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하는 밴드 - 옥탑방에서


다음으로 이사 올 사람에게 나는 말해주고 싶었지
고장난 듯한 골드스타 세탁기가 아직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무더운 여름날 저 평상을 만드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평상 위에서 별을 보며 먹는 고기가 참 얼마나 맛있는지


하지만 이 집은 이제 허물어져 누구도 이사 올 수가 없네
마음속에 모아 놓은 많은 이야기들을 나는 누구에게 전해야 하나


나는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나누고
수많은 고민들로 힘들어도 하다가
결국 또 웃으며 다시 꿈을 꾸었네
여기 조그만 옥탑방에서


비가 오면은 창문 밖을 두드리는 물소리가 음악이 되고
밤이 되면은 골목 수놓은 가로등이 별빛 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 집은 이제 허물어져 누구도 이사 올 수가 없네
마음속에 모아 놓은 많은 이야기들을 나는 누구에게 전해야 하나


나는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나누고
수많은 고민들로 힘들어도 하다가
결국 또 웃으며 다시 꿈을 꾸었네
여기 조그만 옥탑방에서


보잘것없는 작은 일들도 나에게는 소중했다고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밴드

그저 그 앞에서 같이 듣고 있자면 그도 밴드이고 나도 밴드가 되는..

GMF에서 눈물을 보이게 했던 그런 좋아서 하는 밴드...




<~이전 / 다음~>


프리뷰에서 언급했다시피,

진리라는 개념 파악을 위해 명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모든 문제가 “그렇다”와 “아니다”의 조합만이 아니기 때문에

명제를 도입하는 일 자체가 큰 어려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면

“똥 뭍은 쥐가 겨 뭍은 인간에게 너 참 더럽고 공정한 사회가 아니구나!”라고 말한 다면

과연 이 명제는 맞는 것일까요?


그럼 이런 모호함이 왜 나오는 것일까요?

그리고 모호함의 원천은 어디일까요?


---------------- 모호함을 피하기 ----------------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그는 살인이란 범죄를 저지른 것이지만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모호함은 명제의 몸통, 조건에서 나옵니다.


가벼운 예를 들어보면,

“전과가 있는 사람은 나쁜 놈이다.”이란 명제를 보면,

보통 우리는 14범정도 된다면 대부분 정말 나쁜 놈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전과가 있는 사람은 나쁘다는 것은 맞는 말일까요?


일제시대의 안중근을 보면

그는 살인이라는 일을 저질렀고 그것은 분명 전과자 입니다.

하지만 그는 현재 뮤지컬 “영웅”의 주인공일 만큼 우리 사회에서는 강직한 사람으로 통힙니다.

이럴 경우에 사람을 죽인 사람이 나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범죄를 다르게 보이는 것은 바로 “나쁜 놈이다.”라는 조건의 모호성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서 모든 사람이 동의하기 어렵다.


조건에 감정이나 선입견이 들어가 버리면 보편적 진리 찾기에서는 이미 탈락됩니다.


진리라는 것은 슈퍼스타K처럼

“제 점수는요”라고

 각기 다른 결론이 나오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여튼 조건이란 것이 모호해져 버리면 명제가 되기 어렵습니다.


즉, 조건의 명확성이 완성되어야 명제의 모호성이 제거된다.


이런 모호함을 조금이나마 제거한 명제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수학”을 도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먼저 조건이 명확한이라는 정의를 이미 포함한 “집합”을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 집합과 명제의 관계도 ----------------


먼저 집합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면,


집합이란!

[어떤 모임에 포함되는지 포함되지 않는지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모임]


여기서 명제와 비슷하게나마 공통된 점을 찾을 수 있나요?

(밑줄을 이미 쳐놓았지만...)  <명확하게 구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줄긋고 확실하게!!

<너는 여기 모임의> “소속임!” 혹은 “소속이 아님!” 이라

확실히 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또한 모든 집합은 조건제시법으로 표현가능한데,

집합이란 것을 다시 이야기해 보자면

“조건이 제시되고 그것이 만족되는 것들의 모임.”인 해석을

“조건에 대해서 참이 되는 것들의 모임.”이란 명제적 문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집합과 명제는 공생의 관계를 유지한다.



명제의 참과 거짓을 명확히 구분 짓는 명제와 조건으로 원소를 갖아야 하는 집합이

서로의 필요를 위해서 동일하게 만납니다.


여기서부터 

집합과 명제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둘의 공생이 시작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해보면

이제 어떤 조건 p가 있다면, 이 조건에 참이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모아 놓은 집합을 P라 했을 때,


일 때,

집합 P를 조건 p의 진리집합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보면

포유류의 진리집합


만약 [ 조건 p : 포유류 이다! ]일 때,

친구집 강아지는 포유류이고,

시골집 닭은 조류입니다.


이를 집합으로 그리면 위의 벤다이어그램과 같죠.

이렇게 하면 진리집합 P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 어려운 길은 돌아가면 된다. ----------------


기본적으로 명제가 양산되는 논리학은 어렵다.

말장난 같이 보이기도 하고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르겠다합니다.


멋진 그림이 항상 직활강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말의 순서 조차도 어려운 것이 바로 명제이지만 이 길은 돌아갈 수 있는

사실 지름길은 아니지만 완만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집합입니다.


스키에서 직활강을 타는 것이 더 빠르지만 위험하기에 우리가 돌아가듯이

진리가 앞이라고 명제로 직활강하기 보다는

살짝 수학의 집합에 안착해서 가보는건 어떨까 합니다.


다음은 실제적으로 명제를 집합을 통해서 판단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전 / 다음~>





추억..

하늘을 날다..



상하신리 도예촌에서
by 아이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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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이곳을 지나면아득한 과거로 돌아 갈 것 같아

그때처럼 그렇게
네가 서 있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공주 어떤 시골길에서
by 아이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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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


명제, 진리의 근원점에 서다.


진리 앞에서서


인간의 삶의 판단에 앞서 자신의 가지는 진리를 먼저 봅니다.

앞서 가진 진리의 경중 혹의 방향에 따라 사람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철학적 진리에서 잠시 벗어나 사전을 펼쳐보겠습니다.


-------------------------------------


진리 - 네이버 국어사전


1 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

2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

 형식적 의미로 사유의 법칙에 맞는다는 의미에서의 사고의 정당함을 의미한다.

3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


-------------------------------------


간단히 진리는 보편적 사실을 향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편적”이란 것에 주목하면

이 보편성이란 것이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보편적이 사실이라 칭할까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위의 사전 내용처럼 언제 어니서나 불변하는 그것은 어떤 것을 이야기 할까요?.



보편성을 잡아라!


이 보편성이 라는 것, 쉽게 보면 강을 갈아엎고 바닥파는 것처럼

무엇이 보편성에 부합한지 정확히 판단 가능하기도 하지만,

햄릿의 고민처럼 불완전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그 보편성이란 것이 어렵기만 합니다.


갈대 같은 마음을 제대로 잡아주는 것을 그리스에서는 철학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의 근원을 명제에서 그 근원을 두었죠.

바로 이 보편성을 적용하기에 가장 좋은 실험의 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보편성을 잡을 가장 좋은 무기는 어떤 것일까요?

가장 가까운 후보는

바로 참과 거짓이라는 기본적인 문제를 다룬 명제입니다.


보편성이라는 큰 수확을 위해

수많은 답을 가진 생활의 혹은 사회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1과 0의 문제,

즉 참과 거짓을 가지는 단순한 문제에서 접근해보겠습니다.


참과 거짓이란 불가분의 관계는

모든 문제에 존재할 것 같지만 사실상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쉽게 만나기는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나와 너가 다르지만

각자 자신을 “나”라고 부르는 것 처럼

개념은 확실하지만 각자의 위치에서의 참과 거짓은 참 모호하죠.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도구가 더 필요합니다.

바로 수학입니다.



수학, 참과 거짓의 원천이 되다.


참과 거짓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

간단히 예를 들어 보면,

"K대학교 02학번 OU양은 아름답다." 

라는 하나의 문제를 보겠습니다.

우리가 

“K대학교 02학번 OU양”이라는 대상이 “아름답다”라는 것과 연관관계를 지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보았을 때에는

완벽하고 고귀한 사실이지만 눈이 디옵터 -6이하인 사람에게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죠.

이는 어떠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에서 “나와 너”의 관계처럼

참과 거짓이 모호하게 꼬여있고 그 답은 사실 없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잠재적 범죄자의 99%는 휴대폰을 사용할 때 엄지손가락으로 문자를 쓴다”

이것 역시 대부분 참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범죄자가 한번쯤 핸드폰을 시도해본다면

아마 99% 엄지로 문자를 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면 대부분 99% 엄지로 문자를 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99%의 당위성에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이처럼 참이나 거짓이 거의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보편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보편성이 될 수 없습니다.


정리하면, 위의 두 가지 예처럼

일반적이 생활에서는 그 목적과 상태에 따라서 그 답이 변하기 때문에

아직 참/거짓이 가져야 하는 보편성이 모호하기도 하고 그 보편성이 갖는 당위성의 수준이 낮아지기도 합니다.


이런 완벽함을 갖추기 위해 보편성과 가장 비슷한 수학의 우리는 “명제”를 이야기하며

보편성과 진리에 근접해보고자 합니다. 



수학은 명제 위에서 논리적이 되고 명제는 수학 위에서 당위성을 얻는다.


이는 우리가 수학교과의 한 파트에서

당당히 “명제”란 이름으로 제목을 거는 이유이며

우리가 명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수학을 이용하는 이유입니다.



“명제”에 들어서기

그럼 참과 거짓의 보편성을 찾는 일이 과연 명제와 어떤 관계일까요?

간단히 명제를 정의 해보면


“명제” - 참과 거짓을 명확하게 판단되는 것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명제는 참과 거짓을 위한 수많은 질문들 중에서

우리가 이것은 명확히 '참!' 혹은 명확히 '거짓!' 이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 꽃은 아름답다”라는 것은

질문은 될 수 있지만 명제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지독한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꽃을 혐오할 수 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명제가 정말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 집 강아지는 포유류이다.”는 참이다.

(내가 강아지라 부르는 그것이 다른 사람이 부르는 강아지와 동일하다는 가정안에서요.)

이것은 포유류의 분류에 강아지가 확실히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위는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너무 돌아온 것 같아 정리해보면

이제 우리는 진리를 찾기 위해 보편성을 찾아야 하고

그 중 가장 근원적인 참과 거짓을 판명하기 위해 “명제”가 필요합니다.


또한 이제부터

명제는 이제 가장 큰 친구 수학을 통해서 그 모습이 구체화 될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보편성은 이제 딱딱한 숫자의 놀음에 들어왔지만

신이 그랬듯 고난의 길 뒤에는 위대한 뜻을 내뿜을 것이고

그 목적 뒤에는 보편성을 갖는 진리라는 파트가 그 다음 숙제로 남을 것입니다.



  / 다음 ~>



그대의 자취를 따라 한걸음 한걸음..








# 2






그대의 자취를 따라 한걸음 한걸음..

언젠가 없어질 흔적일지도

영원히 지워지지 못할 추억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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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



소란스런 소리 수다스런 소리
시끄러운 세상에 소리
자동차 소리 텔레비전 소리
매일 반복되는 소리
듣기 싫은 소리 싸우는 소리
우는 도둑고양이 소리
작아지는 소리 멀어지는 소리
점점 다가오는 소리

잠시만 조용해지면 세상소리들이 들려
모든게 고요해지면 숨쉬는 소리도

귀를 기울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이
말을 걸어오네
잠들어있던 내 몸이 깨어나
이렇게 소리를 지르네

잠시만 조용해지면 세상소리들이 들려
모든게 고요해지면 속삭이는 것도

귀를 기울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이
말을 걸어오네
잠들어있던 내 몸이 깨어나
이렇게 소리를 지르네

맛이 있는 소리 멋이 있는 소리
간지러운 너에 목소리
사람들에 소리 속에 숨어있는
너에 웃음소리
귀를 기울이면 귀를 기울이면

덴무가 해운대를 거닐다..


#1




#2



#3



그녀는

격정의 시간속을 거닐고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다..



그리고 나는

지워 지지 않는

여신이 남겨논 여운을 거닐다.




덴무 : 중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천둥과 번개를 관장하는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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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영화에서 무의미한 피가 낭자하는 영화는 조금 꺼려진다.
누구의 피인지도 모른채 붉은 액체제 쓰러져가는 희생자나,
지극히 정상적인 부하라도,
멋진 액션 뒤에 총성에 혹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을 것 같은 멋진 검이..
통성명도 못한 이를 무너뜨릴때, 과연 죽음 맞이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지 항상 의심이 든다.
(나는 이래가지고 호러에 영감을 얻는 일은 나에겐 좀 어려울 것 같다)

그런 입장에서의
아저씨..
복수의 날이 선 아저씨..
그리고 복수의 방법 또한 날이 서있는 행보.

사실 예고편을 보고 영화의 맥은 이미 눈에 익은 드라마와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영화관을 찾았고 별 고민없이 영화를 골랐다

쟁점이 점점 멀어지는 거 같다.. ^^ㅋ
(스포일러는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마음 다잡고 몇 단어의 연속으로 아저씨를 다시 이야기 하자.

--------------------------불행-----------------------------

영화의 막이 오르면
불안한 선위의 그리고 다소 친근한 에피소드의 계속이다.
평행선 같던 일상은 어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특수한 라인속에 처하게 되고
주인공에게 우연같은 필연의 끈에 묶이고 만다.

"불행"
1. 행복하지 아니함
2. 행복하지 아니한 일, 혹은 운수..

어쩜 휘말릴 필요가 없었고, 아무 책임도 없었을 텐데.
일상은 행복하지 아니한 운수를 몰고온다.

<운수의 일부인 불행은 아이러니 하게 필연으로 다가오고 만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느끼는 불행은
어떤 필연의 바다에서 쓸려내려오는 부산물이다.
이점이 참으로 불행한 것이다.

차태식도 마찬가지, 다르지 않다.
아저씨는 불행에서 시작한다.

--------------------------고행-----------------------------

불행의 시작은 고행을 낳는다.
가시밭길이라 하는것이 좋을지, 미로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나도 건전한 표현을 찾기는 어렵다.

확실한 것은
<이 불행은 고행을 낳는다.>
분명 걷고 싶은 길은 아니나 외길로 이어지는
고행을 피할 수는 없다.

차태식속의 무표정, 특히 눈에는 이 고행이 보인다.
순례자의 가시밭길을 걷는 뜨거운 발 위의 엄숙함 처럼 그는 의연하고 차갑다.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많은 이들은
차태식의 고행속을 걷는 눈을 보았으리라 믿는다.

더 중요한 것은 관객의 의식속에서 차태식의
고행(苦行 : 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통해 수행을 쌓는일)은
다른 의미의 고행(高行 : 고상하고 뛰어난 행동)으로 수렴된다.

나.. 또는 관객이 고행(苦行)을 고행(高行)으로 승화시킨 원동력이 무엇인가.

--------------------------복수-----------------------------

그것은 아저씨, 즉 차태석의 복수을 인정함에 있다.
부도덕한 인간과 그에 상처받은 인간을 가르고
힘없는 인간위에 서서 그는 반란을 일으켜 복수를 일으키는데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이다.

복수 : 원수를 값는 일이다.

모든 인과는 이제 원수를 값아준다는 복수에서 시작된다.
내가 불행했기에 고행을 함에 있어 가장 큰 요소가 바로 이것이다.

복수를 한다는 것은


원수가 있고 그 원수와의 필연의 인과가 있고
그 인과에 대한 피드백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저씨는 어떤 원수와 어떤 필연을 가지고
어떤 피드백을 주려한것일까?

아저씨, 그는 왜 복수를 택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의 복수에 왜 열광하는가.


----------------------열광 그리고-------------------------

우리는 아저씨에 열광한다.
(뭐 그냥 얼굴에도 열광하지만....)
특히 아저씨의 복수에 열광한다.

우리는 복수에 필요한 원수를 두지 않았고
의자에 앉은채 스크린을 봄에도 아저씨에 긍정한다.
아마도 우리는 스크린속 부조리안 현실에
우리가 흥분하고 있었던 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가 <아저씨>인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외롭다.
차태식의 외로움을 보며 우리 스스로 자신이 아저씨임을 공감한다



"아저씨"
사실 이 단어는 긍정적이지는 않다.
우리가 느끼는 현실속 에서는 아저씨는 그저 힘없는 존재이며
순수의 세대에서 천천히 벗어나는 객체이다.
묵묵히 잊혀져가는 외로운 존재..
극속의 차태식의 외로움은 왠지 실재의 아저씨와 유사하다.



실제의 삶에서 우리는 잊혀져간다.
잊혀짐에 대한 두려움을 잊게 하는 존재..
그 존재의 상실은 아저씨의 복수를 정당화 한다.

우린 불행에 혹은 필연의 고행에 존재를 빼앗김에
슬퍼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저씨" 차태호에 공감할지도 모른다.

이에
차태식은 <현실 속 아저씨>의 불행을 짊어진다.
그리고 복수를 꿈꾼다.
아저씨, 그는 우리는 위해 복수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응원했다.


개인적으로 [파괴된 사나이]과의 가장 큰 차이는
인물에 대한 이질감으로 느껴진다.
파괴된 사나이의 주인공에게는 내가 전혀 개입되지 못한다.
또한 [시티오브갓] 처럼 인과없는 살상 또한 아니다

조금은 아저씨가 더 영화로 와닿는 이유인거 같다.

단점?.. 음..
사실 영화를 보며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차태식이다.(원빈이 아니라)
차태식이라 인물 설정에 약간의 무리수가 아니였나 싶다.

하지만 그 차태식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아저씨가 아닐까.



아저씨 상세보기



어떤 날 퇴근 길..

그냥 무사히 지나가는 횡단보도..

그리고 나의 자화상 같은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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