이 뜸해집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친구에게 괴씸한 마음을 갖게 되어

화가나서 그 친구집에 찾아가 빌려간 100만원에 대해서 독촉을 했고

결국 친구는 100만원을 바로 입금해주었습니다.


당신의 돈을 빌려주었다면?


이렇게 진행된 지금, 친구와의 채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 자연스럽게 답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0'원 입니다.


분명 더 이상 채무의 의미가 없는 '0'원이지만

왠지 마음 한켠이 생각보다 자연스럽지 않은 '0'원 이죠.


0이라 함은 그저 "없다"라는 간단한 의미일까요?


이제 그 답을 알기 위해서

'0'의 기원부터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수 '공(空)의 상징 0'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0'이란 것의 기원은 여러 초기 문명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숫자적 기호의 '0'의 기원은 보통

기원전 876년 인도의 명서법이란 책에서 힌두어 sunya란 단어로 쓰인것으로 유래 되었는데

'sunya'는 '비었다'는 뜻으로 이로서 이 당시의 '0'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최초의 '0'의 기원은 '공(空)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우리가 이런 공(空)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을 까요?


저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0'은 공(空)의 상징이였다.


간략히 보자면 공의 의미 '0'은 집합의 공집합과 유사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때 재미있는 사실은 공집합이란 원소가 없는 집합을 뜻하지만

그 공집합이란 것이 그냥 비어있다는 '단' 하나의 정해진 정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직선 위의 (1,2)이란 곳을 보면

분명 이 구간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수로 꽉 차있지만


분명하게 위 구간은 자연수의 집합 N에서 공집합이 되고

실수의 집합에서는 공집합이 아닌게 됩니다.


이렇게 (1, 2)라는 구간이라는

같은 모양이더라도 그 전체집합의 정의에 따라서 '공'과 '공이 아닌 것'이 동시에 되는 것이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비어있다는 것은 어러 얼굴로 나타난나는 것입니다.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여기서는 없을 수도 있고 저기서는 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비어있는 것을 기준으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생성합니다.

이미 채워진 곳은 새것을 만들 수 없습니다.

즉 (1, 2)가 자연수에서는 공집합이지만 이 곳에 수많은 이론을 통해

유리수로 그리고 실수로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복소수 입니다.

복소수는 우리가 쓰는 수에다 허수라는 가짜 수를 만듭니다.

이는 단 하나의 정의가 추가 되는데 그것은 바로 허수 i입니다.

정확한 정의는 아래와 같습니다.


어떤 것을 제곱하여 -1을 만드는 수 : i


우리가 알고있는 수는(실수) 절대로 제곱을 하면 음수가 나올 수 없습니다.

당연히 제곱해서 음수가 나오는 집합은 우리의 수에서는 공집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새롭게 하나의 세계를 생성하면서 수많은 문제와 현상을 설명하는

복소수 체계가 생기게 됩니다.(자세한 것은 다른 글로 대체하겠습니다.)



이제 조금 비약해 보자면


비어있다는 '공(空)'의 의미는 비었다기 보다 오히려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곳으로



또하나의 채워짐을 위한 공간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공(空)의 0'은 단순한 수가 아니다.

비어있는 곳을 비어있지 않은 곳으로 채워야 하는 철학적으로 쉽지 않은 개념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인한 것인지, 자연스럽지 않은 0은 자연수란 집합에서 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당신과 친구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채무라는 관계하에서

당신과 친구는 빌린 돈의 값 의미있는 공(空)의 값 '0'인 채무를 갖습니다.

하지만 전혀 허무의 상징 이라기 보다 무엇인가 꺼림찍한 마음이 담겨있는 '0'원이 됩니다.




통로의 상징, 대수의 '0'



처음에 생각한 '0'은 단순히 채무의 현재값이 아닐 것입이다.

분명 머리속에서 모종의 과정이 계산을 거쳐 생겨나는데 그 식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100만원(빌려준 돈) - 100만원(받은 돈) = 0(채무의 값)

대부분 이런 과정으로 이끌어낸 '0'일 것입니다.


같은 '0'이란 것이지만 위에서 말한 공(空)의 값이 아닌 덧셈과 뺄셈을 위한

즉, 대수의 영역에서의 '0'으로

(중고등학교때 배운 개념을 들고 들어오자면)

여기서 '0'은 대수에서 "덧셈에 대한 항등원"이 된다.



우리는 이미 많은 수학과 산수교육으로 인해

'0'을 더하면 그 수가 그대로 나옴을 알 수 있는데

덧셈 계산체계의 균형은 '0'이 유일하다


이런 수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의 의미있는 산술체계(기본적으로 Group이)라면 이런 '0'의 존재는 유일합니다.

이런 것을 항등원의 유일성이라 합니다.


또한 '0'이 없다면 우리는 뺄셈이란 것을 수학적으로 도입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쉽게 설명하는 것은 원래의 갯수나 양에 일정량을 빼는 것으로 생각하나

수학적으론 '0'을 통한 음수가 생겨났기 때문에 생겨난 연산이 바로 뺄셈입니다.


직관적으로 계산이야 '0'이 없이 할 수 있지만 그 한계는 분명하고,

우리가 음수를 이야기 하는 것은 '0'이라는 항등원이 있어야 생각이 되는 개념들이죠.


조금 자세히 말하면

1은 -1과, 2는 -2와 짝이 되는 관계가 하나씩 있습니다.

각각 쌍끼리 더하면 되면 '0'이 되는데

이렇게 더해서 '0'이 되는 두 수의 관계를 "역원"이라 한다.

이런 수들의 모임이 바로 음수입니다.

(역원 또한 중고등학교때 배웠으나 다시 뜻을 아래에 접어놓았습니다.)


이제 뺄셈의 연산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5 - 3 이란 뺄셈의 원래 의미는 "5에다가 3의 역원을 더해라." 란 것이고

(수식으로 말하자면 5 + (-3))

이 역원이라는 관계들이 모여서 제대로된 뺄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시의 기준은 바로 '0'이죠.


그렇게 생겨난 '0'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역원인 수들이 줄을 서게 되고

그 수들은 결국 다시 '0'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리되니 '0'은 하나의 의미있는 통로이며

각 역원들이 한데 응축되어있고 생성되는 하나의 창입니다.




'0'에서 느끼는 우연하고 오묘한 이야기


캠벨의 '신화의 힘'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렵생활의 시절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면

죽음 뒤의 세상은 아무것도 없는 '공(空)'라 생각을 했고

그러기에 그들은 죽음 이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죽음 뒤에는 어떤 것도 없이 장렬히 사라지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그러기에 그들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비워진다는 공(空)의 상징 '0'과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인간이 정착을 하고 농경생활을 시작하는데

매년 작물이 열매를 맺고 죽어가더라도 그 다음해에 다시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이미지가 바뀝니다.

식물이 죽어 씨앗을 남기고 그 씨앗이 다시 새로운 생명을 끌어올리는 장면이

바로 죽음이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인 개념이 되죠.

또한 지금이라는 이 순간이 과거과 현재의 통로이고

지금 생 이전과 이후를 생각하고 고민이 들어섭니다.

왜인지 그들의 죽음은 대수적인 수 '0'과 비슷합니다.

모두다 사라지나 지나가는 통로요 새로 나는 생명력의 길,


'공(空)의 0'과 대수의 '0', 서로 다르지만 왠지 모르게 닮았다.


이 두가지의 이야기가 과연 두가지 의미의 '0'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논리적으로 증명하라면
나는 웃으며 이렇게 밖에 이야기 못할 것입니다.

'이것 참 우연고도 오묘하군요'


다른 이야기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예로 부터 '0'을 무(無)로 썼습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의 생각에 다른 의미의 '0'이 생겼는데 바로 공(空)으로 쓰였습니다,

공(空)에 대한 의미는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점이 되는 용어로(자세한 의미는 여기 클릭)

재미있게도 '0'과 같은 인도어 sunya란 단어에서 유래된 개념이이념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즉 '정적인 없음'이 아닌 곧 채워질 공간인 공(空) '0'과 유사하죠.


그리고 기독교의 예수는 씨앗이 되어 썩고 죽어서 새로운 생명이 되라고 했습니다.

예수 자신도 구원이라는 생명의 씨앗이되기위해 자신의 신체를 죽음으로 몰고갔고

결국에는 다시 부활이라는 순환을 통해서 '다시 삶'이라는 이론적 근거를 마무리했죠.

여기서 느껴지는 생각은 불교의 그것과는 약간 다른 대수적인 '0'을 느끼게 됩니다.



'0'을 맞이하며


0은 가장 가벼운 수이지만

동시게 가장 많은 것이 들어있는 무거운 수입니다.

여담이지만

공집합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고

또 '0' 단 하나로 의미있는 대수적체계(group)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홀로서기가 가능하고 무슨 의미도 담아낼 수 있는 수 이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완벽함의 상징인 원을

'0'에게 선사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완벽함의 상징인 원으로 0을 쓰는 것은 우연일까?



그 외에도 의미를 갖는 수는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되어지지만

그래도 0만큼 나에게 긴 이야기의 친구가 될 수는 많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나는 내 문제의 답에 '0'이 나오면

왠지 뿌듯합니다.

동감한다면 이 또한 '0의 우연하고 오묘한 마법'일것입니다.


여담 : 그렇다고 그 답이 맞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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