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는 일상에서의 필요에서 나왔습니다. 특히 어떤 것의 개수를 확인해야 할 필요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가장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자신이 기르는 양의 수를 확인하기 위해 작을 돌멩이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일정한 대체물을 이용하는 것으로 '수'의 가장 기초가 되는 행동으로 볼 수 있는데, 이 활동은 일대일 대응이라는 함수적인 활동입니다.


4. 자연수, 큰 수를 발견하다.

양 두 마리가 돌 두 개 그리고 손가락 두 개 등 함수적인 대응들이 갖는 대표성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대응의 공통점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구조를 탄생시키는 데 그것이 바로 '수'입니다. 그리고 그게 더 정돈된 것이 바로 "2"입니다. 개수에 따라 대표되는 상징을 나름의 규칙에 따라 정하게 되고, 그에 대한 표현은 1, 2, 3, .... 이나 Ⅰ, Ⅱ, Ⅲ, ...... 등 주변인들과의 약속으로 결정하여 쓰게 됩니다.

'자연수'의 탄생입니다.

일대일 대응에서 자연수가 탄생합니다.



이 상징적인 체계가 갖는 의미는 상당합니다. 드디어 '큰 수'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수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수의 범위는 상당히 작습니다.[각주:1] 사람의 개수에 대한 인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직관적인 수에 대한 관념은 평균 20정도뿐인 것입니다. 대응을 통해서 더 큰 수를 셈하긴 했지만 그를 위해서는 더 많은 돌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수를 이용한 셈은 그다지 큰 댓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학교에서 자신의 순번을 몇 개의 숫자, 학년과 반 그리고 반안에서의 번호로 총 4개의 수를 통해서 자신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휴대폰 전화번호에 우리가 부여하는 숫자는 010 - XXXX - XXXX 으로 총 11자리 숫자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상대방에게 전화하기 위해서 적어도 10000000000개의 돌멩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자연수 덕분에 이 많은 돌을 들고다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5. 가장 자연스럽고 강한 <연산, 더하기>

우리가 큰 수를 사용한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추구할 수 있음을 야기합니다. 사실 실생활에서 그렇게 큰 수를 사용할 필요성은 없으나 이미 개념이 생겨버린 수의 체계는 그 자체에서 더 큰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바로 연산 입니다. 연산이란 것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한 쌍의 수'가 갖을 수 있는 '잘 정의'되어 있는 규칙입니다.[각주:2] 꼭 의미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요. 규칙만 맞으면 그게 바로 연산입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시작이 있기에는 사람이란 것은 너무나 감성적이지요. 첫 번째 의미를 갖는 연산은 바로 '더하기, +' 입니다. 이 또한 어떤 실험이나 합의를 통해 얻어졌다가 보다는 본능적으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규칙은 너무나도 쓸모 있고 가장 흔히 쓰이는 '연산'이 되었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가족이란 개념으로 부터 시작해서 생산, 전쟁, 합의 등 더하기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서 우연히 이 곳까지 오는 길에 비해서는 더하기란 너무 쉬운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산'이란 과정으로 보자면 좀 더 알아볼 구석이 많습니다.

더하기는 자연수의 근간 그 자체입니다.



자연수는 '더하기'는 기초로 합니다. 어쩌면 근간 그 자체입니다. 수학적 정의로 자연수란 '1'이란 수에 '1'을  더한 것을 '2', 또 '2'란 수에 '1'을 더한 것을 '3'이라고 정의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수에 대한 더 깊은 구성과정에서 '더하기'가 빠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더하기를 통해 자연수는 더 많은 쓰임을 얻게 되었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더하기에 대한 연산을 (조금 어렵게) 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정신적 건강을 위해서 접기로 합니다.(굳이 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결론적으로 <연산, 더하기>를 장착한 자연수는 구조적으로 더 강해졌습니다.




6. 더하기의 아류 <연산, 곱하기>

자연수의 다음 친구는 연산, 곱하기 입니다. 자연수에서의 곱하기는 사실상 더하기의 아류입니다. 더하기의 반복을 축약해주는 것으로 컴퓨터로 보자면 간단히 단축키와 같은 역할이죠. 구구단으로 고생했던 기억이 있으신 분들은 의아할 것 입니다. 그렇게 수학에서 중요하게 여긴 구구단이 그냥 단축키를 익히기 위한 것이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적어도 자연수에서는 말입니다. 힘이 빠지는 일이겠지만 더하기의 셔틀 연산, 곱하기는 무도 박명수 처럼 쭈구리이며 2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갖는 강한 편리성은  놓칠 수 없죠. 또한 이 곱셈이 덧셈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자연수라는 기초적인 체계에서 안전하게 계산되며 큰 수의 사용이라는 장점을 더욱더 극대화 시켜줍니다.

아류이지만 적어도 그 역활이 있습니다.



이로써 자연수는 더하기와 곱하기라는 두 가지 연산을 구조로 같으면서 자신의 체계를 굳혀갑니다. 사실 이로써도 삶에서 크게 불편함을 못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만 있는 한 존재가 있겠죠. 곱하기 입니다. 하지만 이 곱하기의 반전은 잠시동안은 접어두도록 하겠습니다



7. 구조를 만드는 힘 : <성질, 닫힘성(closed)>

아이폰과 아이패드 그리고 맥 등 모바일 및 IT분야에서 지지 않는 태양이 되고 있는 애플의 가장 큰 장점 및 가장 큰 단점이 무엇이라 생각되십니까? 아마도 이 둘은 같은 단어 하나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바로 '닫힘성'입니다. 아이튠즈라는 허브를 통해서 애플의 모든 것들이 소통하지만 그 소통은 애플에 한하게 됩니다. 이는 안정적인 체계구축이라는 장점을 부여하지만 너무 닫혀있다는 단점도 됩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았을 때는 개방체제보다 더 안정적으로 구축되는 '구조'임은 틀림없습니다.

애플이 폐쇄적이면서도 사람들을 더 열광시키는 것은 닫혀있지만 '강한 구조' 때문입니다.



preview 에서 강조했다시피 '수'란 것에서 결국 '구조'를 찾아보는 것이 진정한 '수'를 찾는 일입니다. 자연수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연수란 수를 일상에서 얻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자연수에서 "어떤 구조가 이 체계를 지탱해 주는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언급했던 <연산, 더하기>와 <연산, 곱하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더하기와 곱하기를 시행하는데 있어서 자연수란 공간이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이 두 연산이 자연수 안에서 온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수란 공간에 더하기와 곱하기가 잘 담긴다는 말입니다. 이런 구조를 수학에서는 '닫힘성(closed)'이라 합니다. 이는 간단히 말하자면 연산을 아무래 해도 그 공간을 벗어나지 못함을 이야기합니다.

닫힘성은 구조를 만드는 힘입니다.



자연수끼리 덧셈을 아무리해도 곱셈을 아무리 계산에 시간이 걸릴 뿐이지 이 계산의 결과가 자연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자연수를 더 완벽하게 합니다. 이 구조가 실재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크게 강조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히 설명됩니다.

조직에서 '반역자'를 좋아하는 규정은 없습니다.

이는 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수학에서 반역이 없어야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어떤 구조든 불완전한 요소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이 그 조직의 완전함을 추구하는데 있어 더없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중요한 명제입니다. 본래의 구조만을 맹신하는 것은 발전이 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먼저 좀 더 완벽한 구조란 무엇인지 살펴본 다음, 이 자연수에 반역해 보겠습니다.

  1. 동물의 수에 대한 인지 능력 - 링크 : http://holicmath.tistory.com/22 [본문으로]
  2. 이 것을 어렵게(?) 설명하자면 동일 집합의 두 개의 원소를 묶어서 다른 것에 대응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우리는 언제나 수를 사용합니다. 실제로 어떤 교과서는 "수가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할까요?"를 주제로 수를 제외 한 일화들을 책의 한켠에 배치해서 수학을 배워야 한다는 뭐 좀 극단적인 의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수를 통해 수학을 배워야 한다.'에는 동의합니다만, 그를 제거하면 불편하니까 필요하다는 논리에는 살짝 불쾌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수를 먼저 배우고 나중에 사용한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모든 수학책에서 가장 먼저 느끼는 기본. '수'를 이야기해보면 그렇습니다.


1. '수'의 어머니는 '수학'일까?

그러기에 우리는 '수'란 것이 어느 곳에서 먼저 정의 되는지 알아 봐야 합니다. 네이버 사전을 인용하자면 '수'란 셀 수 있는 사물을 세어서 나타낸 것이며 두 번째 정의는 자연수, 정수, 유리수, 실수 따위를 통틀어 말한다고 나옵니다. 저는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나오는 한 마디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좁은 뜻으로는 자연수를 가리킨다.'

좁은 뜻으로 자연수를 가리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 유추할 것은 '수'란 것은 본디 수학적으로 정의된 것이 아니라 먼저 실생활에서 태어난 것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태생은 결국 일상 속의 자연수란 모습 이였다는 것이죠. 자연수라는 말은 딱 그 단어를 나누어 생각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자연스럽게 생성된 수'입니다.

사실 자연수를 정의한 페아노 공리는 이미 쓰임과 성질이 모두 정리된 상태에서 실행된 것입니다. 즉, 이미 있는 것에 대해서 정확히 그리고 전문적으로 정의한 것이죠.[각주:1] 다시 말하자면 자연수는 수 체계에 대한 어떤한 교육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물건과 물건 혹은 물건과 상징(손가락 혹은 셈하는 단위)에 일대일 대응[각주:2]으로 자연스레 쓰기 시작한 것이며 이 것이 여러 수 표현체계(로마자, 아라비아자, 한자등)를 거친 후에 정의 된 것이죠.

숫자는 단지 수의 표현 수단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단어 '수'는 본디 수학보다는 그냥 일상용어란 결론이 나옵니다. '공기'나 '운동'과 같은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기는 화학적인 부합물이기 전에 우리가 마시는 것이며, 운동은 우리가 물리적 역학이기 전에 걷고 뛰는 생활인 것입니다. 수도 마찬가지 입니다. 엄격한 '수'[각주:3]란 것은 수학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수'가 필요하니 '수학'을 하라는 것은 신에게 '피조물'이 필요하니 '공예'를 배우라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참 '예의 없는' 수학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수'에 대해 바른 입장으로 서보자면, "수학에서 '수'가 필요하니 일상을 더 참고하겠습니다."라고 고개를 숙여야 할 것 입니다.

'수'가 삶에서 필요하니 수학을 해야 한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일단 '수'가 일상에서 벗어나고 '수학'에 편입하고 나서는 의미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수학의 많은 논리성에 대한 하나의 위대한 '예시'가 되었습니다. 이만큼 정확하고 확실한 예시가 없지요. 그 후 수와 수 사이의 많고 많은 규칙들이 생기고 그 사이에서 또 어떤 규칙을 찾아내는 반복적인 역사가 거듭될수록 '수'는 독립적인 수학의 분야로  진입합니다. 그 분야가 바로 대수학(algbra) 분야이지요.[각주:4]


2. '수'는 사라지고 '구조'만 남았더라.

이 대수학은 - 특히 추상대수학은 - 수의 체계로 부터 시작합니다. 맨 처음에 언급한 자연수부터 시작하여 정수, 유리수, 실수를 거쳐 복소수 그리고 해밀턴 4원수체 등 여러 수를 거치면서 구조를 만들어 간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덧셈이 가능하고 곱셈에서 닫혀있는 수의 체계가 바로 대표적인 자연수의 구조이죠.

수를 근간으로 한 대수학에서는 수는 사라지고 그 뼈대만 남아 버립니다. 하지만 그 뼈대가 이제 '수'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우리는 이제 구조만으로도 대수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1'이란 숫자는 자연수의 '1'이라기보다는 자연수와 같은 구조를 같은 구조를 갖은 원소의 대표적인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조금 설명이 난해 한가요? 수학 외적인 예를 들자면 반복적으로 이미지가 찍어내어지는 앤디 워홀의 그림을 보면 수 많은 마를린 먼로의 그림에서 이미 먼로는 사라지고 '복제'라는 구조만 남는 것과 같습니다.

마를린 먼로는 사라지고 복제만 남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무료한 시간을 잡아내기 위해서 TV리모컨을 찾습니다. 이리저리 찾아 해메다 주방에서 발견되곤 했죠. 문득 TV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고 뇌 속의 해마가 이제 다 죽어간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걱정에 TV리모콘을 내려 놓고 고민하다. 다시 TV 앞으로 가서 리모컨을 찾지요. '수'와 '수학'도 이와 유사합니다.

그럼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3. '구조'는 중요할까?

그럼 대수학이 구조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떤 면이 수학을 '수'에서 '구조'로 이동하게 하는 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구조'가 구조에서 끝이 난다면 의미 없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적어도 자신의 뇌의 해마가 죽어가는 것이 TV를 시청하는 일보다 중요합니다.

구조는 우선 대표성입니다. 하나의 구조가 정의되면 그에 따라 오는 모든 정리(성질)들이 같은 구조의 모든 것들에 적용이 됩니다. 따라서 수많은 개별적인 것을 구조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아주 미세한 예를 들자면 짝수의 모임과 정수는 같은 구조 입니다. 한쪽에 대해서만 완성되어 있다면 그 반대편에 대해서 다시 알아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공식'같은 존재이죠.

또한 '구조'를 연구하다 보면 새로운 '구조'의 발견이 보입니다. 결핍되는 구조를 채우기 위해 새롭고 더 강한 체계를 구축함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그 해결을 통해서 점점 완벽함을 모색하게 됩니다. 아마도 수에 대한 글 말미에는 조금이나마 완벽한 구조로 결론을 도출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구조의 면으로 수를 써내려 가면 더 완벽함을 발견할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고 했지만 '구조'는 하나를 알면 같은 구조 전부를 알게 됩니다. 이러니 어찌 수학이 구조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1. 이에 대해 좀 더 전문적이고 자세한 설명은 다른 글의 링크로 대신하겠습니다. http://holicmath.tistory.com/41 [본문으로]
  2. 일대일 대응의 정의 : http://holicmath.tistory.com/13 [본문으로]
  3. 좁은 의미의 수 [본문으로]
  4. 보통 대수학이라고 하면 방정식의 계산만을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 대수학은 정수론 선형대수 추상대수 등 수의 체계로 시작되는 모든 분야를 포함하는 학문입니다. [본문으로]
< 똑똑한 지인이며 친구인 이의 조언에 따라 경어체로 바꾸어 봅니다.>
앞서 이야기 한 듯이 우리가 이미 '선택'이란 것이 이제 더 이상 '독립적'선택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구석이 너무나 많습니다. 의지를 구성하기 에는 다양한 방해요소가 생성되며, 우리는 그 방해에 순종하는 것이 대부분이죠. 자신이 인지 못한 상황, 아니 인지하는 상황이더라도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하기도 하고, 또는 타인의 선택에 속기도 하며 심지어는 제시되는 정보의 순서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선택의 방해물에서 잠시 벗어나 선택 자체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7. 경솔하게 선택하고 신중하게 유지하다.

먼저 유신론과 무신론을 들먹거리고 싶진 않습니다. 나의 전공이 아닐뿐더러 지금 여기서 내세우고 싶은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각주:1] 모든 사람은 선택하고 그 결과를 기대합니다. 만약 그 결과에 대한 환상이 클수록 선택에 신중을 기하는 경우가 많고 만약 이루어질 확률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해집니다. 그에 반하는 경우나(문구점의 뽑기) 혹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우(로또)에는 정말 터무니없게 경솔하기도 합니다. 신중과 경솔의 사이 속에는 무엇인가 '독립적인 선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신중함에서 선택을 찾을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저는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선택한다."를 찾고 싶은 것입니다. 한 가지 가설을 올립니다. 신중의 정도가 높을 경우에 우리는 좀 더 자발적일 수 있을까요? 이 가설이 옳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의존적인 선택의 실험들은 '신중함'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신중함'이란 것을 찾아 가봅시다. 최고의 신중함을 찾으려면 가장 결과가 큰 곳으로 가야 하겠죠? 그래서 저는 이 가설에 '신'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보통의 유신론(특히 종교) 속에서는 우리는 한정된 삶의 영원한 다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 그 '결과'란 것은 (그 믿음에 성실할 경우에) '로또'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이겠죠.

그런데 재미있는 '종교'의 특징은 보통 경솔하게 선택하고 신중하게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신앙이란 것의 고비마다 결단과 선택의 순간이 존재하죠. 예를 들자면 세례나 출가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신중하고 싶은' 과정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처음에 입문하는 순간을 보자면 상당히 우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의 종교란 것도 상위세대의 종교의 세습과 동아리 활동 등의 의도치 않은 순간들의 결과입니다. 갑자기 종교와 입문의 경솔함을 언급하는 이유는 과연 결과에 부여된 가치가 크다 해서 선택이 신중하지는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종교적 '간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의 길을 인도한 것은 신이였다. 내가 우연히 마주하게 된 곳은 신이 나를 멱살 잡아 내팽개친 그곳 이였다. 아멘. 혹은 나무아비타불.

본디 경솔함이 인간의 몫이고 신중은 신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린 어디에서 신중했던 걸까요? 신이 우리를 이 자리에 '모셔'왔다면 우리가 대체 신중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긴 한 것일까요?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믿는 신의 현현(석가나 예수)은 신중했던 존재였다는 것 말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바로 이 신중했던 선인 및 신이라 불릴 존재에 대한 믿음이겠죠. 결국 태초부터 경솔했던 우리는 신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내세운 가설 "결과가 클수록 신중할 것"은 그다지 좋은 가설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작은 것에 신중하며 큰 것에 대해서는 경솔할 수도 있습니다. 신은 경솔하게 선택하고 의례는 신중하게 하는 우리에서 모습에서 말이지요.


8. 당신이 선택을 한 신에 대해서

사실 '경솔'이란 단어가 '신중'이란 단어의 반대 개념으로 적용하기에는 충분히 독선적인 면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어쩜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종교와 선택이란 자유의지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왠지 더 역설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사실 종교로 들어가자면 정말 계획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신이니까요. 그런데 무신론자들은 다를까요?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또한 사실과 증명이라는 것에 종속되어있긴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까?'입니다. 사실 저는 많은 실험들을 통해 글을 진행해 오면서 그렇지 않다고 계속 속삭이고 싶습니다. 어쩜 정말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개인적으로 슬플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조금 주제를 돌려볼까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는 법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알고 있기에 이쪽으로 이야기 하자면, 예수의 마지막 말 중 하나가 바로 "다 이루었다.[각주:2]"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한마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란 존재의 역할이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 역할을 끝까지 따라 온 것입니다. 이것에 '예언'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에 비춰 볼 때, 예수 본인도 예언을 쫒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철저히 '구약'이라는 기독교 전통 역사서의 모든 예언을 실행합니다. 출생부터 죽음 그리고 거듭남 까지 말이죠.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그의 올바른 길 혹은 올바른 선택을 존중하고 종교로 신봉합니다. 사실 그마져도 모든 행적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예언의 선택 이였죠. 그러므로 그가 선택한 것은 '그 예언'인 것입니다.



9. 인류를 가장 빨리 종말 시키는 법. <피그말리온 효과>

<피그말리온 효과>, 개인적으로는 귀에 익숙한 음악처럼 들리는 단어입니다. 교사를 위해 처음으로 교육학이란 것을 시작할 때 배웠던 것으로 저에게는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실험입니다. 다들 어쩌면 한 번씩은 들어보았을 실험이기도 합니다. 우선 이 실험 내용의 간략한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이 효과는 로젠탈 효과라도 불리며 로젠탈은 이 실험의 발의자입니다. 사실 정성스럽게 키운 쥐가 미로를 더 잘 찾는데서 시작된 이 실험은 인간에게 특히 학생에게 직접 적용되었는데 먼저 진단평가를 본 다음 보통 수준의 아이들을 두 반에 나누어 배정한 다음에 이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한 반은 앞으로 수개월 내에 월등하게 향상될 반 이라 소개하고 나머지 한 반은 기대치가 없는 반으로 소개합니다. 물론 처음에 능력차이가 없었죠. 하지만 결과는?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수치로 능력을 인정받은 처음 반이 평균 이상의 성적을 그 반대 반은 평균 이하의 성적을 보였습니다.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어버린 것이죠.[각주:3]

사실 피그말리온이라는 단어의 어원 역시 이와 비슷한 사건의 그리스 신화를 기초로 한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피그말리온이라는 키프로스지역의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이 사랑한 것은 다름 아닌 조각상 이였습니다. 그 조각상에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던 왕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축제에 간절히 소원을 빌었고 그 결과 그 조각상에 고운 여인으로 변하였습니다.
 

조각에서 여인으로 변모한 것은 그가 지속적으로 예언한 덕분입니다.


 
왜 로젠탈효과를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바램 혹은 무의식적으로 들어간 예언이 실제로 사람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을 그렇게 만들고 말지요. 사실 이 효과에 대해서 미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실제로 재 실험 결과 생각보다 높지 않은 결과도 있었죠. 하지만 이는 분명합니다. 예언은 분명 영향을 미칩니다.

언젠가 인류를 가장 빨리 종말 시키는 법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습니다. 핵폭발? 유성충돌? 핵폭발이 있어도 벙커 안에서는 파티가 열리는 세상이며, 유성이 온대 해도 화성으로 가는 편도 우주선[각주:4]에 오른다면 적어도 비행선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모든 사람들이 곧 인류가 종말 할 거라고 믿게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벙커도 만들지 않고 화성 편도 우주선도 탑승치 않고 그리고 영웅도 나타나지 않고 멸망의 길로 갈 꺼라 생각합니다. 사실 약간의 과장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더라고 변함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분명 우리가 예언을 하게 되고 ,그 예언은 분명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 예언은 길게 이어왔던 선택의 본질로 향하는 길을 열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쟌다르크는 예언으로 영웅이 되었고 또한 그 예언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예언이 영웅을 탄생시킵니다.




10. 바위의 엑스칼리버를 뽑아들 영웅은 누구인가.

하지만 피그말리온 효과는 그들에게 속여진 예언입니다. 어쩜 후광효과(링크)와 비슷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 예언이 혹시 거짓임을 알고 있을 때도 예언 실현이 가능할까요? 만약 정말 거짓임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 후광 혹은 그 예언을 뿌리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전에 저의 개인적일 일 하나를 언급하려합니다.

저는 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꿈에 대한 해몽을 그다지 믿지는 않죠. 그래도 주변에서 꿈자리가 사납다면서 나에게 연락을 할 때면, 왠지 횡단보도 앞에서도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서 신호를 대기합니다. 이는 분명 의식적으로 아니라고 믿었던 예언마저 저에게 실현되고 있는 것 입니다. 저는 전혀 믿지 않았는데 말이죠. 

또 한가지는 주변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아무 숫자나 이야기 해봐요." 대답의 경우는 상당히 다양했습니다. 당연한 것이죠. 그것은 임의 선택이니까요. 그리고 다음 질문을 했습니다. "왜 이 번호를 선택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보통은 "좋아서요", "학번이였어요", "전화번호 끝자리예요" 등 으로 대답했습니다. 질문은 아무 숫자였는데도 대답은 임의의 선택이 아니라 예언된 선택이였습니다.[각주:5]

대부분은 예언으로써 선택한다.



이 이야기는 어떤 동생과의 대화중에서 발췌합니다. 그는 기독교의 많은 위인 중에서 요나[각주:6]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그는 신에게 어떤 지역으로 가서 예언을 하라는 명령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이 자신에게 위험하다 판단하여 도망치죠. 그러나 도망치는 배에 올라탔을 때 풍랑이 일고 결국에는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그는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는 신세이죠. 머, 고래의 위는 건강하지 않은가 봅니다. 그는 그 위에서 살아나 신이 예언하라 보낸 그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요나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신의 예언을 거절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쩜 우리는 예언을 받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혹시 내가 선대에서 부터 선택되어진 '그' 사람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바위에 꽂혀있는 칼을 내가 집어 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죠.

가끔 바위에서 칼을 뽑아 드는 상상을 합니다.

 

위의 세 가지를 잘 적용해보면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앞서 또는 선택한 후에 예언을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본능적으로 피그말리온 효과를 찾는 것일지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선택에 대한 결과를 회피하기 위한 방어기제 일지도 모르죠. 무엇이 진실에 가깝든 이것은 일치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예언'을 원합니다.


즉, 바위에 꽂힌 엑스칼리버를 뽑기 전에 우선 예언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언에 의존하는 성질은 어디에서 부터 일까요? 다음에는그런 예언의 주체를 생체학적으로 찾아보는 실험을 통해서 계속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1. 개인적으로 나는 회의론적 유신론자라고 하고 싶습니다. [본문으로]
  2. 요한복음 19:30 [본문으로]
  3. 이때 성적이 떨어진 집단에 대한 효과를 '골렘 효과'라고 하고 비슷한 실험으로 위약효과로 알려져 있는 '플래시보효과'가 있다. 이는 실험자들이 가짜 약을 먹고도 신경증이 완화되는 효과며 그 원인은 피그말리온과 비슷하다. [본문으로]
  4. 이미 이 여행의 경쟁률은 400명을 넘어섰다. 참고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111712411&code=970211 [본문으로]
  5. 모든 사람이 그렇게 대답한 것은 아닙니다. 몇 몇은 아무런 숫자를 뽑으라 하지 않았냐 하고 반문했죠. 수학전공자들이였습니다. [본문으로]
  6. 열왕기하 14:25 [본문으로]



이전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즉, 오인된 정보 또는 오인되는 주변상황에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인 논리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에게 정확한 정보가 제공된다면 우리는 선택이 가능한 사람인지 궁금하게 되는데 이런 답을 얻기 위해서 유명하고도 반인권 실험 유명한 사건들을(하지만 중요한) 언급하고 싶습니다.


 3. 상황을 안다면 선택가능한가? - 스탠포드 감옥실험

  항상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들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서술할 실험은 그 ‘주의’의 부족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던 실험 중 하나인데, 실재로 이 내용은 엑스페리먼트(The Experiment, 2001)라는 영화와 소설로 각색이 된 실험으로 실재의 실험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이제 이 실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이렇습니다.

 
실험은 스탠포드 대학교 심리학부 지하에서 시작되는데, 24명의 지원자를 받아 교도과과 죄수로 나누어 그 역할에 맞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지원자들은 중산층 가정에서 비교적 좋은 가정환경과 교육환경에서 자란 남자들로 범죄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실험의 목적은 교도관과 죄수의 역할을 통해서 감옥상황을 이해와 그 특별한 상황에서의 몰개성화[각주:1]를 확인함이였습니다. 물론 그 목적에 대해서 피 실험자들에게는 공지하지 않았습니다.

 

스탠포드대 감옥실험은 소설 및 영화로 제작 되었다.


 첫 만남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나눌 때 피 실험자들은 교도원의 역할에 대해서 불편해서 죄수를 신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합니다. 하지만 피 실험자의 역할에 관해서는 선택이 아니라 임의로(랜덤으로) 뽑아서 결정하였고 선발된 9명의 교도관은 카키색 단체복을 입었으며 제압용 곤봉과 눈을 가릴 수 있는 선글라스를 지급하고 3인씩 3교대로 교도관 업무를 실시하였고 죄수로 선발된 9명은 3명씩 3개의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각주:2]

 
교도관들은 죄수의 집에 들어가 그들을 연행했으며 수감되는 과정 또한 동일하게 하였는데, 특히 죄수 역할의 피 실험자에 대해서는 모의 감옥이라 설명치 않고 스탠포드 주립 교도소라고 고지한 채 연행함으로써 더욱더 실험에 집중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실재적으로 실행되는 실험이긴 하지만 피 실험자 스스로 자신이 실험 중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언제나 자신이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있음을 미리 공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놀랍게도 예측을 벗어났고 생각지도 못한 이른 순간 통제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첫날에는 분위기가 좋았으나 사소한 갈등으로 시작한 교도관과 죄수들이 각각의 의견들과 요구하기 이르렀고 끝내는 권력구조의 양상을 띄었습니다. 결국 둘째날 새벽에 터집니다. 한 간수는 밤새도록 죄수들을 깨워 번호를 외우게 하였고 이에 반항하여 죄수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맙니다. 하지만 이런 점이 오래가지 못했고 금새 교도관들은 진압하였는데, 이에 보복으로 폭동을 일으킨 죄수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각주:3] 육체적인 제제는 애초에 금지했기에 교도관들은 언어적으로 그리고 위생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합니다.[각주:4]

 
 이런 와중에 한 죄수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버립니다.

결국 상황이 인간을 만들어 버렸다.



 실험진은 그 죄수를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이런 결과에도 굴하지 않고 실험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죄수들 사이에서 퍼지자 저항은 격렬해졌고 결국 교도관들은 신체적인 학대가 시작되었고, 다섯째 날에는 성적인 학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상황이 실험임에도 불구하다는 것을 모두 아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 실험은 단 5일만에 종료됩니다.

 
이렇게 설명하기도 긴 이 실험이 단 5일만의 일인데, 제가 더 의아했던 부분은 연구진입니다. 연구진들은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그 실험을 계속해갔습니다. 특히 5일째 종료를 한 이유도 연구진 내부의 의견이 아니라, 이 실험자의 총책임자의 동료이자 애인이 이 실험을 견학하러 왔다가 처참한 실험 현장에 대해 경악을 한 후 였던 것이였습니다. 또한 한가지 더 의문은 피 실험자 전원은 언제든 이 실험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문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그 자리를 지켰다는 점입니다. 대체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4. 상황을 알고 있다면 선택가능한가?

 
이 글의 오랜 방황을 이제 마무리 짓고 본래의 글귀로 돌아가보자면, 위 실험은 지난 글과 다르게 실험자들이 자신이 실험자임을 다 알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자신이 이 실험에서 뛰져나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나에게 누군가 실험중이고 곧 너는 맞게 되는 상황이 올꺼야 그럴떄 싫으면 꼭 나오고 싶다고 말해 라고 제시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실험을 포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실험에서 포기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2명의 포기자가 있었는데, 첫번째 포기자는 위에서 언급한 정신착란을 일으킨 죄수[각주:5]이며 한명은 폭동을 주도하여 독방에 갖힌뒤 온갖 고문을 당한 사람이였는데 이 사람은 연구진이 실험에서 포기하자고 제안하자 자신은 죄수이므로 나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후에 오랜시간 동안 설득을 해서 실험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정확한 정보가 제공된 상황에서 선택가능할까요?"

당신이 정보가 있다면 당신의 선택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실험을 뒤돌아 본다면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은 거짓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복종했으며 자신의 모든 선택이 자신의 역활 혹은 거짓 상황에 매여있었습니다. 즉 내가 지금 선택하는 것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상황이 나에게 이렇게 선택함을 강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선택의 역활이 나에게서 나오지 않고 나의 의지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신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요?

 
연구진의 행동을 보아도 이 점은 확실해 집니다. 사실 연구진들은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통제가능한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당하고 비도덕적인 사건 속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이 실험의 피 실험자는 교도관 역활과 죄수 역활뿐만 아니라 연구진 그들도 스스로도 실험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자유의지를 획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당신은 지금 당신 주면의 상황의 역활에서만 선택하는 맞춤형인간은 아닌가요?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면 어떤 업체의 목표가 있다고 치면, 그 목표에 따른 진행이 이어짐에 따라 각자의 역활을 맡게 됩니다. 학교로 따지면 교장-교감-교사-학생의 이런 역활들 말입니다. 하지만 언제 부터인가 교육의 목적이 학교의 목적으로 도치되고, 교사의 목적이 교장(혹은 교감)의 목적이 투사 되는 순간, 교육의 선택은 학교의 발전에 있고 교사의 선택은 교장(혹은 교감)의 이력서(혹은 결과보고서)의 한줄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경우 당신이 학생의 역활이라면 당신은 확실히 당신의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예를들어 학교의 목표가 혹은 욕심이 그리고 사회에서 제공하는 모든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능이라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당신이 학생이란 역활이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습니까? 저는 왠지 답을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당신"이란 개념은 코너에 몰린 것 같습니다.


  5. 결과를 알고 있다면 선택가능한가? - 밀그램 전기충격 실험

 
또 한가지 선택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과연 "선택을 믿는 당신은 만약 결과를 알고 있다면 선택 가능한가?"입니다.

조금 다르게 질문하자면,

<죽음 후에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갈림길 앞에서 먼저 도착한 사람이 나중에 도착한 이에게 오른쪽 길로 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정표에 분명 지옥이라고 써있고, 유황냄새 나는 불이 저만큼 보입니다. 그럼 당신은 오른쪽으로 가겠습니까?>

이에 관련된 실험 한가지를 다시 열어보면, 스탠포드대학의 모의감옥실험 이전에 있었던 밀그램 전기충격실험을 들 수 있습니다. 실험은 간단한데, 사람들을 2인 1조로 묶어 한명을 교사, 한명을 학생으로 나눕니다. 그 다음에 학생을 전기의자에 앉치고 전선을 교사 앞에있는 15볼트에서 450볼트까지 단계적으로 전압을 올려 충격을 줄 수 있는 장치에 연결합니다. 그 다음 교사는 학생에게 문제를 내고 틀리면 15볼트씩 올리면서 충격을 주도록 합니다. [각주:6]

(이미지 출처 : 위키)



 참고로 이야기 하자면 15볼트는 따끔한 정도이며 450볼트는 즉사입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요? 결론 부터 이야기 하자면, 65%의 사람들이 450볼트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것도 큰 고민 없이 말이죠. 그들은 실험을 위해 살인과 동일 수준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제 이 실험을 다시 이야기 하자면, 실제로 피실험자는 '교사'한명이였습니다. 즉 학생역활은 이 실험의 고용된 스탭이였으면 당연히 전기의자는 가짜였습니다. 이때 학생을 '연기'하던 그들은 교사 역활이 누른 볼트수를 방안에서 몰래 볼수 있었으며 그 볼트 수에 따라서 고통스런 연기를 했던 것입니다. 실험주제도 사실 <권의에 대한 복종>이였죠.

 실험 후엔 실험에서 교사역을 했던 실제 피실험자는 실험 후에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선택을 했던 것에 충격을 받아 정신 치료까지 받았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실험 책임자는 비윤리적 실험이였다는 비판 속에 대학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실제 모집 홍보물(출처 : 위키)


 그들은 정말 450볼트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은 이미 그 전기의자의 충격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택했습니다. 450볼트의 살인을. 역시 의문인 점은 그들이 굳이 실험을 통해서 살인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어쩜 우리는 복종하는 것이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이 실험을 적용하여 위 질문을 대답하자면 지옥 문앞에서 이런 후회를 하게 될 것 입니다. "어? 아까 어떤 사람이 지옥으로 가라해서 여기로 왔습니다."라고 말이죠. 즉, 결론을 알더라도 우리는 어떤 권위에 대해서 복종하는 심리적인 기저를 지닌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더 극적으로 설명하자면 그 것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나쁜 선택이라 할지라도 권력이라는 것에 우리는 '선택'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실험들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복종한다는 것을 말이죠.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복종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권력에, 어떤이는 연말 연봉협상에, 또 어떤 이는 실험진의 450볼트 전기충격하라는 명령에.


 
6.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이 불가능한가?

 
이렇게 글을 쓰고 보면 우리는 전혀 선택불가능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은 타인이 심어준 비의도적인 명령이거나(주제1) 혹은 정보의 순서에 따라 오판한 것인지(주제2) 혹은 상황에 너무 적응해버린 탓인지(주제4),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복종일것인지(주제5)...

복종은 우리의 본능일까?



 
사실 그렇다면 우리가 갖어야 할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게임을 해서 항상 이긴다고 하면 그것이 게임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맨유가 항상 이겨서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지는 적이 있어 더 재미있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선택이란 것을 계속 되뇌어봐도 그 결론이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저 나란 존재는 주변 자극에 너무나 쉽게 그대로 반응하는 수학문제집의 해설서 같은 느낌입니다.

 
사실 신에게 조금 묻고 싶은 면이 있는데, 그것은 그대가 갖는 신이라는 존재는 선택을 한 것인지 말입니다.

과연 우린 '선택'을 선택할 수 있을까?



 
하지만 분명 '선택'이란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무엇인가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 나는 확신합니다.(혹은 하고싶습니다.) 그러기에는 비극적인 실험결과만이 아닌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며, 무엇인가 이런 비극을 종료시켜줄 이야기를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가 나 자신도 모르게 복종하는 것이 본능이라면 우리가 스스로 '선택가능하다.'라고 느끼는 것은 분명 다른 곳에서 나오는 직감 아닐까요? 그 직감에 대한 처절한 증명은 다음글로 미루겠습니다.


  1. 집단에 소속되어서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본문으로]
  2. 나머지 인원은 예비인원임 [본문으로]
  3. 특히 다른 죄수들을 뒤돌아 있게 만든후 팔굽혀 펴기를 한 것은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방식과 유사했다. 유독 더 독특한 점은 교도관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본문으로]
  4. 대소변을 양동이에 보게 하기도 함. [본문으로]
  5. 강제로 실험에서 제외시킴. [본문으로]
  6. 이때 실험자에게 제시한 이 실험의 주제는 <징벌에 의한 학습효과>였다. [본문으로]








봄은 봄이다.

아무리 지금이 어떻더라도,

어느새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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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또한 그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임을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사실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인생은 다분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라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에 먹은 대로 살게 된다.”고 영화에서 그리고 새 책에서 또는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느끼는 삶의 방향은 어떤가 묻고 싶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관여하는지 혹은 자기가 가는 방향이 정확한지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힙니다. 이것은 고민할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보통 희망적 인생관은 '현실'이라는 숫돌에 갈려나가는 순간 비극적으로 바뀌고는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희극’보다는 ‘비극’이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1. 우리가 우리의 삶을 선택하는가? - 동조현상 -

 우리나라의 기분 좋은 특성은 아니지만 한번쯤 언급할 가치가 있는 성향이 있습니다. 2002년 시청 광장에 붉은 물결을 띄웠고 같은 해 같은 장소를 촛불로 채운 과거의 성격이며 2002년 이후에 계속되는 K-리그의 침체와 미군과의 충돌에 무지한 현재의 성격입니다. 좋은 말로 하자면 단결력이며 나쁘게 말하자면 일면 냄비 근성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뉴스뱅크F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그것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윤호상, 김철민이란 사람의 대학가에서 개그 공연입니다. 현재 제가 알리기로는 17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학로 등 거리에서 개그 공연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을 홍보하려는 것은 아니고 어렴풋이 남아있는 그들의 개그 한마디 입니다. “~~~~(각 나라의 웃음에 대해 설명 중) 한국 사람들은 언제 웃는 지 알아?” “(관중들).....” “다른 사람이 웃어야 웃어~ㅋㅋ” 이 말을 하고 나서 개그 2인조가 깔깔대고 웃었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웃고 그 다음에 제가 웃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아주 멋지게 정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애쉬(Solomon Asch)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격과 비슷한 심리를 실험을 통해 제시하였는데, 실험의 내용은 원탁 위에 7~9명의 사람들을 둘러앉게 한 뒤 다음 그림과 같은 문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다음 중 같은 길이의 막대는?>

당신의 눈에는 X와 같은 막대는 어떤 것인가?

 

 답은 무엇일까요? 이 실험의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모든 사람이 “A”라고 답하였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만약 실험이 이대로만 진행된 것이라면 아마 이 실험은 단지 착시현상에 대해서 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의 장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답변자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사람은 피실험자가 아닌 이번 실험의 스태프 즉 이 실험에서 정말로 실험 당하는 사람은 원탁에서 마지막 답변을 할 1人이였다는 것입니다. 그 들이 먼저 제시한 결과는 “A”였습니다. 만약 "A"가 당신과 생각이 같았다면 당신은 이 실험에 당한 것입니다. 왜냐면 당신이 눈이 보는 것처럼 답은 “B”이기 때문입니다.[각주:1]

 이 외로운 피실험자는 후에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되묻자 처음엔 자신의 눈과 뇌에서 “B”가 답임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이 모두 "A"를 부르자, 자신의 눈이 틀렸다고 생각해 같은 답을 이야기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런 말이 빠질 수 없습니다. “왜?”
 
 이런 현상은 동조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실험이라면 더 다양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약 3~5명이면 충분히 길거리에서도 가능한데, 3~5명이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하늘을 응시하면서 신기한 표정을 지어보면 됩니다. 그럼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 중에 무의식적으로 같은 곳을 응시하는 사람이 생기는데, 이중에 더 재미있는 일은 가끔 무엇이 신기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신기한 표정을 내비치는 사람들도 생긴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판단하는 대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정말 확실한 것인가요? 나는 삶의 선택 혹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하는 것의 어떤 부분은 나의 선택과 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자신을 소유함에 대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에 희극을 쓸 수 있을까요?

 이런 말엔 이런 반박이 예상가능합니다. "그 동조는 상황에 대한 자신의 선택이라 말할 수도 있다."라고 말입니다. 즉 답을 알고 있지만 체면상 혹은 분위기상 그리 선택했던 자신의 판단 이였다고 말입니다. 그럼 다음 에쉬의 또 다른 실험을 다시 주목해 봅시다.


2. 자신의 판단은 늘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되는가? - 인상 실험 -

 이번엔 피실험자 누구를 속이는 실험이 아니라 10명 전원이 피실험자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먼저 가상에 인물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하는데, 한 집단에게는 긍정적인 단어 제시 후 부정적 단어를, 한 집단에는 반대로 부정적 단어 제시 후 긍정적 단어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피실험자에게 그 가상의 인물에 대해서 평가해보도록 하죠.

같은 단어의 조합이지만 순서에 따라 평가가 다르다.



 분명 똑같은 단어들을 제시하였으나, 긍정적인 단어를 먼저 들은 A 그룹에서 이 가상의 인물에 대하 평가가 더 좋게(긍정적으로) 나왔습니다. 같은 설명인데도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판단하는 판단요소가 어쩜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단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순서만 뒤바뀌어도 다른 판단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원인은 바로 처음 들은 단어가 선행 이미지로 굳어져 따라 나오는 이미지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즉 긍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제시한 그룹은 처음으로 좋은 이미지를 갖은 상태(인상)를 갖추고 나중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이미 들어있는 긍정적인 이미지에 희석시키면서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현상을 이용하려는 듯 오늘 아침의 보험 광고에서도 좋은 말만 떠들다가 마지막에 아주 적당한 글씨와 속도로 독소조항을 읽어버리죠.

  결론적으로 '가난해서 빵을 훔친 장발장'은 구제 받을 수 있으나, '빵을 훔친 가난한 장발장'은 감옥으로 가야 합니다. 이게 ‘세상’이란다 발장아.

가난해서 빵을 훔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낫다.




3. 당신은 당신의 주변에 대해서 선택 가능한가?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의 정보에 무기력하게 반응하고 굴복하고 맙니다. 그러면 가장 처음에 이야기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선택 가능한 존재'인가?

정말 신은 당신에게 선택에 대한 자유의지를 준것이 확실한가?


  저 또한 무엇보다 자유를 선택하고 싶다만 정말 그런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위의 아주 작은 두가지의 실험만으로 선택의 가능성을 판단한다면 성급한 일반화 일 것 입니다. 또한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위의 실험은 
당연히 이미지가 굳어지는 상황 속 이였고 피실험자가 그런 이미지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과연 당신은 선택가능 한가?



 즉 단지 인상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사람이라면 갖는 당연한 오류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은 이미지에 대해서만 오류를 범한 것이고 그 후의 판단은 자신이 하는 것이라는... 분명 그런면은 존재 합니다. 그럼 그 부분을 인정하더라도 아직 우리가 자신을 선택하는 지에 대해서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그럼 이제 방향을 바꾸어봅시다. 과연 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다 안다 할 때 과연 자신이 원하는 것은 선택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오류의 방향이 남이 던져준 정보 였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잘못 판단하게 되는 자신이였는지에 대해 다음글로 잠시 미루어 보겠습니다.
  1. 사실 나는 당신에게 약간의 거짓말을 했습니다. 마지막 1人의 답이 오답인 사람은 전체 실험의 1/3이였습니다. [본문으로]

 휴직 교사에서 복직 교사로 지내다 보니 어느새 블로그에 손을 놓은 지 몇 달이 되었다. 사실 살짝 불안감이 드는 이유는 뭘까? 왠지 3월의 다짐 4월의 포기를 반복하는 나의 학창 시절의 반영을 그대로 실현하는 건 아닌지. 분명 내가 손때를 묻힌 수학책의 대부분은 집합과 명제였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반복적인 포기에 반항하기 위해 3월의 학교 폭풍 속에 조용히 키보드 질을 시작해본다.

 
1.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전 글에서 완벽한 진리를 말하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요상한 진실에 직면했다. 만약 진리란 것을 유토피아에 비유해보자면,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는 적어도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닌 무언가 존재해야 한다. 어떤 유토피아 속의 자신을 상상하든, 꿈에 부푼 자신을 떠받들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종(혹은 하인 혹은 도우미)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게 우리는 완벽함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덜 완벽함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언제나 진리의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수학에서 그 희생양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그 문제는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공리로 도망치는 일이다. 공리를 세우고 그 위에 수학을 한층 쌓아가는 일. 그 공리만 인정된다면 완벽한 논리를 향할 기분 좋은 진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은 저번 글 막바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연역적 명제는 전체의 축소만을 가져온다.[각주:1] 즉 말만 다를 뿐 우리가 원래 인정했던 것을 다시 확인하는 식이다. 명제를 확장하겠다고 공리‘만’을 확장한다면 그것은 점집에서 점술가가 던진 한마디를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각주:2]

연역적 진실은 작아질 수 밖에 없다.



 "히키코모리"라 불리는 자들에 대해서 혹시 들어보았는가? 우리나라 말로는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며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방에 갇혀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사실 연역적인 사고로만 명제를 키워간다면 그 끝은 히키코모리랑 유사 할 것이다. 자신만의 방에서 자신만의 만족을 갖고 사는. 수학도 마찬가지 이다. 연역만을 강조하는 진리는 결국에는 어느 부분에서 종점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다. 혹은 그 극한[각주:3]이 수렴한다 하더라도, 그 크기는 우리가 이미 정해놓은 대명제(맨 처음 명제)를 벗어날 수 없다. 결국 히키코모리와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기에 진리를 찾는 사고 방향을 더 키워야하는 것이다.

히키코모리들은 결국 자신의 틀에 갖히게 된 것이다. 진리도 이럴 수 있다.




2. 약한 진리에 대하여.

 이와 비슷한 논쟁을 과학에서 가져와 보고 싶다. 바로 아인슈타인과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이다. 이 둘은 양자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예측 가능한 양자역학을, 보어는 코펜하겐 해석[각주:4]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양자역학 모델을 선보였다. 이 와중 유명해진 아인슈타인의 말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란 명언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해석과 사고 실험[각주:5]들을 통하면서 명언은 지금까지 남았지만 아쉽게도 보어의 모델이 진리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즉, “예측 불가능”유일한 예측 가능한 변수인 것이다.

 이를 수학에서 다시 보자면 이제 우리는 ‘예측 가능한 진리’이란 편견에서 잠시 물러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덜' 진실하지만 '충분히' 진실하다고 말할 것들은 무엇일까?  또한 우리는 그것을 어찌 성립하는지 확신하는 것일까? 그 고민에 집합에서 잠시 다루었던 하나의 개념을 다시 들어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들어온 것은 그것은 바로 바로 퍼지집합이다.

양자의 예측 불가능을 수학에 적용해 보자.



 퍼지집합이란 어느 집합에 속하는 정도를 확률적인 시각으로 표시 한 것으로 0과 1이라는 선택을 (참고로 0은 절대적인 거짓, 1은 절대적 참을 의미한다.)  0<=x<=1이라는 것으로 확장시킨 모델이다. 자세한 설명은 링크로 대신한다. (이전 글 링크)

 '포함된다(=1), 포함되지 않는다.(=0)'란 선택에서 좀 더 확장된 기회를 제공한다면 우리가 편협했던 명제 관계를 좀 더 넓힐 수 있겠다. 즉, 포함관계라는 인과관계에서 다 이루지 못하는 진리를 이루는 하나의 가능성 약한 포함관계인 퍼지집합을 통해서 명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퍼지 논리에 대해서 나는 대학교 이상의 수준을 기록하려고 하진 않을 예정이다. 나도 그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펼칠 능력자는 아닐 뿐더러 오해의 소지를 더 만들 가능성이 있기에 기본적인 내용은 위키 링크로 대신한다.(그 내용은 위의 퍼지집합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판단하는 명제를 보어의 양자역학과 비슷한 확률적인 개념으로 접근하여 이전에 판단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수량화하고 논리화 하여 그 체계를 구성하는 일이다. 즉, 생각하면 다 이루어지는 100% 완벽한 유토피아는 어려우니 내가 조금 귀찮더라도 걷거나 말하거나 하는 99%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다.

진정한 유토피아에는 불완전함이 섞일 수 밖에 없다.



3. 퍼지 논리가 가리키는 진리는?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논할 중요한 한 가지가 아직 남았다.  '수량화된 진리'가 갖는 의미이다.  이 부분에서 오해할 여지를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오해의 가장 큰 정점은 바로 ‘진리의 줄 세우기’가 가능한지의 여부이다.

 만약 '0.99 진리'와 '0.01 진리' 사이에서 우리가 '0.99 진리'이 더 무거운 진리일지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단정한다면 이 이야기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예수도 석가도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이론들을 퍼지 논리 점수를 통해 '수량화'한다면 아주 후하게 주어도 '0.01 진리 주의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진실한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 이런 나의 말에 동의 할 것인가? 사실 이 사실은 나도 동의하기가 어렵다.

 더 자세한 예를 들자면 어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퍼지 논리 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점수는 몇 점일까? 하지만 모두가 그 말에 감동하지 않는가. 이런 모순의 원인은 '수량화'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수량화’가 그 명제를 진실 되게 만들 수 있을까? (사실 여의도 기독교는 그럴 수도 있다. 0.99 진실의 법칙으로 일본은 분명 쓰나미를 원수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 했으니.[각주:6]) 하지만 일반적인 기본 교육을 통한 사람이라면 예수의 '0.01' 진실에 손을 들어줄 것이다.

 다시 말해 '수량화'는 '의미'를 대표하진 않는다.

이런 수량화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은 완전한 넌센스다.




4. 수량화에 빠진 진리 구하기

 그렇다고 지금까지 수고했던 수량화된 진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결론짓는다면 그 또한 극단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렇다면 '수량화된 진실'이란 것에 다시 의미부여를 해봐야 한다. 이런 의미부여는 우리가 '수량화'를 선택했던 수단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 수단은 바로 '확률적'과 구별[각주:7]된다. 다시 말해서 0.51은 0.49이라 할 때, 우리가 좀 더 쉽게 이야기 하는 51%가 49%보다 2% 더 진실이 될 확률이 있다.”란 것이 아니라 2% 정도 더 보편적인 선택을 받는”진실이란 말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명제는 참/거짓에서 한 단계 더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51%와 49% 양립할 수 없는 명제라 할지라도 진리로 동시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0.01 진실'이란 것은 우리가 1%의 확률 빈도로 선택한다는 것.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독배’와 예수의 ‘원수 사랑하기’는 참으로 소수만이 선택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들을 성인이라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리 확률적으로 이를 정의해 보려 해도 ‘수량화’가 진실이라는 벽을 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다. 이런 면에서는 왠지 데카르트적인 절대적인 진실은 사라지고 푸코가 말하는 특정 법칙이나 관계에 의한 진실[각주:8]이 수학의 표면으로 자리 잡는 듯하다.

완벽한 형태가 아닌 관계가 말해주는 진리



5. 진실이란. 명제 파트를 마치며

 집합을 거쳐 명제에 대한 글을 써보면 진실이라는 것의 이중성이 보인다. 분명 어떤 흐름을 보여야하지만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이라는 것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진실이란 것은 어떤 절대적인 흐름을 바라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포함과 불 포함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부터 시작해서 집합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명제를 이야기 했다. 그들 사이에는 정확한 연결고리를 통해서 내가 알고 싶은 결과를 배출해낸다. 이런 고리를 절대로 끊을 수 없게 단단히 묶어 진실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연역을 통해서 보았다. 하지만 연역의 결정적인 문제는 고리는 온전하다 그 고리의 시작이 어딘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떤 '진실'이라는 것의 심각한 오류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발 물러나, 절대성을 버리기로 한다. 즉 상대성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인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여 '진실'이란 것을 '아무것도 아닌'것과 동일시하는 것 또한 피하도록 하자. 자신이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또 어떤 다른 것이든 지적 생물체(인간)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버리면 '진실'이란 호칭을 부여하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생겨버린다. 수치화된 점은 그저 그 명제의 빈도 혹은 확률로 제한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하려니 '진실'을 정의하는 일은 점차 미궁으로 빠질 수 밖에.

 그렇다면 진실이 피해야 할 그 곳은 어디일까? 자만하고 고집스럽지도 않으면서 적절히 의미화가 되는 그곳은 어디일까?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는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젠 '수치적 진실'이나 논리적 진실' 따위는 수학에서 찾을 수 는 없을 듯하다.[footnote][/footnote]

 하지만 수학 외적인 곳에서는 어느 정도 해답이 있지 않을 까 한다. 우리가 부르는 '공감'같은 단어에서 말이다. 하지만 '공감'만으로는 우리의 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실수를 포함해서는 안 되니, 나는 '조심스런 공감'정도로 마무리 짓고 싶다.
 

'조심스러운 공감'을 갖던 지난 날을 위해서~



  1. 그림과 같이 집합론 적으로 생각했을 때 명제의 진행에 따른 진리의 축소는 피할 수 없다. [본문으로]
  2. 그렇다고 해서 공리를 기반으로 한 수학이 의미 없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시 한다. [본문으로]
  3. 그 극한이 수렴하지 않고 진동 발산한다 하여도 결과는 변화지 않는다. [본문으로]
  4. 훌륭한 네이버 캐스트를 링크한다. 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1961 [본문으로]
  5. 어떤 실험을 제시하더라도 측정이나 도구의 불완전성에 의해서 보어의 승리가 확정될 수 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6. 여의도 기독교에 대해서 욕할 생각은 없으니 이번 발언은 분명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 [본문으로]
  7. 의미상의 구별이다. 일단 퍼지 집합을 구하는 과정에서 확률은 빠질 수가 없다. [본문으로]
  8. 그가 말하는 상대적인 진리를 어쩜 보어의 양자이론 혹은 퍼지 논리의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볼 수 있다. [본문으로]


진실게임 "진실만 말해라"


잠시동안 다분히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자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승에서의 생을 다하고 저승의 문턱에서 당심을 심판할 야수와 마주하고 있다고 하는데

나에게 영생과 영벌의 구별이 너무 어려워서 당신에게 기회를 주려합니다.




그 기회란 단 한번의 말로 완벽한 진실을 말하는 것 입니다.



당신을 원하는 야수가 진리에 굶주린 침을 흘리며 노려보고 있는 이 순간

자칫 이들에게 거짓을 고백하다 걸리게 되면 가차없이 돌이킬수 없는 곳으로 가게되는 상황이라면 

당신의 실수를 바라는 이 야수들에게 어떻게 진실을 이야기 할까요?


다시 말해 어떤 100% 진실을 이야기 할 것인가요?


이집트 신화의 명부의 신 오시리스. 심판의 시기에서 당신의 진실은?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실생활에서 아주 어렵다. 맘에 들지 않는 상사가 술자리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솔찍하게 말해달라고 한다하여 그 진실을 말하기는 너무 어려운 세상아닐까요?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혹은 우리의 말로써 진실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존재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당나귀귀를 외칠" 숲을 준다하더라도

정말 그 이야기가 진실일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럼 다시 돌아와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게 100% 진실임을 어찌 증명할 것일까요?


계속 되는 질문이 어지럽지만 이제 진실게임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


 참과 거짓이라는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명제를 도입했다.(이전링크) 보통 명제의 구조를 보자면



'(____ 1 ____)이면 (____ 2 ____)이다.'


란 꼴로 나옵니다.



이것을 풀어말하자면

"(1)이 참이라고 '가정'했을때, 과연 (2)가 참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1)번 자리를 가정, (2)번 자리를 결론이라 하고

그리고 간편하게(1) => (2) 라고 표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을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 이 구조로 환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명제도 일단 구조로 환원할 수 있다. 문제는 증명이다.


이처럼 어떤 것의 진실을 이야기 할때 가정과 결론이라는 도구로 말하면 대부분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죠.

이렇게 말할 수 있어도 이것이 진실인것을 '증명'해 내야 하는 것 입이다.

그런데 이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예를들어, <그자식 진짜 개념 없다.>라고 한다면 'x=그 자식 => x는 개념없다.' 라고 고쳐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완벽하게 참이나 거짓이로 구별하기 어려운데, 위 예에서는 '개념 없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명제의 개념 - 링크)

그러니 당신이 진실이라고 이야기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만약 당신이 야수 앞에서 자신의 영원을 걸고 진실을 이야기 해야 한다면? 함부로 말하지 못할 진실입니다.


 그렇담 우리가 무엇이든 진실처럼 이야기 하더라도 그게 진실인지 증명할 수 없는 것일까요?



진실에서 100%진실을 뽑아내는 법


 아직 실망할 단계는 아닙니다. 진실이 뭔지 정확하게 말하고 싶을때, 혹은 어떤 상황에서 완벽한 진실을 말하고 싶을 때에 쓰는 방법들을 연역법이라 합니다.




연역법이란 : 이미 증명된 하나 또는 둘 이상의 명제를 전제로 하여 새로운 명제를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연역(演繹, deduction)이라하며, 이러한 연역적 추리의 방법과 절차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을 연역법이라 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백과사전은 조금 어려운 말로 써야 기분이 풀리나 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미 진실이라는 몇가지를 기초로 새로운 진실을 만드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단,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게 진행해서 진실을 뽑아 내야 하는데, 이 연역법의 방법이 한가지는 아닙니다.

위키 링크가 있으니 한번 구경하고 오셔도 좋습니다.(연역 링크)

그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삼단논법인데, 다시 위키를 링크하지만 아래쪽은 보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삼단논법 위키링크)

삼단논법을 이용한 여러 논리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게 딱 이거 하나로 모아집니다.


바로 부분집합입니다.


A ⊂ B이라고 해보면,

A의 모든 것들은 결국 B에 들어갑니다. 이때, 이런 명제를 만들면 참이 되는 것입니다.

[A라면 B이다.]란 것은 참이 되는 것이죠. 삼단논법은 이를 뿌리로 합니다.


삼단논법의 가장 흔한 예를 들어보면


모든 동물은 죽는다. 

쥐집단은 동물이다.

쥐집단은 죽는다


그림을 보면 그저 위의 이야기는 수학적으로 부분집합 이야기가 되는 것 입니다.


쥐의 집합 ⊂ 동물의 집합  ⊂ 죽는 것의 집합


포함관계를 이용해서 완벽한 참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죽는 다고 말하기엔 너무 슬프다.)

 그러니 당연하게

쥐집단 죽는 것의 집합이 되는데,

그 렇다는 것은 모든 새밝은 쥐집단은 죽는 것의 집합의 표함이란 뜻이므로, 결국 쥐집단은 죽는다란 결론과 같습니다. 이처럼 삼단논법의 기본방법은 우리가 집합에서 가장 편하게 썼던 부분집합의 다른 해석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이 죽고 쥐집단이 동물이라는 두가지 진실에서 새로운 진실, '쥐집단이 죽는다.'를 얻어낸것이다.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가정을 공집합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공집합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어서 어디에가도 부분집합이 됩니다.


다시말하기 위해 아래를 보면

[ø인 것은 모두 A이다]라고 해보자. 당연히 ø ⊂ A이므로 참이됩니다.



이제 진실인가?.... 진리의 합의?


 이제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 하는 법을 배웠기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을 하늘의 나라 앞의 야수에게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가장 좋은 진실 하나가 있다면 멋드러지게 그 부분집합 이용해서 진실을 말하고 즐거운 발걸음을 하려는데,


문제가 하나 생겨버립니다.

바로

불완전성의 원리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 클릭)입니다.

요약하면


정말 진실이라도, 아니 진실 같아도 그것이 완벽하게 증명될 수 없다.



앞의 남자가 뒤에 손가락을 꼬은 이유는?



 이게 무슨 날벼락일까요.

어떤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그 근본은 결국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런 것입니다.

부분집합을 설명하고 죽음을 설명하고 쥐가 죽는다는 것을 설명해도 결국엔 이상한 개념의 벽에 막히고

결국에는 잘 모른다는 0.1%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진실이 100% 증명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말 동물은 다 죽는 것인가? 하는 것 부터가 문제입니다.)


결국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서있고, 야수는 미소를 짓겠죠.


그렇습니다. 사실 어떤 것도 절대적이진 못하지만, 절대적인 위치를 갖어야하는 것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실에 합의를 합니다. (그것을 공리라고 한다.) 그 합의점이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물음표에서 벗어납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인정하는 논리의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진리는 기초적으로 합의입니다.

죽음을 이야기 할 때, 이전에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음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단지 내가 나로써 합의한 공리인 것이죠.

나와 나의 생각의 공동체는 살아있음을 합의하고 내 존재가 죽음에 이른다는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의 없는 진실이 없습니다.



축구 경기도 하나의 합의로 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 다른 약점이 있다면, 진리를 더이상 넓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분집합, 즉 연역으로 만들어낸 진실은 이미 합의 된 진실에 이미 일부였다는 것이죠.

결국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다.


결국엔 지금까지의 노력이란 것은 결국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을 다시 써 놓은 것 뿐이라는 것이거나, 가정을 공집합을 두어서 별 쓸데도 없는 진실만 퍼부은 것입니다.


당신이 고민한다 하여도 결국엔 아무것도 해놓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일단 진실의 생성보다 축복의 길로 가는 것이 중요하니, 다시 야수의 앞에 돌아와보면,

마른 침이 계속 넘어가는 상황에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이제 축복의 길로만 들어서면 된다면 아직 끝은 아닙니다.


" 진실이 존재한다면 당신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럼 이제 상황은 되바뀌게 됩니다. 야수는 진실을 판단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어떤 진실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야수는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 증명은 결국 나의 고민(불완전성)에 다가섭니다.


만약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진실이란 집합이 공집합이 되므로 결국엔 이 명제는 참이 되죠. 그러므로 나는 축복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포기 하지 마라.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없어도 과정으로 이룰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고집스런 진실은 결국은 거짓입니다.

이 때문에 고집스런 진실과 이별할 필요가 있다. 대신 공리와 합의 안의 독립적인 진실과 살면 되는 것 입니다.

이제는 독립적인 진실로 이해해야..


 진실을 말하는 명제가 중요한 부분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연역이든 삼단논법이든 진실을 말하기 위한 이 구조를 만드는 것, 이 구조로 우리가 올바른 사고의 과정을 거치는 것, 이것이 딱딱하게 느끼는 명제의 무른 속 같습니다.


허술해보이지만 한번 맛보면 논리가 완성되는 것 자체가 맛나는 일이죠.


 수학도 마찮가지입니다. 마치 삶처럼!


하지만 줄어드는 지식에만 몰두할순 없죠. 그러기에 다음에는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높은 진실을 발견하는 방법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최초의 체벌, 불


어느날 최초의 인류 혹은 그와 비슷한 인류가 살고 있을 때

신의 노여움을 대표하던 번개


하늘이 온통 검게 변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격노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어느새 자신의 머리위까지 점령한 검은 구름은

분노의 빛을 땅에 꽂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수 없는

붉은 빛과 열이 번져나간다.


바로 불이다.


하늘이 성난 시간 순식간에 내려온 불은 초원을 태웠고

땅에서 생명을 얻은 것은 불 앞에서 힘을 잃었다.


거기에 대앙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던 인간은

그저 분노가 가실때 까지 얻는 것은

두려움 밖에 없다.

신과 의 최초의 체벌 관계, 불



이제 그들은 하늘이 보낸 재앙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한다.


불, 이건 신의 심판이다.

그들의 믿음 처럼 나와 신이 존재한다면


이 불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초의 체벌이 될 것이다.



우리의 뜨거운 불


우리가 체벌을 동의하는 경우는 대부분 경험에 의존한다.

나 잘난 맛?

좋지 않은 극단 적인 예는 뭐 이런 식이다.

"예전에 이렇게 해서 이만큼 맞았어~"

"그후로 내가 이렇게 잘 된거 아니야"

음...

사실 보통 여기서의 논제는 체벌의 중요성을

강조 하는 것이 아니라

1번 : 나는 이렇게도 맞아 봤삼

2번 : 나 잘나심

뭐 이 정도가 (剿等適) 논점인데 가끔 부수적인 논점으로


"맞아야 정신 차려"라는 논제를 펼친다.


워 일부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인 경우도 있으나

보통의 경우는 그 말은 이렇게 써야 정상이다.


"맞아야 나를 거슬리는 그일은 절대 다시 않할 꺼야"


보통 "불" 같은 심판은 분노를 대동한다.

우리 최초의 인간이 불을 보면 심판을

잘못하면 재앙

신의 분노와 동일시 하는 것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오해하고

남용하는 체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체벌이 이런 마음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사실 위의 좋지 않은 예에서 잠깐 볼 수 있는

인간적인 연결이 그렇다,


다시 말하자면 정.

그 체벌의 기저는 정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관심의 정이라고 하자.

내가 관심이 있기에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 심판을 내 비친다는 것,

보통 체벌을 하는 마음도 그 부분이라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알고 있고 경험했던 것은

(범죄적인 것을 제외하곤) 이런 뜨거운 정의 체질이라 하고 싶다.


단, 나는 이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최초의 인류의 행동을 고치게 만든 그 것의 원인는?

바로.. 다 타고 남은 재를 보면서 후회하는 일이였다는 것이다.

그들의 초원을 잃고 상처를 입고서야 그 다음을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과연 현재 우리가 바라는 교육과 상응하냐는 것이다,


바로 상처와 후회의 교육이

지금 우리가 말하는 교육과 얼마나 부합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쩜 우리는 의미는 잊은채 뜨거운 정에 집착해

모든 것을 불싸르게 하는 신은 신이되

나쁜신 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



차가운 불의 등장


진중권의 호모코레아니쿠스란 책에서 교육에 관한 재미있는 부분을 읽었다.

요약하자면



자리가 하나 남은 버스에 어머니와 두 형제가 탑승했고

남은 자리에 형이 앉았다.

그 자리가 탐이 났던 동생은 어머니에게 떼를 쓴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한다.


한국 : 형이면 형답게 동생에게 양보를 해야지 형이라면서!

독일 : 않되지! 형이 먼저 앉았으면 그건 형의 자리인데 너가 뺏으면 않되는 거야!




뭐 이 책의 의도는

우리나라의 역활론이 강조되는 상황을 이야기하려 한거지만,

나는 왜인지 더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인간적으로 느끼는 뜨거운 불과 다른

또 하나의 불,

즉 1인칭과 2인칭 사이의 뜨거운 불이 아닌

3자가 되어 원칙으로 바라보는 차가운 불


우리나라가 느끼는 행동은 1인칭과 2인칭의 관계에 따른다.

즉, 다시말하자면

관계에 따라서 역활이 달라지고 그 역활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형이라 함은 뜨거운 마음으로 동생을 위할 줄 알아야 하며,

동생은 그 형을 존경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어긴다는 것은, 그 관계을 어긴다는 것이다.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체벌은 관계속에서 나오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

부모 혹은 선생님이라는 관계에서의 당연한 역활이였다.


독일의 경우는 어떤가.

어머니이지만 한순간 법관으로 빙의(?)한다.

어떤 역활은 규칙에 따라 정해지고

그 온도는 상당히 차갑다.

형제의 역활이 아니라

규범을 지쳐야 하는 시민이란 면을 이야기 한다.

자기자신에게도 그것으니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체벌? 그들에게는 체벌은 폭행이라는 규범과 동일하다.


즉, 관계와 역활은 별개의 문제를 보이게

그들의 교육은 차가운 불과 같다.

그리고 그 불은 공평하다.

3인칭으로 바라보는 교육은 차가운 불 같다.



우리가 필요한 불의 온도는?


심판의 의미의 차가운 불이든,

역활에 의미의 뜨거운 불이든,

어느 한쪽에 치우지는 교육은 자칫 역효과를 낼 수 가 있다.


단지 지금은 뜨거움속에 진행되는 교육에 치우쳐져 있다는 것

그래서 이제 우리는 뜨거운 불에서 약간 물러날 시간이다.


현재 우리의 교육이 입시란 독을 머금은 이 후

목적이 대입과 능력으로 맞추어지면서 과열된 불이 교육계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어쩜 이번 인권조례안 역시 이런 취지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차갑다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잘못하면 우리의 관계 전부를 잃을 수도 있다.


이번 인권조례안 이후에

(인원조례안과 체벌없는 평화로운 학교 만들기 파일)


많은 반발이 있어 서울시는

성찰교실과 서울시 교육청의 학생지도 메뉴얼을 발표했다.

문제는 이것이 탁상공정이라는 비판인데

아래의 동영상이 쉽고 꽤 논리있게 말해주고 있는 부분이다.


Get Microsoft Silverlight




또한 체벌금지에 대해서는

그 외 여교사 모욕이라는 동영상을 교총에서 공개(링크)하기도 했다.


사실 내 의견에는 인권조례안에는 찬성이고 성찰교실은 보완이 필요하며

사례집에 대해서는 비판점이 너무 많다 너무...

인권을 위한 교육과 그에 때른 역치 해결에는

아직은 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그러기에 교육에 관한 것은 한걸음 한걸음 놓치면 조심히 떼어야 한다.


그것 아는가?

만약 사람을 들어 아주 뜨거운 물과 아주 차가운 물에

한쪽 다리씩 집어 넣으면 어떻것을 먼저 느낄 까 하는 실험이 있었던 것.


그 결과는

바로, "아프다" 였다.

섣부른 차가운 교육과 고집스러운 뜨거운 교육이

잘못만나면 결국에

교육은 아플수 밖에 없다,



불의 역설


불이란 것, 우리의 것이 아닐 때는 댓가와 파괴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 불을 이용하고 쓸때는 보호와 생성의 도구이다.

불의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이다.


교육과 체벌의 양면성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체벌은 뜨거운 교육 안에서

1인칭과 2인칭에서 나오는 관계를 통해 나와야만 하는 행위였고

동시에 파괴를 통해서 그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였으면

우리가 더 필요한 차가운 교육은은

행위에 대한 평가레 공정성을 요구하고

그에 부합한 일에 자신이 책임을 지는 거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의 교사는 그저 3인칭의 법관과 같다.


사실 교육이 입시와 결부되면서 상처가 났다고 본다.

그 상처에 뜨거운 불이 과하다 보니

염증이 지고 고름이 새어

이제는 차가운 불이 필요한 시기인 것에 개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조심하지 못하면 그 불은 결국 재앙이 된다.


불은 그 쓰임이 어떻냐에 따라 달라진다.


정말 우리가 필요한 불은 어떤 것일까?

그에 대한 답보다는

회초리의 의미로 마무리 하려한다.





회(回) 초(初) 리(理) :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이런 의미에서 지금 교육에 가장 필요한 것은

회초리가 필요한 거 같다.


입시 이전에 가르침,

그 이전에 아끼는 마음 혹은 사랑이라 생각한다.


교육자, 교사 혹은 부모들

정말로 교육을 원한다면

일단 우리 스스로 회초리를 가지도록 하자.



 휴직교사의 체벌에 관한 편지 1...- 어느날 한의원에서..

1. 어느날 한의원에서.. 

 

근래에 어머님과 한의원에 간적이 있었는데 어머니 진맥을 받으실 동안

나는 쇼파에 앉아 TGIF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옆 쇼파에 한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있었는데

아이가 너무 떠들어서 미안했었는지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아이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자꾸 떠들면 의사 선생님이 침 놔줄꺼야~!"

침과 떼끼로 아이 길들이기?

 

그러자 아이가 조금 나아지는가 하더니

금새 다시 이리저리 신기한 것들을 만지고 다녔더니

그걸 지켜보던 아이의 어머니가 다시 하는 말이

"너 정말 자꾸 그럼 옆에 아저씨가 떼끼한다~!!"

 

사실 그 아이에게 별로 관심이 없던 터라

그 아이가 어떻게 떠들고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래도 옆 사람들을 위해서이겠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의사와 나를 동원해서 아이의 행동을 저지하려했다.

 

나를 언급함에 돌아보던 나의 눈이 아이와 맞았을때..

어떤 이유에서인지(정말 하나도 이해할 수 없지만!!)

아이가 조용해졌다.

(나는 날 언급함이 좀 불편해 본 것 뿐이였는데..)

그냥 나를 언급함이 싫은 거였다..

절대 날 아저씨라고 불러 그런거 아니다 절대!!.. (쳇.. 나 이십대인데..ㅜ.ㅜ)

 

여튼 나의 감정은 각설하고 과연 그 아이를 조용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였을까?

이런 생각에 빠졌을때 나는 여기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거... "체벌"

 

2. 체벌..., 폭력 vs 필요악

 

사실 체벌에 대한 관심은 교사를 하던 시절 부터

지금까지 늘 생각거리 중에 하나였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생각하건데 아직도 체벌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다.

 

가벼운 모자의 작은 일화에 내가 체벌을 생각한 것은

사실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짧은 시간 속에서 느끼는 바는 상당히 컸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먼저 아래 링크는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서울광역시 체벌 금지에 대해서

체벌금지라는 길의 바른 예와 혼란스럽다는 평가를 쓴 기사를 각각 링크 한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의 체벌 일체 금지


'문제아' 체벌 대신 악수 청하는 교감 - (클릭)

'왜 때리냐' 체벌 금지 첫날 성토장이 된 학교 - (클릭)

(굳이 모든 기사를 읽을 필요는 없다. 제목만 봐도 느낌이..)

 

사실 두 매체의 특성이 다르다

위의 긍정적 기사는 일명 진보적 언론으로 불리며

아래의 부정적 기사는 보수적 언론으로 불리는 곳이다.


지금 언론의 성향을 보자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체벌에 대한 생각이 극명하게 갈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읽어본 바 두 매체의 혹은 여러 매체의 체벌에 대한 이미지는 이렇다.


폭력 vs 필요악


과연 체벌은 '폭력인가 아니면 필요악인가.'의 논쟁은

사람에 따라 사상에 따라 극명하게 갈릴 수 밖에 없다.

이 판단에 대해서 지금 언급할 생각은 없다.

나는 오히려  부정적 기사(성토장이 된 학교)의 한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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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학생들은 -

‘왜요? 때릴 건가요’

“좀 있으면 학생인권조례인가 뭔가도 나온다면서요. 핸드폰 좀 먼저 갖고 다니면 안 되는 거예요?”

 

- 어떤 학부모들은 -

'애 잘못되는 데 보고만 있을건가. 괜찮으니까 차라리 때리라’고 하셔서 난감할 때가 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 생활지도를 소홀히 할까 봐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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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말이 아닌 학생과 학부모의 말이다.

난 여기에서 폭력도 필요악도 아닌 무서운 교육을 느낀다.

 

3. 체벌 이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무서운 교육 S - R

 

대학교 시절  전공은 알코올이고 취미는 수학이고

알콜 전공시간에 시간을 보내는 안주는 교육이였다.

좋지도 않던 학점을 유지중에서도

소름끼치게 무서웠던 하나의 교육을 기억한다.

 

그건 바로 자극과 반응을 뜻하는 S-R이론 인데

바로 우리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자극과 반응의 결합체라는 이론 이다.


길게 설명할 것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파블로프의 개",

종이 울리면 먹이를 주기전에 침을 흘리던 그 개 이야기는 대부분 기억한다.

실제 파블로프 실험에 쓰였던 개


이것은 R-S-R이라는 S-R의 변형이지만

기본적인 특은 유사하게 보면 된다.(뭐 교육의 방향은 다를지라도..)

왜 나는 기사를 읽으며 이 소름을 다시 느끼게 되었을까?..

 

그건

위의 학생과 학부모의 말이 전부

체벌이라는 틀을 벗어났을 때 보이는 반응의 하나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나는 수학쟁이니니 반대로 생각하보자.

지금까지 우리가 학생을 잡아 놓은 것이 바로 "자극"인데,

그것도 바로 "반응"을 위한 자극이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자극으로'만' 가르치고 반응으로'만' 배우고 있는 것인가.

 

이 교육을 정확히 비유하자면,

아니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비약해서 비유하자면

교육자나 학생이나S-R교육은 마약과 동일하다.

 

왜?

빠른 반응이 이루어지기에 교육자에게 마약이며

책임을 계량화 할 수 있기에 학생에게 마약이다.


현재 복직을 준비중인 휴직교사로 깊히 반성하자면

반응을 곧바로 갖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은 나의 역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빠른 반응을 받는 것은 교육자.. 아니 이럴때는 주입자에게 최고의 옵션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포기 할 것인가?

체벌하는 것과 체벌 받는 것이란..

 

또한, 나의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나의 외박의 댓가 혹은 나의 유흥의 댓가는

내가 후에 감수할 자극의 수량을 계산하게 된다.

 

그러기에 이건 마약이다.

그러기에 이 체벌에 대한 반응에 소름이 돋는다.

우리는  S-R 마약에 취한 중독자이기 떄문이다.

 

그러기에 이건 비극이다.

 

4. 다시 한의원.. 그리고 체벌...

 

그렇다고 S-R의 자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사실 이행 되는 대부분 교육의 원천은 기본적인 본성은 S-R이다.

하지만 그게 주가 되기때문에 문제가 되는데

말하자면 S-R은 이성과 본성 중에 본성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좋다.

 

"싫은 자극을 주어 원하지 않는 반응을 끊어 버린다."라는

마치 본능적이고 변하지 않는 함수를 지향하는 교육,

다소 불편한 진실이지만 사실 체벌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체벌, 가끔 보이는 장풍식의 폭력이 아니라면

그 목적은 항상 나쁘다고 보기는 어렵다.

행동을 교정하고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하려는 목적이

다소 의례적인 학교라는 장소에서 불편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쯤에서 나는

이제..

다시 한의원으로 돌아가고 싶다.

 

우리는 떠드는 아이에게 불법적인 의사의 침이나

아저씨(ㅜ.ㅜ?)의 떼끼가 아이들에게 부정적 자극으로 다가가

아이가 하는 행동을 제한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그렇게 심어준 생각은 과연

"한 사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면 않된다"

라는 것을 배울 것인가, 아니면

"떠들면 혼난다?" 를 배울 것인가.

내 생각이 옳다면 후자를 배울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교정되는 모습을 보면 부모도 교사도

그리고 학생 그 자신도

체벌이란 것에 무던해질 수 밖에 없다.

왜? 남이 바뀌고 내가 바뀌니까...

그 동안 그 행동교정의 목적은 상실되고 결과만 쌓인다.

 

그러기에 적어도 이 체벌,

이 체벌을 받아들이는 이것은

다시 한번.. 비극이다.

 

체벌,

그것은 S-R의 덫은 아닐까..

혹시 나도 그 덫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

반성!

 

- 막거리를 홀로 마시며, 자신을 욕하고 비판중인.. -

- 휴직중이고 복직대기 중인 교사 노군올림.. -

 

P.s

오장풍교사 사건..

그리고 이번 서울시 교육척의 학생 인원 조례로 비추어 보았을때,

체벌에 대해서

그 대안이 무엇이고 지향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그건 술깨고 고민해봐야지..

 

 

이 글은 스프링노트에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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