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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가장 간편한 것은 집합론입니다. 사실 집합론 자체가 무한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집합론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유한집합을 먼저 인식하지만 정의만큼은 무한집합으로 시작합니다.

 

자세히 말하면, 자기 자신과는 다르지만 자신 안에서 자신과 개수가 똑같은 집합을 고르는 작업이 가능하면 무한집합이라고 합니다. 아래 그림으로 보면 조금 더 확실한 무한 집합이 보이게 될 것 같습니다. 무한집합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연수이죠. 자연수는 자신의 부분집합인 짝수와 개수가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로)

 

집합론적인 무한은 자신의 안에 자기와 같은 개수의 집합을 담는 것 입니다. (플리커 h.koppdelaney님의 사진)

하지만 이런 엄격한 것으로 무한을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느끼는 무한은 큰 수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큰 수인 무한을 다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4. 무한의 이미지

 

실재로 학생들에게 무한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말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큰 수입니다. 무엇보다도 크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런 것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자랑하기'의 한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구슬이(뭔 요새로 따지자면 빨간 물약정도겠죠.) 100개 있어~ 나는 1000개! 그다음 나올 만한 것은 역시 '무한개'입니다. 즉 어떤 것이 무한개 있다는 것에 대한 가장 큰 이미지는 큰 수입니다.

 

이런 자연스런 이미지처럼 만약 무한에게 순서를 주게 된다면 아마 무한은 맨 뒷줄일 것입니다. 이런 이미지의 무한은 참으로 편합니다. 왕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만약 은행에서 번호표를 기다린다면 무한 번은 은행원의 얼굴도 맞이할 수 없다는 약간의 불편함은 있습니다.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한다면 무한의 자리는 여기에 없습니다.


 

이것에서 집합론에서 다루는 엄격한 무한보다 보다 정겨운 무한을 만날 수 있습니다. 훨씬 이미지에 와 닿습니다. 전통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것으로 우리는 무한을 포장할 수 있습니다. '어떤 수보다도 큰 수'라는 당연한 이미지를 통해 말입니다.

 

즉, 무한은 모든 큰 수 보다 큽니다.

 

 


5. 큰 것보다 큰 것, 무한

 

그럼 무한을 표현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무한은 누구보다도 큰 '레전드 수'인 것입니다. 하지만 항상 이런 것을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학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실수 M을 아무리 잡아보아도, 무한은 M보다도 크다.'

 

이렇게 표현한다면 우리가 무한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다룰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지 못한 곳으로 많은 것들을 보낼 수 있습니다. 가장 엄격해야할 무한이지만 어쩜 가장 두루뭉술한 방법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 자체가 엄격한 무한으로 다가가는 첫 번째 발걸음인 것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죽는 어느것보다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플리커 Super Mega Action Plus님의 사진)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만약 이 한국에서 무한대로 사는 사람‘X’가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사람들이 죽어서 어느 곳에 모여 이야기 할 때 한 영혼이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내가 31415년에 죽을 때, X가 나의 곁을 지켜주었지.’ 그럼 옆에 있던 한 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할아버지 저는 271828년에 죽을 때에도 X가 지켜주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끊이지 않고 어떤 사람이 나와도 X가 자신의 마지막의 자리를 지켜준 것입니다. 자꾸 영혼이 새로 올라와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한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X가 영원히 사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X의 정확한 나이를 말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6. 무한을 다루는 단서

 

그럼 우리는 이로써 하나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한을 표현하는데 있어 그냥 큰 수라고 말한다면 무한에게 주어진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수보다도 큰 수라고 표현한다면 많은 부분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무한에 대한 추측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정리하자면 ‘무한대는 정말 크다.’라는 말을 하고플 때, ‘X가 무한이라면 어떤 수 M을 잡아도 M<X 이다.’ 라고 쓴다면 다룰 수 없는 X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재미있는 문제를 보면, 우리가 흔히 쓰는 ‘자연수의 집합’이 무한하게 커진 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까요? 1+1=2라는 것만큼 이 문제는 아리송합니다.

 

다음 글은 이 문제를 통해서 우리가 무한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서 극한을 이해할 수 있는 시작점을 삼겠습니다.


자연수의 집합이 무한한 값을 갖는 다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플리커 THEfunkyman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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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자체를 워낙 힘들어하는 성격 탓에 밤 10시에 하는 드라마타임을 지키지 않습니다. 때문에 유행의 중심에 서는 드라마 들은 한창 뜨고 난 다음에 아는 편이죠. 최고의 사랑이 그랬고 오늘 이야기 할 뿌리 깊은 나무도 그렇습니다. 늦었지만 뿌리 깊은 나무를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참 이런 왕이 있다면입니다.

  하지만 지금 드라마의 전체 스토리를 적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1022일 뿌리 깊은 나무의 마지막 편을 감상하면서 하루에 있었던 많은 생각들(특히 나꼼수의 정봉주 깔때기가 진짜 깔때기로 변하는 사건에 대한 사건)을 마무리 해주는 묘한 생각 덕에 키보드를 두들깁니다.

  

1. 세종대왕 이도와 밀본 정기준의 마지막 대화

  만약 정기준이 (슈욱 하는) 화살을 맞고 그 자리에서 객사하며 호위무사의 품에 안긴 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자신의 지난 일을 반성하며 착하게 살자.’하면서 마무리 되었다면 이 시간에 그저 밥 메뉴 걱정이나 하고 있지 않을 까 합니다. 참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이렇게 그냥 죽지 않아서.


 여튼 부상을 당한 밀본 수장 정기준은 비밀 통로를 이용해 궁 안 왕의 의자에 앉습니다. 또 그곳에서 세종대왕 이도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정기준 앞에서 왕의 첫마디는 당신 덕에 백성을 사랑할 수 있었다.’ 고백합니다. 당연히 정기준이 왕의 품에 안겨 사랑의 눈빛을 주고받는 본격적 멜로 막장이 아닌 이상 이 대화의 시작에서 무겁게 느껴지는 주제감은 극을 더 극적으로 만듭니다.


멜로는 이래야 제맛.


(아래 접어놓은 내용은 이도와 정기준의 마지막 대화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의 줄거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정기준이 한글의 반포를 막으려는 세력임을 그리고 왕 이도는 한글을 어떻게든 반포하려는 두 세력의 역사를 한 대화에 압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다소 극의 마지막이 칼부림과 피바람으로 약간 어색해지기도 했지만 이 드라마가 설정해 놓은 절정의 해소는 조용하고 어두컴컴한 궁의 한 곳에의 두남자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의 장을 그리고 그 내용을 곱씹어보고 싶었습니다.

   


2. 확대해석1 - 정기준이 왕의 자리에, 왕은 그 아래에 있었다.

  이 절정의 마무리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무엇보다 이도와 정기준의 위치 선정입니다. 왕인 이도는 아래에 서있습니다. 무엇인가 알고 쫒아 온 것처럼. 그리고 신하인 정기준은 왕의 자리에 있습니다. 권력의 기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바뀌어 있습니다. 역적이 왕의 자리에 앉아있고 왕이 그 자리로 들어옵니다.

  단지 극의 줄거리 상 정기준이 먼저 그 장소에 입장했기에 왕의 자리에 앉힐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자리는 권력의 상징입니다. 심지어는 정치에서 어떤 발표자를 둘러싼 위치만 에둘러 보더라도 그 권력 구조를 셈할 수 있을 정도이니까요.

  정기준이 갖는 마지막 죽음의 장소는 왕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를 질책하는 왕은 아래에 있습니다. 극을 처음부터 시청했던 사람이라면 이 자리배치는 당연한 것입니다. 극 내내 왕은 그 자리에 편안히 앉을 수 없었죠. 오히려 백정의 의자에 앉은 정기준이 더 왕 같은 권력을 행사합니다.

정기준은 왕의 자리에서 왕을 맞이합니다.


  그리기에 마지막 그 궁 안의 마지막 방이란 장소는 오히려 더 현실적입니다. 권력의 중심이 왕의 자리에, 그리고 그 자리의 원래 주인인 왕이 서있는 모습으로 반영된다고 봅니다. 동시에 그 장소는 조금 더 희망이 반영된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가짜이지만 힘을 휘두르는 권력자는 죽고 약하지만 진짜인 권력자(이도)는 제자리를 찾습니다.

  2011. 지금 어떤가요. 헌법상 왕인 국민이 헌법상 권력의 자리에 앉아있나요?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그 시간 혹은 그 장소가 있을까요? 전 있다고 봅니다. .

분명 이 희망의 장소는 언제든 도래합니다.


   

3. 확대해석2 - 권력자의 변명과 왕의 귀환

  백성의 왕, 혹은 헌법상 왕과 권력자와의 쓰라린 대화를 보면 그 희망의 시간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정기준이 이도에게 내뱉는 대화 중에서 한글을 통해 백성들은 더 속을 것이라 경고합니다. 결국 속아 이용당하는 말 알아듣는 개새끼로 백성을 비유합니다. 아무리 지혜를 갖더라도 결국 선동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왕의 반론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어떨 때는 이기고 어떨 때는 속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지기도 하겠지

지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역사니까 또 지더라도 괜찮다. 수많은 왕족과

지배층이 명멸했으나 내 백성들은 이 땅에서 수 만년 동안 살아 왔으니까

또 싸우면. 되니까.

-세종대왕 이도 in 뿌리깊은나무-


  ‘또 싸우면 된다.’는 이도의 결론은 참으로 생각을 많이 하는 부분입니다.

  이때 드는 생각은 뿌리 깊은 나무에서의 한글‘SNS’혹은 진실이란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 이는 상당히 재미있는 대응이 나옵니다.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트위터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조선의 한글이 반포된 것과 같은 엄청난 전파 속도와 정보력을 제공합니다. 그 무서움은 정기준, 즉 권력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정치적인 판결로 유죄가 되었다는 의견이 SNS로 퍼지고 있습니다.


  특히 22일은 BBK스나이퍼라는 정봉주의 구속 확정 판결이 난 날입니다. 억울한 판결이야 언제든 법조계의 문제였지만, 오늘은 그 이전과는 다른 움직임이 보입니다. 바로 트위터-페이스북등 SNS의 힘입니다. 그들은 징역 1년의 사건에 분노하고 기억을 다짐합니다. 약자의 논리로 잊혀지며 끝났던 지난 사건들과 다르게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현실이 이제는 세상으로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되고 있습니다.

  '개인은 영리하나 집단은 우매하다.'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권력이 갖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한글을 통해서 먹통인 백성이 말하는 백성이 되었고, 정치 관심없던 집단을 표현하고 분출하는 SNS 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리한 집단의 시작입니다.

  또한 일전에 보수언론에서 트위터와 나꼼수를 괴담의 근거지라고 했습니다. 그말이 일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현실에서도 어떤 의도속에 속는 일 많죠.(문제는 그 가해자가 권력층이란 것이 문제이고요. 댓글 알바같은) 그렇기에 정기준은 한글로 인해 백성들을 기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경고합니다. 지배층의 변명은 동일합니다. 그런 현실에 당당히 헌법상 왕으로써 대처할 수 있는 대답이 바로 이도가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아도 좋습니다. 져도 괜찮습니다. 이것이 역사이고 또 싸우면 됩니다.

그럼 정기준이 왕의 자리에 있더라도 그 앞에서 당당한 이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의의 최후를 맞이하는 희망의 방이 곧 열리겠죠.

당당한 이도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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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주변인들에게 문의를 받는 수학 문제 중 하나가  "0.9999······=1"이라는 것입니다. 9가 한없이 이어지는 이 수가 과연 1과 동일한 것인지에 대한 것은 논란이 많죠. 분명히 모양이 다른 두 개의 값이 같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것은 1/2=2/4와 같이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 혹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확연하게 다른, 특히 1이 더 큰 수로 보이는 이 명제는 많은 이에게 의심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없이 이어지는 수의 값은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이를 쉽게 증명하는 이는 보통 “1/3 = 0.333······이므로 양변에 3을 곱하면 0.9999······=1이다.”라고 증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하게 증명하지 못한 하나가 남습니다. 그럼 정말 ‘1/3 = 0.333······’인지 말입니다. 적어도 무한번 나눗셈이 가능한지 부터가 문제이죠. 그렇기에 이 증명법은 단지 문제의 어려운 것을 잘 감추어 놓은 것[각주:1]뿐입니다.

1. ‘무한’의 덫

 위의 이야기에는 중요한 단어를 뽑아 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없이’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일상에서 수도 없이 써온 말입니다.(방금도 ‘한없이’의 비슷한 표현인 ‘수도 없이’가 나왔죠.) 우리는 이 말을 일단 ‘무한’이라고 합니다.(무한 = 한이 없다.) 같은 말이지만 왠지 ‘무한’이 더 간지 납니다.

 물론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한의 뜻과 느낌을 알고 있습니다. 해가 지는 바다 끝 수평선에서 상상되지도 않는 거리의 별에서 그리고 남은 제대 날짜 앞에서. 하지만 이 모든 예는 사실 ‘한없이’가 아닙니다. 수평선의 끝엔 아메리카가 있었고, 국방부 시계는 지금도 제대를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가 끝도 없다는 뜻으로 ‘한없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재로 그 단어를 접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제대를 위한 국방부의 시계도 결국 유한입니다.




 그렇기에 막상 ‘무한’을 맞이하면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많습니다. 0.9<1 이고 0.99<1 이며 0.9999999<1 인데, 유독 무한이라는 단어가 접해지는 ‘0.9999·····’은 1과 값이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무한에서 마라토너는 거북이 랑의 달리기경주[각주:2] 에서 전혀 이길 수 없는 것 같은 그런 환상도 제공하기도 합니다.(이 이야기는 이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무한을 말하는 법

 그럼 무한을 수학적으로 정확히 정해지고 싶어집니다. 물론 그 과정은 상당히 중요한 과정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무한 = 유한이 아니다.’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는 정의는 지금 다룰 필요성이 적어 다른 글의 링크로 대신합니다.(링크) 우선은 “한없이 크다.” 정도로 알고 있다 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정의가 되었으니 이것을 한번 써보고 싶어지는데 숫자 십은 ‘10’ 만은 ‘10000’ 억은 ‘100000000’로 쓸 수 있지만 1억을 1억 번 곱한 것 보다 큰 것인 ‘무한’은 이곳에 적기에 공간이 너무나도 좁습니다.  그러기에 무한의 수학적 기호를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8을 뉘어놓은 모습으로 우리는 무한을 표시합니다.



 그 기호는 이미 정해져 있죠. 바로 숫자 8을 옆으로 뉘어놓은 것 같은 모양인 입니다. 원이 두 개 겹친 이 모양은 영원히 반복한다는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그 상징성이 직접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주인공인 박사가 자신의 정신병과의 끝없는 싸움과 극복을 상징하며 자전거 바퀴로 그리는 무늬가 이 무한의 상징 ‘∞’입니다.


3. 무한을 다루는 법

 사실 수를 다루는 것은 상당히 쉬운 작업입니다. 예를 들어 ‘2x+1’이란 것의 ‘x’에 ‘10’을 넣으면, ‘2*10+1’이고 계산하면 ‘21’입니다. 그럼 여기에 ‘∞’을 집어넣을 수 있을 까요? 다시 말하자면 ‘2*∞+1’이란 것이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과연 2*∞+1은 무엇일까요?

 사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이는 큰 문제이며 중요한 점입니다. 앞으로 이 무한을 이용하서 우리는 수많은 이론을 펼쳐갈 것입니다.

 어떤 값은 근사치에 도달하기도 하고, 비교를 하기도 하면 무한히 반복되는 계산식의 값을 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해결 할 수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작업의 대상이 미지수인 x에 넣는 작업조차 못하는 것이 바로 ‘무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통해서 이를 해결할 것입니다. 우선 다음을 기초로 합니다.

a. 무한은 어떤 수 보다 큰 것이다.
b. 하지만 무한을 일정한 값으로 대입할 수 없다.
c. 그렇기에 수를 키워가면서 그 큰 수를 유추하고 가까워지는 값을 무한에서의 값이라 한다.

 위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가까워지는 값’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이제부터는 [극한]으로 부를 것입니다. 영어로는 고등학교 수학 시간 속 너무도 익숙한 단어 ‘limit’입니다. 이 극한이 바로 무한을 다루는 가장 기본적인 툴(tool)입니다. 즉 이 ‘극한’을 통해 무한을 다루는 것입니다.


4. 과연 ‘1= 0.999·····’인가?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정말 1= 0.999····· 인지 말입니다. 그럼 위의 방법대로 단번에 무한번인 0.999·····을 구할 수 없습니다. 즉 천천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0.9 그다음에 0.99, 0.999, ····· 이렇게 하나씩 구해서 그 규칙 혹은 가까워지는 값을 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한을 다루는 문제입니다. 더 자세한 방법은 아래의 절차를 따릅니다.

0.9    = 0.9
0.99   = 0.9 + 0.09
0.999 = 0.9 + 0.09 + 0.009
      .
      .
      .


 이렇게 계산을 하면서 1에 가까워짐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인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쉬움이 있지만 아직은 바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문제는 지금까지의 것으로는 설명하기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수평선과 저 별에 가기에는 아직 재료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극한(limit)에 대한 정확한 쓰임을 통해서 이 공포의 문제 ‘1= 0.999·····’에 대해 더 핵심적인 방법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정말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원하시면 공식으로 정리해 놓은 이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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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순환오류의 일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2. 보통 이 이야기를 제논의 역설이라 합니다. [본문으로]


이전 글에서는 자연수에서 정수로의 확장이 단순히 음수와 0의 추가가 아니라  <하나의 집합, 하나의 연산>의 쌍을 의미있는 구조(군, group)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확장을 하게 된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즉, '자연수'에서 가장 기초적인 연산인 '더하기'를 더 의미있게 활용하기 위해서 자연수에 음수와 0을 더해 '더하기'에서 완벽한 집합을 만들었는데 그 집합이 바로 '정수'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수는 '더하기'에서 완벽한 구조를 이룬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서도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사칙 연산에서 우리가 완성한 것은 '덧셈과 덧셈의 역 연산인 뺄셈' 정도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곱셈과 나눗셈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제 부터 주인공은 '더하기'에서 '곱하기'로 넘어갈 시점인 것입니다.

 
16. 연산 '곱하기'란 무엇인가 - 곱하기(곱셈)

우리가 연산 곱하기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동일하게 느껴질 것 입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와 아이의 첫번째 벽이 되기도 하는 '구구단'입니다. 구구단을 달달 외우면서 곱셈을 하나의 문자표처럼 외우면서 머리속에 '삽입'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 삽입에 대한 확인을 이용한 '놀이', 구구단 게임을 통해서 상대방을 무안하게 하거나 집단의 즐거움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물론 구구단을 통한 곱셈의 '삽입'은 복잡한 계산으로 난무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수 조건이긴 합니다만 이미 암산의 대상이 되어버렸죠.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일상에서 느껴온 곱셈은 구구단을 넘기가 힘듭니다. 또한 곱하기는 그 정의를 도입할 때 단지 '더하기의 축약판'이라는 점으로 처음에 적용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2 X 3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정의합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2를 3번 더한다고 어렵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곱셈은 쉽게 더하기를 반복계산으로 정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곱셈이 그 자체로써 연산의 위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더 복잡하기만 할 뿐 그저 외우는 '삽입'대상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곱셈이 하나의 유연한 연산으로의 도약을 꿈꿀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도약이 수의 구조상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이 정수라는 더하기에 대한 완성을 이룬 구조에 곱셈을 다시한번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먼저 곱하기에 대한 정의가 더하기의 반복계산이란 것에서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덧셈의 경우에서 처럼 이 과정을 상당히 복잡한 과정이고 그 과정이 불필요합니만 정확한 정의를 페아노 공리측면으로 아래에 조금만 접어 놓겠습니다. (정신 건강상 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17.  연산 '곱하기'의 결합성

      
이 모든 정의에 간단히 넘어가더라도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곱하기가 더하기를 이용한 정의를 갖지만 보조 연산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산으로 개별적으로 정의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하기 뿐만 아니라 곱하기도 하나의 당당한 연산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몇가지 연산으로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시행해 볼 요인은 바로 곱하기가 결합법칙을 성립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결합법칙에 대해서 이 전에 짧게 그  중요성을 이야기 한 적이 있어 자세한 설명은 링크(링크)로 대신합니다.(결합법칙에 대한 링크 / 구조에 대한 링크)

하지만 간략히 설명하면 결합법칙이란 것은 임의의 정수 A, B, C를 고를 때 곱하기에 대해 AX(BXC)=(AXB)XC 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질이 성립함을 보이는 것은 페아노의 공리를 통하면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지만 어렵지는 않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직관적으로도 금방 이 성질이 곱하기에서 문제 없음을 알 수 있죠.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은 집합위에서 자유로운 연산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연산으로 곱하기는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만, 이것으로 확실한 독립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사실 연산을 만드는 일은 상당히 쉽습니다. 규칙이란 것이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곱하기가 가장 기본 연산인 +와 함께 중요한 하나의 연산으로 대우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8. 곱하기를 중요하게 하는 요인 - 분배법칙 (배분법칙)

수많은 연산중에서 곱하기를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 까요?  단지 그냥 더하기의 반복 계산을 쉽게 계산하기 위한 하나의 구조일 뿐일까요? 이 답을 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구조를 단단히 하는 방법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에 설명했던 군(group)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구조적인 조건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 중하나가 바로 위에서 제시했던 결합법칙입니다. 그리고 곱하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은 바로 '분배법칙(배분법칙)' 입니다. 아마 대부분 수학책에서 한번쯤은 배운 내용이고 또한 열심히 배운 분이라면 '이게 뭐 대단한 것이지?'란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수능에 나오지 않을 뿐이지 분배의 법칙또한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선 분배법칙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집합 A 위에서 연산 x가 연산 +에 대해서 분배법칙이 성립한다는것은
집합 A의 임의의 원소 a,b,c의 원소에 대해 다음이 성립하는 것이다.

ax(b+c) = (axb)+(axc)
(a+b)xc = (axc)+(bxc)

하지만 이 관계가 갖는 구조적인 중요성에 대한 언급은 글의 길이 관계상 다음글로 미루겠습니다. 하지만 곱하기에 대해서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곱하기는 더하기와 아무 밀접한 관계(분배법칙)을 갖으면 그 스스로도 하나의 연산으로 온전히 설 수 있는 힘(결합법칙)이 있는 중요한 연산이란 것입니다. 이제 곱하기를 중심으로 수 체계가 재정립됩니다.

이제 진정한 곱하기의 역습이 되겠습니다.

이제 더하기과 곱하기는 동등한 입장에서 구조를 완성합니다.




1. 결합법직의 정의

* 가 집합 A에서의 연산일 때, 집합 A의 원소 x, y, z를 임의로 선택했을 때 다음이 성립하면 연산 *가 집합 A에서 결합법칙이 성립한다고 한다.

조건 : x*(y*z) = (x*y)*z

2. 결합법칙의 중요점

연산이란 것은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것이지만 사실 연산이란 것은 함수의 일부분이다.
특히 함수 중에서 하나의 쌍을 하나의 값으로 보내는 함수이다.
(예 '+'는 (2, 3)을 5로 보내는 함수이다.)

어떤 연산이든 한 쌍의 원소사이에서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하기를 보더라도
2+3+5를 바로 말할 수 있다. 혹은 2x3x5를 바로 말할 수 있다. 이런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결합법칙이 성립함이다.

더하기과 곱하기가 결합법칙이 성립하기 때문에 앞의 두개에 대해서 먼저 연산하든
아니면 뒤의 두개부터 연산하든 상관없이 같은 값을 낸다.

따라서 굳이 '괄호'로 연산을 한 쌍씩 나눌 필요없이 괄호를 생략하고 연산을 연이어 쓸 수 있다.
즉 연산은 해당 집합 위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연산이 구조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결합법칙이 상당히 중요하다.
결합법칙이 없다면 그 구조가 하나의 규칙을 만들어가기 어렵다.
하나의 작은 조건이지만 이 조건을 꼭 통해서야 완벽한 연산이 될 수 있기에
[결합법칙]에 쓰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1. 가장 기본적인 연산 [더하기]


자연수의 집합을 N이라고 했을 때, N X N 이란 집합은 (n,m)이렇게 자연수 쌍들의 집합입니다. 이때 +는 다음을 NX N이란 집합에서 N이란 집합으로 만족하는 함수입니다.




ㅁ A1 : +(n,1)='n의 다음 자연수'


ㅁ A2 : +(n,m)=+(+(n,1), 'm이전의 자연수')



 A1은 간단히 말해서 다음 수가 되는 것입니다.

+(1,1) = 2
+(2,1) = 3
+(3,1) = 4
+(4,1) = 5


A2는 덧셈의 알고리즘입니다.
+(2,2) = +(+(2,1),1)
           = +(3,1)
           = 4
+(2,3) =  +(+(2,1),2)
            = +(3,2)
            = +(+(3,1),1)
            = +(4,1)
            = 5


쉽게 말하자면, +(2,3)이란 2에서 부터 1을 3번 +연산시킨 것입니다.
더하기 생각보다 어려운 연산입니다.



2. 곱하기에 대한 페아노 공리

자연수안에서의 연산 X : NXN -> N 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ㅁ N1 : nX0=0

ㅁ N2 :
nXS(m)=n+(nXm)



설명 : 그냥 이 두가지 정의로만으로는 이해가 불가능 하니 2X3으로 설명하면,

3 = 2+1
   = S(2)
2 = 1+1
   = S(1)
1 = 0+1
   =  S(0)
이므로


2X3 = 2XS(2)                     3=S(2)
        = 2+(2X2)                  공리 2번에 따라서
        = 2+(2XS(1))              2=S(1)
        = 2+(2+(2XS(0))         공리 2번에 따라서
        = 2+(2+(2+(2X0)))       1=S(0)
        = 2+(2+(2+0)              공리 1번에 따라서
        = 6




이에 대한 전문적인 페아노 공리를 알고 싶으시다면
1. 페아노 공리에 대한 글 - 여기를 클릭하세요.
2. 페아노 공리를 이용한 자연수에서의 연산과 그 구조 - 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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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글을 통해 “독립적으로 선택”을 찾기 위해 많은 실험들을 반례로 들면서 예언과 선택의 서로의 상관관계를 파악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하는 선택에서 기본적으로 예언이 갖는 위치는 상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의 삶에 종속되지 않듯이 선택이 예언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영향력이 클 뿐이고 예언의 힘이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혹은 본능)의 영역에서도 작용하기 때문에 여러 실험으로 마주하는 결과가 예언에 힘을 실리는 것이죠.

  이제는 반대로 나가려고 합니다. 나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는 예언의 성립하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신에서 찾을 생각은 없습니다. 신을 근거로 들기에는 전 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그리고 하나의 교실 안에서 조차 어느 누구도 반론하지 않는 신을 증명하기에는 제가 누구말대로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확실히 말하지만 지금부터 언급되는 ‘예언’은 좁은 의미의 종교적 색체가 강한 것이 아닌 행동을 만드는 기저 상황인 넓은 의미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14. 예언의 성립 조건 - 합리성

  예언의 조건은 여러 면에서 추측이 가능합니다. 가장 먼저 예언은 ‘과정의 합리성’이 있어야 합니다. 일부 예언은 합리적인 면이 상실되면 그것은 예언으로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 신화나 혹은 우리의 우화들 그리고 성경들을 예로 들자면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조건이 없을 수 있겠지만 번개를 다스리는 ‘제우스’가 있고, 말하는 ‘미운 오리’가 있고, 또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 인과관계는 달라지지만 그 과정의 합리성은 완성됩니다. 만약 합리성 없는 예언이라면 그것은 그저 주어가 없으니 사실이 아니라는 변명 같은 일이겠지요.

아무리 신화적인 이야기도 그 안에 합리성을 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말하는 미운 오리’가 있다면 태생적인 문제가 있는 자신에 대해서 통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은 전혀 합리성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만 말을 하는 오리일뿐 그 과정 그리고 그곳에서 얻는 예언들 그리고 그 성취는 공감이 가는 교훈 혹은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이 합리성이 아예 없다면 그것은 예언의 규모도 될 수 없을 뿐이고 그 가치 또한 얻기 어렵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렸던 예언이 그 의미나 가치를 획득한 것은 식민지 상태의 이스라엘이 ‘상상할 수 있는 메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합리성 때문입니다.

 

15. 예언의 성립 조건 - 비합리성

  하지만 오히려 완벽한 논리의 조건과 추측은 예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나는 내일도 아침에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겠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예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조건의 확률이 아주 높은 쪽에 대한 판단일 뿐입니다. 즉 현실 그 자체는 예언에 속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약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힘껏 발길질하는 아이의 태동을 보면서 축구선수를 보면서 체육인으로 키워 냈다면 그것은 ‘예언’이 될 수 있습니다.(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말이죠.)

  기독교의 메시아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아가 아무나 될 수 없기에 이것은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아예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비합리적인 면이 예언의 지위를 확립시켰고, 예수의 행적에 권위를 주는 것입니다.

신이 죽는 이 장면은 절대 비합리적이지만 그렇기에 신이 될 수 있다.


  예언에 대해서 이 두 가지만 생각해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둘을 모순 관계이라는 것 있습니다. 즉 예언은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언의 그 과정의 합리성을 그리고 현실과 너무 부합하면 안 되는 비합리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하기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이라는 존재는 모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합리성과 비합리성이 부딪치는 이 상황에서 예언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 모순관계에서 예언이 그 위상을 유지하는 데에는 사람들의 한자기 독특한 습성이 있습니다.

   

16. 모순과 상관없는 예언? - 인지 부조화 이론

  하지만 보통 예언이라고 하면 느끼는 것은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그 능력이 나온다 합니다. 이는 예언이 성립이라는 것을 갖추었을 때 힘은 얻는다고 오해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성립을 하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예언의 조건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성립이란 조건이 없이도 예언은 그 위상을 잃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성립이 없는 예언’이라고 하면 ‘신성 모독’이라고 할 것 같은 예상에 한 가지 심리학 이론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지 부조화 이론’입니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람들이 어떠한 태도들이 또는 태도와 행동이 서로 모순인 관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이 그 태도에 대해서 반성하기 보다는 그 태도를 유지하게 되는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그 원인은 일관성이 깨지는 것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바로 종말론자입니다.

사람의 인지 않에 모순 혹은 부조화가 생기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2000년 밀레니엄이라는 ‘산술’적인 모델 앞에서 많은 이들은 종말을 논했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종교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산술적인 장난은 신이 될 수 없었고 이에 많은 이들이 종말론 자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무엇이었을까요? 반성 보다는 자신들의 말들을 위해 행동합니다. 완벽한 부조화입니다. 그 실체나 판단보다는 먼저 경험했던 행동이나 그 태도가 바로 그들의 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합리성을 버리고 비합리성만을 갖은 예언을 따라가는 것이죠.

  그들은 예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순적이 부조화라도 말입니다. 즉, 예언이란 것은 부조화 혹은 실현과는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혹은 그것이 더 강할 수도 있습니다. 실현된 예언은 검증이라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처럼.

   

17. 모순이 완성하는 예언 - 2012년 또 다른 종말론을 맞이하며

  2012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은 또 다른 예언들이 넘쳐날 듯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마야인 들의 달력 덕분이죠. 이는 합리적인 마야의 계산법에 비합리적인 종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언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개인의 몫입니다. 혹은 이루어지지 않은 종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조화이론의 실천을 통해 계속 믿는 것 역시 개인의 것입니다.

2012년 종말을 이야기 하는 영화 '2012'


  다시 말해 예언과 성립은 상당히 중요한 합리적 고리이지만, 그것이 성립이 되지 않는 모순을 겪더라도 사람은 그 예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모순이 더 깊은 믿음과 행동의 근거가 됩니다.

  즉 이런 인간의 부조화적인 심리적 방향성이 합리성과 비합리성이라는 두 가지 모순으로 만들어지는 예언을 더 강하게 완성시킵니다. 또 그 예언은 우리가 이전 글까지 언급한 대로 선택에 가장 중요한 기저가 됩니다.

  이슬람종교가 여타 종교보다 더 많이 소유한 규제 및 행동 규약 들은 사실상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무신론자들이 보기에는 기독교인이나 불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모순적인 행동의 근원은 비합리적이라도 어떤 하나의 ‘예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언’의 비중이 높은 종교가 더 큰 충성심을 보이곤 합니다. 그리고 이 충성심은 행동에 대해서 더 강한 선택을 유도하게 합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입니다.(르네마그리트 )

  따라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언은 인지적인 조화이든 인지적 부조화든 혹은 성립이든 그것이 아니든 예언은 선택을 종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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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전 글에서 수학적 대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닫힘성 위에 결합성과 항등원 그리고 역원의 존재성에서 찾았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구조를 우리는 군(group)이라 합니다. 이 군에서는 수학적으로 상당히 강력한 성질들이 생겨납니다.

 


   이런 면에서 먼저 살펴보았던 자연수는 상당히 온전하지 않은 대수적 구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수는 더하기에서 조차 항등원과 역원을 포함하지 않는 불완전한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몇 가지 체계를 더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다행이도 우리가 경험상 충분히 자연수가 결합적인 성질을 만족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한 가지 구조는 만족합니다. 따라서 지금 부터 2가지만 완성하면 더하기에 대해서 구조적 완성되겠습니다.

   

12. 더하기의 완성을 위한 확장 : 항등원 '0'

  먼저 1번부터 시작하는 자연수의 왼쪽에 슬며시 '0'을 붙여줍니다. 이렇게만 해도 우리는 '더하기에 대한 항등원'이라는 귀중한 구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이제 아무리 더해도 문제없는 고유의 원소가 자연수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실재로 자연수에 '0'을 포함한 집합을 '확장된 자연수'라고 하기도 합니다. 실재로 '0'을 쓰던 고대문명이 상당히 존재했던 사실로 부터 우리는 자연수처럼 쓰기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수적으로 '0'의 쓰임이 명확해진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입니다.

태풍의 눈처럼 구조의 중심은 항등원이 가장 기초적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이전 글에서 항등원을 언급했습니다만, 다시 써보자면 어떤 자연수'N'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N + 0 = 0 + N = N 이 된다. 이 성질에서 우리는 덧셈에서의 가장 중심 구심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가장 적은 확장을 통해서 가장 큰 효과를 본 것이죠. 

'0'은 기본적으로 꼭 구조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얻는 바가 많습니다. 이 '0'하나 만으로 많은 철학적 논쟁이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말장난했었던 저번 글을 링크하겠습니다. ('0'에 대한 다른 글(링크)) 하지만 '0'하나만으로는 약간 부족합니다.

   

13. 더하기의 완성을 위한 확장 : 역원 '음수(음의 정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바로 역원입니다. 역원은 기본적인 의미는 '항등원으로 돌아가기' 입니다. 그러기에 원소마다 돌아가야 할 길이 다르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1은 방금 확장되었던 '0'으로 돌아기 위해서는 1만큼, 100은 100만큼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냥 1의 역원은 1 , 100의 역원으로 100으로 쓰게 된다면 표현상 엄청난 혼란이 오기 때문에 특수한 기호를 붙입니다. 바로 '-'인 음수[각주:1]입니다.

  즉 우리는 '-1'이란 것은 1이란 원소의 더하기에 대한 역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익숙한 '-'는 역원의 개념보다는 빼기의 개념으로 익숙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의 표현은 단순히 빼기를 위한 도구로 처음 도입되곤 하는데, 이 점으로 미루어보자면 굳이 어려운 역원의 이미지를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인간은 그와 상응하는 연산을 생각한 것 입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를 '빼기'라는 이미지 보다는 '더하기란 연산에서의 역원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수학적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이 ‘오십 보 백 보’란 속담을 생각을 하면 됩니다. 기본적인 의미야 ‘거기서 거기다.’라는 뜻이겠지만, 생각해 보면 ‘오십 보의 역원은 오십 보 백 보의 역원은 백 보가 된다.’란 역원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 말하자면 덤앤 더머더라도 덤과 더머는 다른 역원을 갖는 것이죠.

덤 앤 더머라도 서로 다른 역원을 갖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자연수의 개수만큼 '-'가 붙은 "음수"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음수의 발견을 통해서 우리가 계산에서 엄청난 이득을 구조상 획득하게 됩니다.


  

14. 정수에서 완성되는 '더하기' 

 자연수와 '0' 그리고 음수(음의 정수)에서 우리는 하나의 완벽함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 수체계를 정수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정수에서  x+3=5라는 방정식이 나왔을 때, 우리는 자신 있게 양변에 -3을 더함으로써 x=2임을 계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계산 과정은 +3을 등호의 반대편으로 보낼 때 '-'를 추가하여 계산하는 방법을 유추 방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즉 중/고등학교 수에서 방정식의 가장 중이한 풀이 방법 '이항'이 더하기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3+5 = 3+x라는 사실 역시 우리가 양변에 -3을 더하는 것으로 x=5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과정들은 역원의 합이 항등원이 되고 항등원은 더하기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아 사라지는 것을 이용한 것입니다. 뭐 간단한 계산이라고 생각되시죠? 하지만 그 간단한 계산 안에서는 정말 많은 구조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는 복잡한 배합 속에서 우리가 쉽게 20%의 산소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정수의 모형은 흡사 물의 원소 처럼 0을 중심으로 양수와 음수가 있습니다.


  그깟 더하기라고는 하지 말하면 지금까지의 의미가 무색해지겠지만, 자연수를 말할 수 있었던 근간은 태초부터 더하기뿐이었습니다. 과학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 복잡하고 어려운 인간의 것이란 것도 DNA 나선형의 작은 구조 시작된 계산입니다. 이 시작이 수로 말하자면 더하기 입니다. 반대로 기독교의 비유로 하자면 아담 같은 존재이죠.

  이 작은 구조의 확장이-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원소의 수도 변함없이(관련 내용 링크) - 구조적인 완성을 주게 됩니다. 이러한 완성이 아주 의미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정수의 구조를 바탕으로 만든 '정수론'만 접하게 되더라도 그 작은 차이가 방대한 이론을 낳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연수와 정수의 차이가 작아 보이더라도 구조적으로 볼 때 극복할 수도 없을 만큼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 하지만 만족하기엔 아직은 이른 '곱하기'

  맨 처음 자연수를 이야기 할 당시 더하기를 언급한 후에 아주 잠깐 '곱하기'를 언급했었습니다. 물론 곱하기의 정의 자체는 더하기의 간결한 표현이란 것으로 이야기 되었죠. 역시 정수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연산 곱하기는 정수로 확장된 이곳에서도 기를 펴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합니다. 하지만 곱하기에 따른 많은 이야기들이 진행되기는 합니다.

  유클리드 호제법이라든지[각주:2] 약수와 배수의 문제는 곱하기가 단순히 계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로써 충분한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정식의 문제로 돌아가자면 곱하기는 애물단지가 됩니다. 아주 간단한 방정식인 2x=1이란 것은 정수에서 풀 수 없는 숙제 일 뿐입니다. 물론 풀어내는 방정식도 있기 마련이지만 이런 간단한 계산조차 풀어내지 못하는 체계입니다.


곱하기는 다음


  이전에 말씀 드린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구조적인 약점은 앞으로 더 나가갈 체계의 방향입니다. 자연수에서 가장 중요한 더하기를 위해서 우리가 정수를 만들었듯이 이제까지 ‘쭈구리’ 인생이었던 '곱하기'를 위해서 다시 그 영역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길이 그렇게 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정수를 위했던 작업을 재실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다음글로 살며시 미루겠습니다.


<~이전글  / 다음글~>

  1. 엄격하게는 음의 정수입니다만 현재 자연수의 음수만을 이야기 하므로 음의 정수를 음수로 쓰겠습니다. [본문으로]
  2. 2개의 자연수의 최대공약수를 구하는 알고리즘 중 하나. 호제법이란 말은 두 수가 서로 상대방 수를 나누어 원하는 수를 얻는 알고리즘. [본문으로]



어쩜 후광효과부터 피그말리온 효과는 예언을 바라는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선택을 꿈꾸는 이 글의 목적을 되새겨 보면 이 본능에 대해서 더 살펴보면 어느정도 자율적인 선택을 꿈꾸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희망적 생각[각주:1]을 첨부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얼마나 예언에 밀접해 있을지가 가장 먼저드는 고민입니다. 삶의 모든 시간에 대한 것은 이미 오랜시간 혹은 그 전에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바랍니다. 지금 이 의문과 넋두리는 종교적인 어떤 부분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선택이 예언에 종속되는 기본적인 매커니즘이 중요합니다.

즉 종교적 의미의 예언보다는 지금 우리에게 끼치고 있는 비종교적 예언과 선택의 매커니즘에 집중 되어야 합니다.


11. 예언을 원하는 기본적인 본능, 뇌바보

먼저 우리가 예언을 원하는 기초적인 본능은 어디서 나올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정말 그 기초를 잡았다면 저는 지금 스위스에서 상 받을 준비를 하고 있겠죠? 최근에 우연히 어떤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제가 보는 신문은 아닙니다만 SNS의 힘으로 접하게 된 것이요. 바로 '뇌바보'입니다.[각주:2]

이 '뇌바보'는 말 그대로 뇌가 바보라는 것에 대한 것으로 이에 대한 언급은 간단한 행동으로 설명 합니다. 이 글의 저자가 강연할 시에 한 학생을 일으켜 세워놓고 이런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라고 공지 한 뒤에 "당신은 능력이 있으며~"라고 말합니다. 즉 거짓말이라고 하고 나서 세상의 온갖 칭찬을 다하는 거죠. 결론은요? 아시겠지만 거짓말을 들은 그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 더 정확히 말해서 뇌가 기분 좋아 집니다. 개인적으로 이 사실을 접한 저는 너무나 신기해 보였습니다. 바보처럼 말입니다.


뭐 그냥.. 뭐... (출처 : 뉴스뱅크이미지)


그리고 이어지는 근거 실험에 대한 설명은 더욱더 흥미를 끌었습니다. 실험은 1995년의 실행된 실험으로 뉴욕대학에서 실시된 심리학 실험입니다. 7.5m의 통로를 지나가는 실험인데, 젊은이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결론은 평균 7.3초. 이 실험은 심리학 실험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통로를 걷기 전에 노인에 대한 문제를 풀었고 통로를 지난 시간은 앞 선 집단의 평균보다 1초 이상 웃돌았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은 두 집단이 있는데 한 집단에게는(줄여서 무례집단) '무례하다. 침입하다.  공격적이다' 같은 단어를 한 집단에게는(줄여서 예의집단) '예의바르다. 정숙하다. 양보하다.'의 단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다음 실험을 받게 한다며 다른 장소로 이동시킵니다. 실험은 여기서 시작되는데, 앞 선 두 사람이 이런 저런 문답을 계속 이어나가고 피실험자는 그들을 기다립니다. 결론이 예측되시죠? 무례집단은 5분 정도 안에 끼어들어 대화를 시도하고 예의집단은 10분 이상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뇌는 정보에 무기력한 바보입니다.



'노인이란 단어', '무례한 단어', '예의바른 단어'가 대체 무슨 일을 꾸민 것일까요? 그것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몇 개의 단어가 뇌에게 직접적인 반응을 유도하게된 것입니다. 네. 본능적으로 받아들인 예언입니다. 우리의 뇌는 이미 그냥 지나가는 몇 개의 단어에 사로잡혔습니다.


12. 바보가 하는 선택? - 뇌바보와 사이비 종교

바보인 뇌는 몇 개의 정보를 실재적인 자신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성격 마저 지나가는 몇개의 흘러가는 정보를 통해 형성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는 교육적 의미로 엄청난 현실입니다.[각주:3] 우리가 주변의 상황에 오류를 범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우리 자체가 상황, 혹은 작은 예언들을 따를 수 밖에 없는 본능이란 것입니다.

최근의 시사 고발 TV에 한 수련원을 보게 되면 이런 본능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종교적 행사중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는 데 이 고백이 정말 판타스틱합니다. '수련원의 돈 3억을 횡령했다.'부터 시작해서 '도둑질을 했다.', '원장을 살해하려 했다.' 등[각주:4]의 말은 반복적으로 듣고 반복적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결론은 예상하는 그대로 입니다.

H수련원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들은 그 3억을 갚기 위해서 수련원에 돈을 내고 기부를 하며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충성합니다.

그들이 과연 멍청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또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종교인은 집단 최면과 흥분 상태를 이용한 것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메시아의 통로라는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 뒷면에서는 수많은 성적 도착증을 보인 이야기도 나옵니다. 당했던 사람들을 모아보면 극히 정상적이고 혹은 더 존경을 받는 위치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있다면 절대로 이 교주같은 목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실재로 녹회된 영상에는
아방가르드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비상식적 결과를 도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상식 그 이상입니다. - '그것이 알고싶다' 스틸컷



사람은 들어오는 정보가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더라도 그 안에 '정보[각주:5]에 대한 믿음'이라면 어떤 논리적 설명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쩜 뇌바보에서 부터 나오는 인간의 수동적 선택의 본능일 것입니다. 이런 본능의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택에 대해서 수동적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에게 '자유러운 선택'이란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13. 예언과 선택

선택을 사로잡기 위해서 예언을 언급했습니다.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우리가 선택을 하는 일에 대한 것을 약간 이나만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예언을 언급할 것 입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어쩌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반(反)자유'이고 나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일 수 도 있습니다. 이에 비관적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어 라고 말 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제가 '선택'을 계속 궁지에 밀어 넣은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근거가 없는 의미 있는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의미 있는' 선택이란 단어의 정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린 올바른 선택을 하기에 앞서 올바른 근거를 찾아야 하고, 그 올바른 근거를 찾기 위해 예언을 찾았습니다. 꼭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내용이 아니라도 예언은 개인에게 존재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예언의 기원을 찾다보면 분명 선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것입니다.



물론 언급한 '예언'은 사전적 단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포괄적인 것입니다. 어떤 선택과 판단의 근거가 되는 그 이전에 선택된 것으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선택에 강요되는 부분을 지칭하는 단어로 썼습니다. 이런 예언이 없이 우리가 판단할 구석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홀로했다고'믿는' 선택보다는 그 근거 다시 말해서 선택 이면의 예언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뇌바보에서 보는 것 처럼 '예언'이 근사하고 화려하게 생겨나고 방대한 정보의 것만이 아니라 단지 나도 모르게 스쳐지나가는 혹은 집중하지 않았던 어떤 것들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엑스칼리버 처럼 몇 백년을 이어나가는 예언도 분명 존재하나 오늘 아침에 나온 아침 식사 또한 예언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침식사의 짧읜 메뉴가 당신에게 예언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조금더 예언을 자세히 그리고 조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그 예언은 어디서 오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을 다음 글에 해볼 고민으로 남기겠습니다.

  1. 혹은 예언 [본문으로]
  2. 중앙일보 - http://bit.ly/ohDVrY [본문으로]
  3. 교육적인 면은 다른 주제로 다룰 예정입니다. [본문으로]
  4. 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19금이라 생략합니다. [본문으로]
  5. 그들에게 주어진 특정 예언 [본문으로]

이전 글을 통해서 더하기와 곱하기를 통해서 자연수란 공간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이는 자연수란 구조가 그저 자연스럽게 쓰인다라는 쓰임이나 목적에서 벗어나 하나의 당위성 혹은 하나의 구조적 기초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자연수는 곱하기보다는 더하기로 생성된 공간입니다. 그러기에 자연수란 공간은 더하기라는 수학적 구조의 완성에 욕심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그럼 수학적 구조가 완성된다는 것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수학적으로 하나의 연산이 구조적으로 완성될 수 있을 까요? 가장 기초는 preview에서 언급한 닫힘성입니다. 어떤 구조든 그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연산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닫혀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을 이을 중요한 세가지가 있습니다. 카메라를 받혀주는 든든한 삼각대 처럼 말입니다.

좋은 구조는 튼튼한 삼각대 같습니다.




8. 큰 스승 - 항등원

두 가지 중에서 먼저 언급할 것은 '항등원'입니다. 고등학교에서 한번쯤 들어왔을 단어입니다만 조금 우화시켜보자면,  연산이라는 것을 아무리 시행해도 전혀 '쓸모 없는' 원소입니다. 사실 전혀 쓸모 없는 연산이지만 그것은 연산에서의 일이고 실재적으론 구조상 가장 중요한 구심점이며 주인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쓸모 없다는 것을 하나의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항등원이 만약 e라고 한다하면
a ○ e = a
          = e ○ a 입니다. 조건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는 아래에 적겠습니다만 중요하진 않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떠한 원소를 상대(연산)하더라도 그 자신의 값을 돌려주는 것이죠. 그래서 항등원을 비유하자면 균형의 추 같은 역활입니다. 한 평생 조용히 한자리를 지키는 수도승과 같은 이미지 처럼 흔들림이 없는 값입니다. 그러기에 만약 한 구조와 연산에 항등원이 없다면 마치 모두를 지지해줄 큰 스승한명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항등원이 같은 특이점은 강조하기 부끄러울만큼이나 가득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실 연산에 대한 어떤 구조든 닫힘성만 보장된다는 전제하에서 가장 먼저 찾는 요소중에 하나가 바로 이 항등원입니다. 적어도 항등원이 있다면 출발점은 확보한 셈이니까요.


9. 되돌리는 힘 - 역원

항등원의 추상적인 역활에 비해 역원의 역활은 비교적 정확합니다.  '역원'이란 큰 스승 항등원으로 되돌려주는 것들 입니다. 역원은 각자에 따라 그 크기가 다릅니다. 만약 내가 어떤 곳을 100m 떨어져 나왔다면 그에 대한 역원이란 내가 태어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 거리만큼이 됩니다. 항등원의 상대가 모든 원소인데 반해 역원은 개별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간단한 식으로 적자면 우선 항등원을 e라고 했을 때, 이때 a의 역원이 되려면 다음을 만족는 x입니다
a ○ x = e
          = x ○ e 더 엄격한 설명을 접어 놓겠습니다.



온 만큼 다시 돌아가는 것을 역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개별적이고 변동적이긴 하지만 이 역원을 통해서 하나의 원소가 항등원으로 돌아갈 수 있음으로 구조적으로 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어떤 미지의 것에 대한 물음, 특히 수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방정식에서의 해답(근)을 찾는 데에 있어서 역원의 활동은 독보적입니다.

이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간단히 예들 들면 제가 동전 5개를 계산하면 내었더니 주머니에 3개가 남았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5개를 내어준 것의 역을 생각하며 결국 처음에는 8개의 동전이 주머니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쩜 항등원 보다 역원이 더 중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원이 존재하기 위해서의 가장 1번 조건은 항등원의 존재입니다.


10. 구조를 위한 마지막 기둥, '결합성'

닫힘성 위의 두개의 조건만으로도 우리는 아무 멋진 구조를 갖을 수 있다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곳이든지 존재감은 없지만 없으면 완전 불편한 어떤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완성된 구조란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쩜 우리가 당연시 사용하는 조건일지도 모르나 잊지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결합성이라는 것입니다.

결합성이란 것을 간단히 예를 들어 이야기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3+5)+7=3+(5+7) 처럼 덧셈이 있는 상황에서 결합의 순서를 달리한다고 해도 결과에는 영향이 없을 이야기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간단히 3+5+7이라고 쓸수도 있지요.

더 자세한 정의는 접어 놓겠습니다.

결합성의 가장 큰 힘은 다 같이 연산 할 수 있음 입니다.



사실 이 것을 보면 '이게 뭐?'란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사실 마음속으로 생각해보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하나 중요한 사실을 기초로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연산이란 본래 함수입니다. 그것도 두개씩 짝지었을 때 하나의 값이 나오는 함수이지요. 간단히 이야기 하면 +이란 연산은 (1,2)란 것을 3으로 대응시키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사실 1+2+3이라는 것은 3개를 한번에 함수로 보내는 것이므로 사실 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위의 구조, 즉 결합성이란 조건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앞의 두개를 미리계산하거나 뒤의 두개를 미리 계산해도 어짜피 하나의 값이 나오기 때문에 괄호를 생략할 수 있는 것이지요.

어쩜 큰 행동을 하지 않는 조건이지만, 구조속의 연산에게는 자유로움을 선사하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11. 다시 돌아와서 자연수란.

그렇게 세가지의 조건을 만족하게 된다면 수학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구조가 됩니다. 단적인 예로 다음이 성립해야지만 '2+x=5'같은 계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중요한 구조는 수학에서는 '군(group)'이라 합니다. 그럼 이제 원론적인 수학 이야기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구조를 완성시키기 위해 자연수로 돌아와 그 자신을 만들어준 창조적인 연산 더하기와 함께 생각해봅시다. 과연 자연수가 이런 구조들을 만족하는 좋은 구조를 갖는 공간인지 시험해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잘 쓰고 있는 수에대해서 평가를 내리는 일이지요.

좋은 구조는 더 다양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도출 시킵니다.



먼저 자연수는 결합성의 조건을 간단히 만족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3+5)+7과 3+(5+7)을 각각 계산하게 되면 성립함을 알 수 있죠. 사실 엄격하게 증명을 하는 것보다 머리속의 직관으로 생각하시는 것이 건강에 더 좋음을 말씀드립니다

다음으로 더하기에서 항등원과 역원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간단히 머리속에서 1+e=1을 그려본다면 성립하는 e는 바로 0이라고 쉽게 계산됩니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네요. 바로 자연수에서는 0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절망적입니다. 자연수를 만들게 해준 '연산 더하기'는 그 연산의 가장 기본적인 항등원을 내려주지 않았습니다. 역원은 항등원, 즉 돌아갈 원점이 없기 때문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자연수는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수의 구조이긴 하나 구조라고 쓰기에도 민망할 정도록 가장 기본적인 더하기에서조차 구조를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수만으로 절대 만족하면 않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연수란 곳에 적당한 수를 추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수 가장 보편적이지만 더 만족스러운 구조를 위해서 다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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