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이과"적 관념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철학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어떤 문제에 대해서 지난 여러 사람들의 말들을 열거하면서 논평하는 일에 그다지 익숙지 않고, 익숙해지려 한 적도 없다. 그래서 나는 철학을 '똑똑한 말싸움'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수학을 오래 해오거나 혹은 오랫동안 흠모하면서 그 자체의 논리성에 대한 아름다움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웠고 점점 삶에 대한 수학적 적용 혹은 수학적 사고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던 중에 나에게는 '좌표의 창시자'로 더 익숙한 그 사람, 데카르트.


 하지만 모두에게는 코기토 명제로 익숙한 '데카르트'에 대한 글을 제의(@HansHoon에게)를 받고, 그의 책을 읽으며 그의 말들 앞에 서고 나니 철학 혹은 말싸움에 관심이 가게 되었다. 특히 수학을 하는 자로써 그가 가지는 사고의 흐름은 눈을 뗄 수 없는 멋진 구경거리였다. 그리고 그 구경거리에서 나의 느낌(수학)을 몇 자 적어보려 하지만 몇 번을 읽어도 나는 <성찰>에 대해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저 내가 이해하고 느낀 점을 적어볼까 한다. 데카드트가 의심을 제일로 섬겼으니 나도 나의 글을 맹신하진 않을 것이다.


 1. 악마의 가설과 꿈의 가설, 그리고 변증


  우리가 말싸움을 자주 하면 알겠지만, 일단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논리도 참으로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논리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혹시 논리의 빈틈이 보일 때 그 사이를 파고드는 나의 생각은 상대방에게 긍정을 이끌기에 가장 좋은 무기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듯이 말이다[각주:1]. 데카르트도 말싸움 좀 한 것 같다. 그는 어떤 것을 정의하고 아는 '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심하고 배재하고 마지막엔 부정하면서 까지 자신이 믿는 것들을 공격했다. 그는 자신의 '믿음'에 창을 겨누면서 나올 수 없는 마지막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우리가 반대편의 모순을 이용하여 증명하는 방법을 변증이란 한다. 그것은 기초적으로 '명제'의 조건을 갖춘 상태에 이루어지는데, 명제란 것은 기본적으로 '가정'과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직접적인 증명은 그 '가정'을 기반으로 '결론'을 완벽히 증명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이 쉽지가 않다. 특히 그 분야가 철학 같은 인문적인 것으로 넘어가면 더욱더 그런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인가 애매모호 하고 그 분야가 넓을수록 모든 것을 증명해야 기에 확증할 증거는 항상 작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부정할 증거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전체를 무너뜨릴 필요 없이 한 분야에 대한 '반례[각주:2]'를 제시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떠한 주장을 펼칠 때에는 그에 관한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데, 그 증거를 대기 위해서 데카르트는 가장 어려운 길로 들어선다. 바로 변증의 반대에 서는 것인데, 다시 말하자면 누군가 반증할 수 있는 구석을 자신이 직접 공격하면서 배제하는 것. 자신이 확신하지 못한 곳이 언제 '반례'의 공간이 될지 모르므로 확실치 않은 곳에는 '무조건 배제'라는 옵션으로 그 기반을 다져가는 것이다. 그 공격의 종착역은 신도 아닌 컴퓨터도 아닌 바로 자신,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에 빗대어 자신을 존재를 이야기 한다.  특히 '꿈의 가설'[각주:3]과 '악마의 가설'[각주:4] 통해서 실재한다고 '믿는' 모든 것을 버리게 되는데, 그 사실에 들어가게 되면 내가 있는 한 낮의 밝은 이 카페 2층이 사실은 어두컴컴한 감옥 지하의 어느 독방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정의 끝은 결국 자신이 사유(생각)한다는 것으로, 자기 자신은 부정할 수 없는 마지막 원리를 얻게 된다.


코기토명제 :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모든 의심나는 곳을 다 틀어막은 데카르트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다. 그러기에 그는 더 이상 이 명제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이렇게 도착한 곳에 대해서는 데카르트는 자신한다. 그곳은 그가 생각하는 한 모든 곳에 대한 반례를 틀어막은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데카르트는 조심스럽다. 왜냐 아무리 의심하지 않으려고 해도 '의심'나는 구석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2. 모든 것 이전의 관념, 공리 혹은 무정의

 이 코기토 명제에 대해 조금 더 말하고 싶은데, 과연 주체인 자신이 자기를 증명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사실 그 일이 절대 쉽지 않다. 러셀의 역리(혹은 이발사의 역리 - 링크)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이 자신을 증명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을 낳을 수 있다. 그러기에 어느 정도는 여분을 두는 모습이 오히려 이 코기토명제라 생각한다. 그 여분을 놓는 모습이란 "사유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명제를 앞에서 살짝 비워두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 위의 코기토 명제는 연역적인 삼단논법의 결과물인데 결론이 나기위해서는 대전제가 존재해야 가능하다.[각주:5]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 대명제를 자세히 전파하지 않는다. 그 대전제라는 것은 바로, "사유하는 것이 존재한다."이다.


 비워둔 한 자리, 즉 사유와 존재에 대해서 다시 증명의 칼을 들여놓지는 않는다. 이는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 탐구"[각주:6]의 대화에서도 잘 나오는데 데카르트는 우리가 정의를 내리면 오히려 더 모호해지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단순하고 분명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시 데카르트는 수학적인 사고에 정통했나 보다. 그것은 바로 수학에서 이야기 하는 무정의 용어라고 불리는 것들이나 혹은 공리라 불리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공리라 불렀을 때의 장점? 그것은 심판을 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것들에 근거를 들었을 때, 이어지는 논증이더라도 어느 부분 앞에서는 더 이상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원리가 나오게 된다. 판단이 확실하다는 가정 하에서 이 부분에 대해 증명 없이 믿는 것이다. 이런 것과 유사한 수학적 관념이 있는데 그것을 "공리"라고 부르고 어떤 것에 대한 정의를 다른 것에 빗대지 않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들은 수학에서 "무정의 용어"라 부른다. 정확한 개념은 아래에 접어놓겠다.

 

 만약 코기토 명제가 제일 철학 혹은 명제가 된다면, 그전의 명제 혹은 전제인 "사유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바로 공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정의 용어를 뽑아 보자면 바로 "사유"나 "존재"정도가 되겠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요소이다. 어떤 것의 근거를 대는 학문으로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수학이다. 하지만 수학은 그 완벽함을 자의적으로 증명하는 '변명'으로 두지 않고 어느 정도 인정함이라는 '불완벽함'속의 '자명함'으로 갖는다.(더 자세한 내용은 불완전성의 원리가 된다. - 링크) 이 구조를 데카르트는 바로 '성찰'에 적용한 것이다.


 데카르트가 1성찰[각주:7]부터 모든 것을 의심나는 것을 모두 버리기로 한 것은 오히려 자기가 꼭 인정해야할 '공리'를 찾기 위한 노력과 같다. 아마도 가장 이런 사고의 영향을 준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일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이라는 것은 '점, 선, 면'이라는 무정의 용어와 5가지의 공리(혹은 공준)으로 시작한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같이 선을 긋거나 길이를 가지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5가지의 주춧돌을 사용하여 논리적으로 이끌어 나간 것이다. 보통 우리가 기하학이라 하는 것은 중고등학교때 증명하는 삼각형이나 원의 그림을 그 논리성에 맞게 증명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히려 기하학은 도형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도형으로 '확인'되는 학문인 것이다.


 그러기에 데카르트의 성찰의 근본은 참으로 수학적이다.



 3. 코기토 - 존재와 사유 사이에 함수를 공리로 다시 세우다.

 제 3성찰에는 '신 증명'이라는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 그 '신 증명'의 기본원리가 재미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공리'가 하나 더 발제 되는데, 그 공리는 '결과가 있다면 그것이 기초되는 원인이 '반드시' 존재 하며, 그 원인은 결과보다 적어도 같거나 커야 한다.'이다. 이는 함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성질이다.


 즉 만약 X란 집합에서 Y란 집합으로의 함수 가 있다고 하자. 이때 Y속에 어떤 부분을 B라고 했을 때, B가 이미지가 되는 X의 원소 즉, 는 적어도 B의 크기보다 크다. 기호로 쓰자면 n()≥n(B) 이다.(이해를 위해 아래 접기에 그림으로  간략히 설명했다.) 데카르트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원리는 바로 이것에 의존했다. 또한 이 식을 이용하면 3성찰의 '신 증명'을 함수와 집합으로 표현 가능 한데 이는 다음과 같다.




이해를 돕기 위해 수식과 그림으로 다시 표현해본다.

1. n()≥n(B)을 그림으로 다시 표현


위 그림에서 Y의 부분 집합 B = {a, b}에 대해서 역상은 보내면 X의 부분집합 = { 1, 2, 3 }이 되는데, 이렇게 일대일 함수가 아닌 경우에는 가 더 크고 일대일 함수 인 경우에는 와 B의 원소 개수가 같게 된다. 이때 B가 내가 같게 되는 어떤 사유(혹은 관념)이라면,  그 원인이 되는 관념 B의 역상, 즉 원인은 사유에 영향을 미친 존재 가 되는 것이다.


2. 신 증명 수학적 표현으로 재구성


A. 신은 존재한다.

원인과 결과를 통한 피상적 실재성에 대한 함수

 : <X:존재> → <Y:명석 판명[각주:8]한 사유> 라 하고[각주:9]

나는 신이란 관념의 집합을 G, 나의 명석 판명한 사유를 C라 하자.

이때, 나의 사유가 존재 하므로 C ≠ ø이다. (여기서 G, C Y)

내가 신에 대한 명석 판명한 사유를 지니고 있으므로,

C G ≠ ø

따라서,

   ≠ ø

따라서 신의 존재 는 존재한다.


---------------------------------------------------------------------


B. 신의 존재는 나의 존재 안에 있을 수 없다.


이때 만약 신이 나의 존재에 속한다고 가정하자. --- (결론 부정)

먼저, 코기토 명제에 따라 나의 존재를

라 정의하자.


신의 존재가 나의 존재 속에 있다고 가정했으므로

 이고 함수의 성질에 따라, 이므로

n(I)가 된다  --------------(부정된 결론에 의한 결과))


신의 ‘관념(Y의 영역)’은 무한하고, 나의 ‘존재(X의 영역)’는 유한하다.[각주:10]

따라서

 이므로

부정된 결론으로 얻은 결과와 모순이 생긴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 즉, 는 나의 존재 안에 담을 수 없다.


A, B 명제에 따라서 신은 나의 존재를 넘어서 존재한다.




 함수를 이용한 신 증명의 의문점 및 주목할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다시 언급할 예정이므로 이만으로 줄이도록 하고, 지금은 함수적인 요소가 적용된다는 것에 집중하자. 의미를 해석해보면 위 명제에서 쓰인 <존재가 원인으로 사유가 결과로 나타나는 이 함수>는 우리가 받아들였던 공리, 즉 ‘사유하면 존재한다.’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인 셈이다. '원인과 결과에 따른 함수' 혹은 다른 표현이 되는 ‘사유하는 것의 존재성’이 함수의 성격을 띠면서 다른 부분에 적용이 되어 앞으로 증명될 많은 부분의 기반이 된다는 점으로 함수부분은 줄인다.

(참고 :글 중간에 편의를 위해 위의 함수를 존재-사유 함수라 하겠다.)


4. 사유를 기저로 [데카르트 공간][각주:11]을 완성하다.


 한편, 현대대수학에서는 어떤 공간을 만들어내는 원소를 가리켜 ‘기저’라고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기저라는 것을 가지고 잘 주무르다 보면, 하나의 공간이 생성되고, 그 생성되는 공간이 어떤 성질을 갖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기저의 성질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성찰도 마찬가지이다. 존재-사유 함수 속에서 기만하지 않는 신과 <명석 판명한 사유>의 조합이 데카르트적 존재란 공간을 생성하고 이 기저가 전체 공간의 성격을 규정한다.


 여기서 혹시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선형대수학에서 기저에 대한 정의는 아래에 접어놓겠다.



 특히 6성찰에서는 물질적 사물[각주:12]의 존재성의 증명 전에"내가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모두 내가 이것을 인식하는 대로 신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란 구절을 보면 존재-사유 함수는 [기만하지 않는 신][각주:13]을 통해 잘 정의됨(well-define)을 얻고  존재에 대해서 내가 인식한 <명석 판명한 사유>란 곳으로 사영이 된다. 그러고 보면, 존재-사유에 대한 공리를 세운 데카르트는 이미 존재-사유함수 속에 기만하지 않는 신을 가정하면서‘신을 증명’이란 것 보다는 ‘신의 확인’을 목적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이는 다음글에 간략하지만 더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존재-사유 함수는, 존재의 부분 집합이 함수를 통해 사유의 집합으로 반영된다고 보고 있고(하나의 값보다는 공역의 한 부분이 더 잘 어울린다.) 그러기에 데카르트는 계속되는 존재를 사유의 역으로 증명한다. 또한 개인의 사유의 실수를 만회하는 것으로 존재성에 대해서 신의 역할을 언급하는 것은[각주:14] 역함수에 대한 조심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면으로 처음부터 정리하면 존재-사유 함수 속에  자신을 집어넣어 사유하는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이 유한하고 신이 무한하다는 점을 들어 신들 생성했다. 또한 연속되고 계속되는 조합으로 참과 거짓(4성찰), 신의 재증명(5성찰), 영혼과 물질의 다름(6성찰)등의 공간을 생성한다. 그리고 그 성찰의 기본적인 모든 성질은 공리(명석 판명한 사유)의 성질로 통한다.


 데카르트는 존재의 기저를 제시하지는 않는다.[각주:15] 아마도 신에게 모두 맡기는 것은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런 구조에서 유추해보자면 그의 생각을 잠시 상상할 수는 있다. 함수적으로 해석하자면 X에서 기저의 집합이 A일 때, f[A]는 Y의 기저가 된다. 이런 면을 이용해면, 만약에 존재의 X 집합에서의 기저가 존재한다면 그 기저가 존재-사유 함수를 통해 사영되면 사유의 집합 Y에서 기저가 된다.즉 우리의 사유의 기저를 잘 생각한다면 그 역인 존재의 기저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오류를 범에 하면 안 된다. 왜냐, 위에서 언급한 기저의 보존은 그 역상에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가 존재의 기저를 새길 기회는 되기에 사유의 기저를 찾는 일을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여튼 역상에서의 오류를 피하려한 것인지 데카르트는 명석 판명한 자신의 존재와 다르게 물질적 사물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신의 의지에 살짝 기대어 봄을 느낄 수 있다.(6성찰-기만하지 않는 신)



5. 나의 한계? 그리고 데카르트의 한계?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분야가 눈에 계속 밟힌다. 참 매력적인 책이다. 어쩜 후대에 계속 데카르트의 성찰, 특히 코기토에 대해 계속 언급되는데, 그는 그것을 어찌 예언한 것인지 데카르트는 머리말에서 이 책을 제대로 읽으라 한다. 이해를 못할 이는 1000번을 읽어도 이해 못할 것이라 했는데, 사실 그게 '나'를 말하는 것 같아 사실 이글을 쓰는 데도 자신에게 의문스럽다. 그래도 두렵거나 부끄럽진 않다. 마지막에 그 데카르트도  "삶의 개별적인 일에 있어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라고 성찰을 마무리하지 않는가. 그도 그럴 것인데 나는 어쩌겠는가? 하여튼 '성찰' 한 권에서도 이리저리 수학을 읽고 싶은 내 고집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혹시 나처럼 이렇게 억지스럽게 맞추어질 수학의 퍼즐이 있다면 언제든 공유하고 싶다고 말하며 이만 헛소리를 줄이고 싶지만~

 그래도 잊지 못할 한권이다. 그가 수학적 공리 구조로 펼쳐낸 논리는 수학을 배워가는 이에게  '날(라리) 수학'만 하는 나이지만 그래도 추천하는 바다.


다음 글은. 신을 법정 앞에 세우다 입니다.
다음 글은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

이글은 @HansHoon @anspruch @No_Goon 이 함께 하는 잡담-발광의

제 1주제에 대한 글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다른 글은 여기 - http://luminescence.tistory.com/3를 참고 하세요


성찰 -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탐구 프로그램에 대한 주석
국내도서>인문
저자 :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 이현복역
출판 : 문예출판사 1997.09.30
상세보기


  1.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 변증의 대표적인 수단이다 [본문으로]
  2. 간단히 설명하자면 명제가 거짓이 되는 하나의 예 [본문으로]
  3. '내가 아는 모든 것이 꿈이다.'라는 가정으로 자아의 모순을 가정한다. [본문으로]
  4. 모든 것이 악마가 나를 속이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으로 꿈의 가설보다 더 강력한 가설이다. [본문으로]
  5. 보통 삼난 논법은 대전제-소전제-결론 [본문으로]
  6. 세명의 대화로 이루어지는 데카르트의 글로 의심을 통해 코기토명제로 가는 과정을 상대적으로 쉽게 기록하였다. [본문으로]
  7. 데카르트는 각 주제에 걸쳐 6가지의 성찰을 실시하였다. [본문으로]
  8. 한 개념의 내용이 명료한 사태(事態)를 명석이라고 하고, 명석하면서 동시에 다른 개념과의 구별이 충분함을 판명(判明)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9. 이때 X는 원인 Y는 결과가 된다. [본문으로]
  10. 사실 데카르트가 신의 관념이 무한하다는 것도 신에 대한 공리적 관념이다. [본문으로]
  11. 데카르트가 사유한 공간을 말한다. [본문으로]
  12. 데카르트는 물질적 사물을 영혼적 실재와 분리된 개념으로 삼는다. [본문으로]
  13. 데카르트가 신이란 관념에 미리 갖고 있는 신념이다. 역시 이 점도 데카르트가 정한 공리가 된다. [본문으로]
  14. 자신이 바라보는 사유나 감각이 자신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에서 나오는 부분이 있음을 이야기 한다. - 6성찰 [본문으로]
  15. 데카르트는 성찰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중점적으로 탐구하면서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나간다. [본문으로]

친구가 빌려간 돈


우리가 하나의 상황을 상상합시다.

어느날 가장 친한 친구가 급한 곳에 쓰겠다며 100만원을 빌리고 싶어합니다.

사실 그 100만원이 당신에게도 큰 돈이라서

살짝 고민은 되었지만 친구의 상황을 알기에 빌려주었죠.


하지만 어느날에서부터 그 친구가 당신을 피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고

점점 친구와의 만남이 뜸해집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친구에게 괴씸한 마음을 갖게 되어

화가나서 그 친구집에 찾아가 빌려간 100만원에 대해서 독촉을 했고

결국 친구는 100만원을 바로 입금해주었습니다.


당신의 돈을 빌려주었다면?


이렇게 진행된 지금, 친구와의 채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 자연스럽게 답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0'원 입니다.


분명 더 이상 채무의 의미가 없는 '0'원이지만

왠지 마음 한켠이 생각보다 자연스럽지 않은 '0'원 이죠.


0이라 함은 그저 "없다"라는 간단한 의미일까요?


이제 그 답을 알기 위해서

'0'의 기원부터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수 '공(空)의 상징 0'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0'이란 것의 기원은 여러 초기 문명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숫자적 기호의 '0'의 기원은 보통

기원전 876년 인도의 명서법이란 책에서 힌두어 sunya란 단어로 쓰인것으로 유래 되었는데

'sunya'는 '비었다'는 뜻으로 이로서 이 당시의 '0'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최초의 '0'의 기원은 '공(空)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우리가 이런 공(空)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을 까요?


저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의 '0'은 공(空)의 상징이였다.


간략히 보자면 공의 의미 '0'은 집합의 공집합과 유사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때 재미있는 사실은 공집합이란 원소가 없는 집합을 뜻하지만

그 공집합이란 것이 그냥 비어있다는 '단' 하나의 정해진 정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직선 위의 (1,2)이란 곳을 보면

분명 이 구간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수로 꽉 차있지만


분명하게 위 구간은 자연수의 집합 N에서 공집합이 되고

실수의 집합에서는 공집합이 아닌게 됩니다.


이렇게 (1, 2)라는 구간이라는

같은 모양이더라도 그 전체집합의 정의에 따라서 '공'과 '공이 아닌 것'이 동시에 되는 것이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비어있다는 것은 어러 얼굴로 나타난나는 것입니다.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여기서는 없을 수도 있고 저기서는 있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비어있는 것을 기준으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생성합니다.

이미 채워진 곳은 새것을 만들 수 없습니다.

즉 (1, 2)가 자연수에서는 공집합이지만 이 곳에 수많은 이론을 통해

유리수로 그리고 실수로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복소수 입니다.

복소수는 우리가 쓰는 수에다 허수라는 가짜 수를 만듭니다.

이는 단 하나의 정의가 추가 되는데 그것은 바로 허수 i입니다.

정확한 정의는 아래와 같습니다.


어떤 것을 제곱하여 -1을 만드는 수 : i


우리가 알고있는 수는(실수) 절대로 제곱을 하면 음수가 나올 수 없습니다.

당연히 제곱해서 음수가 나오는 집합은 우리의 수에서는 공집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새롭게 하나의 세계를 생성하면서 수많은 문제와 현상을 설명하는

복소수 체계가 생기게 됩니다.(자세한 것은 다른 글로 대체하겠습니다.)



이제 조금 비약해 보자면


비어있다는 '공(空)'의 의미는 비었다기 보다 오히려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곳으로



또하나의 채워짐을 위한 공간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공(空)의 0'은 단순한 수가 아니다.

비어있는 곳을 비어있지 않은 곳으로 채워야 하는 철학적으로 쉽지 않은 개념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인한 것인지, 자연스럽지 않은 0은 자연수란 집합에서 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당신과 친구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채무라는 관계하에서

당신과 친구는 빌린 돈의 값 의미있는 공(空)의 값 '0'인 채무를 갖습니다.

하지만 전혀 허무의 상징 이라기 보다 무엇인가 꺼림찍한 마음이 담겨있는 '0'원이 됩니다.




통로의 상징, 대수의 '0'



처음에 생각한 '0'은 단순히 채무의 현재값이 아닐 것입이다.

분명 머리속에서 모종의 과정이 계산을 거쳐 생겨나는데 그 식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100만원(빌려준 돈) - 100만원(받은 돈) = 0(채무의 값)

대부분 이런 과정으로 이끌어낸 '0'일 것입니다.


같은 '0'이란 것이지만 위에서 말한 공(空)의 값이 아닌 덧셈과 뺄셈을 위한

즉, 대수의 영역에서의 '0'으로

(중고등학교때 배운 개념을 들고 들어오자면)

여기서 '0'은 대수에서 "덧셈에 대한 항등원"이 된다.



우리는 이미 많은 수학과 산수교육으로 인해

'0'을 더하면 그 수가 그대로 나옴을 알 수 있는데

덧셈 계산체계의 균형은 '0'이 유일하다


이런 수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의 의미있는 산술체계(기본적으로 Group이)라면 이런 '0'의 존재는 유일합니다.

이런 것을 항등원의 유일성이라 합니다.


또한 '0'이 없다면 우리는 뺄셈이란 것을 수학적으로 도입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쉽게 설명하는 것은 원래의 갯수나 양에 일정량을 빼는 것으로 생각하나

수학적으론 '0'을 통한 음수가 생겨났기 때문에 생겨난 연산이 바로 뺄셈입니다.


직관적으로 계산이야 '0'이 없이 할 수 있지만 그 한계는 분명하고,

우리가 음수를 이야기 하는 것은 '0'이라는 항등원이 있어야 생각이 되는 개념들이죠.


조금 자세히 말하면

1은 -1과, 2는 -2와 짝이 되는 관계가 하나씩 있습니다.

각각 쌍끼리 더하면 되면 '0'이 되는데

이렇게 더해서 '0'이 되는 두 수의 관계를 "역원"이라 한다.

이런 수들의 모임이 바로 음수입니다.

(역원 또한 중고등학교때 배웠으나 다시 뜻을 아래에 접어놓았습니다.)


이제 뺄셈의 연산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5 - 3 이란 뺄셈의 원래 의미는 "5에다가 3의 역원을 더해라." 란 것이고

(수식으로 말하자면 5 + (-3))

이 역원이라는 관계들이 모여서 제대로된 뺄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시의 기준은 바로 '0'이죠.


그렇게 생겨난 '0'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역원인 수들이 줄을 서게 되고

그 수들은 결국 다시 '0'으로 모이게 됩니다.


그리되니 '0'은 하나의 의미있는 통로이며

각 역원들이 한데 응축되어있고 생성되는 하나의 창입니다.




'0'에서 느끼는 우연하고 오묘한 이야기


캠벨의 '신화의 힘'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렵생활의 시절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면

죽음 뒤의 세상은 아무것도 없는 '공(空)'라 생각을 했고

그러기에 그들은 죽음 이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죽음 뒤에는 어떤 것도 없이 장렬히 사라지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그러기에 그들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비워진다는 공(空)의 상징 '0'과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인간이 정착을 하고 농경생활을 시작하는데

매년 작물이 열매를 맺고 죽어가더라도 그 다음해에 다시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의 죽음에 관한 이미지가 바뀝니다.

식물이 죽어 씨앗을 남기고 그 씨앗이 다시 새로운 생명을 끌어올리는 장면이

바로 죽음이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인 개념이 되죠.

또한 지금이라는 이 순간이 과거과 현재의 통로이고

지금 생 이전과 이후를 생각하고 고민이 들어섭니다.

왜인지 그들의 죽음은 대수적인 수 '0'과 비슷합니다.

모두다 사라지나 지나가는 통로요 새로 나는 생명력의 길,


'공(空)의 0'과 대수의 '0', 서로 다르지만 왠지 모르게 닮았다.


이 두가지의 이야기가 과연 두가지 의미의 '0'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논리적으로 증명하라면
나는 웃으며 이렇게 밖에 이야기 못할 것입니다.

'이것 참 우연고도 오묘하군요'


다른 이야기를 살펴보면

중국에서 예로 부터 '0'을 무(無)로 썼습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의 생각에 다른 의미의 '0'이 생겼는데 바로 공(空)으로 쓰였습니다,

공(空)에 대한 의미는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점이 되는 용어로(자세한 의미는 여기 클릭)

재미있게도 '0'과 같은 인도어 sunya란 단어에서 유래된 개념이이념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즉 '정적인 없음'이 아닌 곧 채워질 공간인 공(空) '0'과 유사하죠.


그리고 기독교의 예수는 씨앗이 되어 썩고 죽어서 새로운 생명이 되라고 했습니다.

예수 자신도 구원이라는 생명의 씨앗이되기위해 자신의 신체를 죽음으로 몰고갔고

결국에는 다시 부활이라는 순환을 통해서 '다시 삶'이라는 이론적 근거를 마무리했죠.

여기서 느껴지는 생각은 불교의 그것과는 약간 다른 대수적인 '0'을 느끼게 됩니다.



'0'을 맞이하며


0은 가장 가벼운 수이지만

동시게 가장 많은 것이 들어있는 무거운 수입니다.

여담이지만

공집합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고

또 '0' 단 하나로 의미있는 대수적체계(group)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홀로서기가 가능하고 무슨 의미도 담아낼 수 있는 수 이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완벽함의 상징인 원을

'0'에게 선사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완벽함의 상징인 원으로 0을 쓰는 것은 우연일까?



그 외에도 의미를 갖는 수는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되어지지만

그래도 0만큼 나에게 긴 이야기의 친구가 될 수는 많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나는 내 문제의 답에 '0'이 나오면

왠지 뿌듯합니다.

동감한다면 이 또한 '0의 우연하고 오묘한 마법'일것입니다.


여담 : 그렇다고 그 답이 맞는 것은 아니다.



루저를 위한 수학

 

전통적으로 우리 여성들의 남성들을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외모가 뭐가 중요해 속이 좋아야지!”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 이유

그러나....

루저 논란이 일어난 후로 수많은 남성들은 좌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함에 한번 슬퍼하고 그것을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음에 더 슬퍼집니다.

이 가슴 아픈 현실에서  우리가 벗어날 곳이 어디인가요..


깔창으로 해결하기에는 그 높이는 백두산 보다 높고 그에 대한 인식은 처절하기만 합니다.

 

뭐 그렇다고 지금 위너를 욕하겠단 생각은 아니고

수학적으로 보았을 때 과연 크기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과연 180170보다 혹은 160보다 중요하다고 생각을 갖는 것이 정당할까요?

 

나는 몇 가지 수학으로 나를 비롯한 루저들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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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합에서의 위로 - 일단은 밀도이다!

 

집합을 다루면서 이전에 무한개라는 것을 다루었습니다.(근거는 클릭)

그것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몇 가지를 꺼내오면

바로 실수라는 공간을 나누는 양대산맥 유리수와 무리수 입이다.

 

참고로,

유리수 - 정수/정수꼴이고 분모가 0이 아닌 집단

무리수 - 실수에서 유리수 외의 것

인데

 

둘의 개수는 둘 다 무한개 이고

크기 또한 위로나 아래로나 끝이 없는 것을 보면

그 둘은 왠지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리수는 꽉 차 보이지만 그 개수는 결국 자연수와 개수가 같고(이유는 클릭)

무리수는 유리수과 같아 보이지만 실제 개수는 실수와 같습니다.(이유는 클릭)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크기의 의미가 무시된 채 밀도의 차이가 있을 때

그 차이는 작을 것처럼 여겨지나 그 결과는 끝없이 큽니다.



중요한 것은 밀도이다.

 

다음은 제 친구의 트위터 글이였습니다.

 

-------------------twitter @HansHoon ------------------------

가끔 말이야.

세계의 무한한 광대함이 느껴져서

내가 한없이 작아지듯 압도당할 때가 있어.

그러다 내 안으로 눈을 돌리곤 깜짝 놀라지.

방금 그 무한한 우주를 지어낸 건 내 마음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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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어찌하며 마음속에 우주를 담을 수 있을까요?


이를 수학적으로 그리고 밀도의 의미로 다가보기 위해

먼저 마음속에 우주를 그려넣는 방법을 보겠습니다.


광활한 우주를 내 마음속의 한 곳에 대응[각주:1]시킵니다.

그럼 그 우주는 내 마음속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됩니다.

 

어디서 많이 본 이름들이 보인다.

바로 일대일 함수의 방법입니다.(의미 클릭)

 

자 우주는 3차원으로 직접표현하기 어려우니 이렇게 바꾸어보겠습니다.



[ (0,1)의 실수로 실수 전체 (-,)를 채울 수 있다. ]



 

(0,1)로도 밀도가 있다면 전체를 채울 수 있다.

신기하게도 이것은 입니다.

여기서 직접 증명하는 것은 좀 번거롭고 위의 그래프 하나로 대체하겠습니다.


보자. 모든 실수가 하나하나 빠짐 없이 (0,1)구간에 일대일대응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빠짐없이 서로 같은 개수란 뜻입니다.

 

똑같이 삼차원의 원을 마음속에 채우면

그 곳에 우리는 무한하나 우주를 채울 수 있죠.

그 우주는 거짓이 아니라 실제 우주에 대응된 소우주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밀도의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강한 밀도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게 합니다.

 

유리수와 무리수 이야기로 돌아가면 그 둘은 쌍둥이 같지만

밀도로 인해

듬성듬성하게 분해되어져 버리는 유리수는 세상을 채우지 못하고

밀도가 꽉찬 무리수는 세상을 채웁니다.



그래서 집합은 루저인 나에게 이렇게 위로한다.

그래, 밀도가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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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상에서의 위로 - 모양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하지만 밀도가 꽉찬 남자라도 위로가 모자랄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일대일 대응을 통해 크기의 자유를 얻었어도

모양의 자유를 얻지 못하였습다.

 

우리는 키의 문제를 넘어서면

얼굴 모양의 문제를 맞이하게 됩니다.

서글프죠.

크기의 문제를 키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무슨 눈꺼플이 뒤집힌 눈이며 입술의 두께며 코의 높이며..

이로써 첫 번째 위로로는 다 채우지 못함을 알게됩니다.

그렇다고 포기하기 이르죠.

이번의 위로자는  위상수학”입이다

우리는 얼굴의 모양에 좌절하거나 우월감을 갖는다.

 


.. 고등학교과정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이 위상수학은 수학의 모든 산술적인 부분을 모두 빼고

구조적인 부분만 남긴 조금은 유별난 수학분야입니다.


처음부터 언급하기에는 이곳의 공간이 너무 비좁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만 꺼내어보면




우리가 다르게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해하기 어려우니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꽉찬 속을 가진 고무공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근데 이 고무공이 엄청난 탄력과 수축성을 가졌다고 생각했을 때,

고무공을 크게 늘린 다음 그 표면을

지구처럼 울퉁불퉁하게 만들면 그 모양은 지구가 되어버립니다.


크기나 기본적인 모양이 달라도 같을 수 있다.



또 만약에 더 키우면 태양도 만들 수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잘 주무르면 접시가 될 수도 있고 아령 모양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잘 각지게 하면 주사위가 될 수 도 있죠.

(이 점은 최근에 정확하게 증명된 점입니다.)

 

이렇게 같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위상동형 즉, 위상(수학)적으로 같은 것이라 하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둘은 위상적으로 동형이다


우리의 도넛을 잘 주무르면 커피잔을 만들 수 있으니

그럼 도넛 - 커피잔은 위상이란 세계에서는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수학에서 보면 세세한 모양이 어떻든 그건 문제 될 것 없습니다.

다 같은 것이 되는 것이죠.

 


다만, 같아지기 위해서는 한가지의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 바로 Hole(구멍)의 개수이다.

잘 보면 처음 예의 고무공으로 도넛을 만들 수 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Hole의 개수가 달라서 그런 것입니다.


즉,

같은 Hole의 개수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위상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다는 것임...=_=;; 수학적으로... 쩝..


이를 근거로 인간은 같은 Hole의 개수를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서

위험한 추측하나를 해보자면,

아저씨의 원빈이나 저나 이글을 읽고 있는모두가 위상적으로 동일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원빈 혹은 아이유와 위상적으로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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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밀도의 의미는 크기의 의미 보다 크다.

 

크기랑 어떤 수치의 의미가  됩니다.

수의 의미에서 순서의 차이가 있을 순 있으나

정말 의미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그 의미가 적을 수 밖에 없죠.

 

과연 우리는 170180이란 것에서

숫자 크기로서의 170 < 180 이란 것 외의 어떤 의미를 더 찾을 수 있나요?

 

하지만 우리는 모두 위상적으로 동일하다.

그리고 속이 꽉 찬 우리는 존재하는 무엇과도 대등하죠.

 

정말 루저를 말하기에 수치적인 해석은 바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루저는 그 밀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포한함해서 논란 되는 180cm이하의 루저를 응원합니다.

 

이 사람들도 루저? 세상을 다르게 보자!



그리고 그 보다더 위로하고 싶은 것은 오늘도 밤을 지새우는 학생들에게 위로합니다.


점수의 크기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밀도이다.

그러니까 이런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


친구의 트윗 마지막 말로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방금 그 무한한 우주를 지어낸 건 내 마음이었거든





 

  1. 일대일함수 [본문으로]

<~ 이전 (part 2. 작도가능의 확장)


이전에 글을 통해서

작도가능한 것의 한계를 알았습니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리수와 유리수의 2의 거듭제곱근들의 사칙 연산까지 가능합니다.




-------------------- 왜 작도 불가능 인가 --------------------



1. 임의의 각의 3등분은 작도 불가이다.



모든 각이 3등분 되지 않는 다는 말은 아닙니다.
특수한 몇 개의 각은 독특한 방법을 통해서 삼분할되는 각도 분명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90도는 삼분할하녀 30도씩 분할 가능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반적으로 가능한 3분할이 있냐는 것입니다.

결론은 역시 불가능합니다.
증명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편합니다.

'딱 하나라도 불가능'하다라고 보이면 위의 명제는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수한 각,
"60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참고 : 이 방법은 1837년에 피에르 방첼의 증명입니다..)
(수식 많은 관계로 한글로 프린트 스크린으로^^;; 다음부터는 한글 2010의 api를 이용해야 겠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다른 대수적 이론도 많이 들어가 있지만 오히려 이해를 방해하므로 생략하겠습니다..
(예 : 유리수체 위에서 기약)

여튼 결론적으로 60도도 삼분할을 하려면 삼중근이 나오고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일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각을 삼분할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2. 임의의 정육면체의 부피가 두 배 되는 정육면체는 작도 불가이다.(델로스의 문제)



이것은 1번 문제와 다르게 일반적으로 작도 불가능합니다.
증명을 쉽게 하기 위해서
길이가 1인 정육면체를 생각하겠습니다.(a라 해도 동일한 방법으로 증명가능합니다.)


1번 문제에 비해서 비교적 쉽게 증명 가능합니다.
델로스의 신탁에서는 신이 작도 불가능한 문제를 던져 준 것입니다.
(생각보다 그들의  신은 참으로 잔인했습니다.)



3. 임의의 원의 넓이가 같은 직사각형은 작도 불가이다.



역시 증명의 편의를 위해 
길이가 1인 원을 생각하겠습니다.


뭐 이 역시 여렵지 않게 증명가능합니다.

(여기서 파이가 유리수체에서 초월수라는 것의 증명은 생략하겠습니다.)




-------------------- 불가능으로 안착된 결론 그리고 불복 ----------------------


우리는 위의 3문제를 위해서
"작도"의 의미를 살펴 보았고
"작도 가능"한 수의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2000년간 수학자들과 수학에 관심 있던 지식인들의 도전하게 만들었던
<3대 작도 불가능>이라는 과제를
기나긴 시간 후에 <불가능>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어쩜 살짝은 힘이 빠질 일이기도 합니다.


당연한 느낌일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게임에서의 퀘스트(임무)를 받고 의욕적으로 뛰어들 기사들이
모진 역경을 뚫고 나왔을때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불가능이라는 벽을 맞닥들이게 된다면,
그 퀘스트는 이미 불가능했다는 그런 결과는 절망적이죠.

이런 마음일까요?

불가능이란 증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문제에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특히 특수한 경우 가능했던

각의 삼등분 문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을 삼등분가(trisector,삼등분 하는 사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실재로 인터넷에서 각의 삼등분문제를 검색해보면 쉽게 만날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방법으로 논문도 내놓는 일도 있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사실 학부 공부하던 도중 교수님께서도 이런 고충을 이야기 했습니다.
어떤날 우편으로 책한권 분량의 삼등분가의 논문을 받고
그런 우편을 꺼내보기도 싫지만
그래서 성의를 생각해 논문을 꺼내 틀린 부분을 지적해 회신한답니다.
(뭐 이도 성의 있는 경우에서만으로 한정됩니다)

그럼 받아들이고 다시 연구하거나,
반박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거나 인데
사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아마도 기하학이 대수학으로 증명되는 순간을 온전하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 불가능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과 델로스 신의 메세지 -----------------


<불가능>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은 어떨까요?


대수학적인 증명을 반기지 않는 삼등분가들 처럼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한것 같습니다.
모든지 가능케 했던 인간의 능력,
혹은 인간만이 할수있다 생각하던 종의 특권의식이란  감정에 익숙하던 인간이
불가능과 마주하는 순간, 왠지 모르게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보통의 증명이란
그것이 참이거나 해결가능을 보여왔지만
이런 일방통행의 증명이

작도 불가능의 의미는?


작도 불가능이라는 큰 벽 앞에서
더 긴 시간을 헤매게 만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결국에는'불가능을 증명'

하면서 더이상의 도전은 허락치 않게 되었죠.


델로스의 신의 문제는 어떤 메세지 일까요?

자신의 위엄을 더 크게 떨치려 그랬을까요?
아니면 혹시
인간의 교만함에 대해 일침하는 신의 메세지였을까요?

그 답이 어떠하든
델로스의 문제의 답은 "너희들 능력에서의 불가능"이였습니다.






<작도불가능 순서>

- 작도불가능 문제의 기원(part 1)

- 작도의 정의와  작도가능(part 1 - part 2)

- 작도 불가능과 그 증명(part 3)


사람이란 어떠한 문제가 주어지면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고.
"오지랖"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듯이
사람들은 문제해결에 지대한 관심을 갖습니다.

게임에서도 우리는
퀘스트(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것)라는 것을 진행하는 데,
NPC(게임 속 중립 케릭터)의
머리 위에 "?"란 글자가 뜨게 되면 어떤 강한 끌림으로
여지없이 대화를 하고 임무를 받게 됩니다.

또한 재미있는 사실은
필요 없는 임무라도 일단 듣게 되면
수행하고 싶어지죠.
만약 그 퀘스트가 많은 사람이 실패했던 것이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고대의 퀘스트를 받게 됩니다.


---------------- 퀘스트1 : 제단 부피 2배로 만들기 ----------------------


게임의 퀘스트 같은 일이
기원전 430년 경에 에개해의 델로스 섬에서 있었습니다.

델로스 섬 전경



델로스섬의 시민들이 고된 전염병에 시달리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델로스의 아폴로 신탁에 맡기었고 그에 대한 답은 이랬습니다.


그리스 시대의 신전



<정육면체의 제단을 두 배로 만들라>



이에 시민들은 제단을 2배로 만들기 위해서 제단의 각 변을 두 배로 늘렸으나
그러나 전염병이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그 이유는 육면체의 변을 2대로 늘리면

그의 부피는 2배가 아니라 8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델로스의 시민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플라톤에게 질의하였습니다,


이에 플라톤의 대답은

모두가 학문을 게을리해
신의 노여움을 산 것으로 판단하고 시민들을 꾸짖었다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플라톤이 결코 2배의 제단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이 후 정육변체의 부피를 2배로 만들기 위한 문제가 나왔으나 해결되지 않았고.
흔히 이 문제를 델로스의 문제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거 부피만 2배인 이 문제가 왜 해결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이유는 이 제단을 늘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작도'라는 것에 한정되어있기 때문입니다. 




----------------------- 3대 작도 불가능-----------------------


델로스의 문제와 다른 2문제를 포함한 문제가
기원전 5세기부터 유래 하였습니다.

그게 바로 유클리드 기하학 내에서의 "3대 작도 불가능"문제 입니다.

특히 이 "작도"라는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 그 자체라고 보면 되는데
작도의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작도의 정의


1.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사용한다.

2. 유한개의 단계를 거친다.





(유한개의 단계를 거치는 이유는 이전에 설명을 링크합니다. 링크-2~3 문단 참조)

눈금없는 자와 컴퍼스만으로 대부분의 알려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부터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3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문제를 3대 작도 불가능이라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3대 작도 불가능>


1. 임의의 각을 3등분하는 직선 작도

2. 임의의 정육면체의 부피가 2배가 되는 정육면체 작도

3. 임의의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 작도

그림으로 보자면 이렇습니다.

1. 각의 3등분2. 부피 두배의 정육면체

3.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



듣기에는 아주 쉬운 문제(혹은 퀘스트!)이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3가지 작도 문제는 이미 "불가능"으로 증명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작도불가능 문제는 불가능이 맞다."다.


그 불가능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작도가능하다는 말이 무엇일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작도 가능? ------------------------



이제부터 그 이유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사실 이 내용은 기하학임에도 불가하고

이에 대한 증명은 기하학 내부가 아니라 대수학이란 다른 수학 분야로 증명되는데
그리 쉬운 쪽에서 증명되지 않지만
차근 차근 접근 하면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선 작도 불가능을 섣불리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작도 가능"에 주목해야 할 것 입니다.



과연 작도 가능한 것은 대체 어떤 것들인가?



작도가능도 너무 넓은 개념이므로
"우리는 작도가 가능한 길이는 대체 어디까지일까?"로 한정하여 생각하면 됩니다.




<1번> A, B가 작도 가능하다면
A+B , A-B , AXB , A/B(B≠0)은 작도 가능이다.


먼저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 아래 그림으로 엄격한 증명을 대신하겠습니다.



덧셈뺄셈



곱셈 : 1에서 A로 그린 다음 평행한 선을 B에서 그림 나눗셈 : 반대로 B에서 A로 그린 다음 평행한 선을 1에서 그림



위의 그림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증명가능합니다.
갑자기 사칙연산이 생뚱맞기는 하지만 작도가능한 수를 정하기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에 꼭 거쳐가야합니다.

그 과정을 이제 구체적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어짜피 눈금 없는 자이므로 어떤 길이를 수 1로 하면
반복되는 덧셈으로 더 많은 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덧셈으로 생성되는 수(길이)는 1+1=2 1+1+1=3 같이 자연수인 길이가 작도 됩니다.



뿐만 아니라.
빼기 역시(방향성을 준다면) 가능하므로 정수인 길이가 작도 가능하며

곱하기와 나누기를 적용한다면 유리수인 길이 또한 작도가능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일단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유리수는 전부 표현가능합니다.

(cf. 유리수란 분모가 0이 아니고 정수의 분수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수)


다시 말해서
우리는 1이란 길이를 정하면 1/2인 길이나 99/100인 길이도

작도를 통해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살짝 확장해보면.
우리는 이제 좌표 평면에 작도 가능한 점을 다 찍어보면

유리수 인 점은 다 찍을 수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부분을 채울 수 있습니다)



------------------------ 사칙연산 포함의 의미------------------------


사칙 연산이 포함 되었다는 것은 수학(특히 대수학)에서 엄청난 의미를 갖는데
이제 작도 가능한 점을 하나 새로 발견한다면
기존의 작도 가능했던 점들과 서로 덧셈 뺼셈 곱셈 나눗셈하여
자동적으로 많은 수의 작도 가능점을 생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도 가능의 범위는 어디까지 일지 궁금해 집니다.

이렇게 많은 수를 작도 할 수 있다면
혹시 불가능 문제에 대해서 까지 작도가능이 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질문은 다음 파트에서 이어가겠습니다.



  10월 중순 중간고사가 끝나고 이제 한참 성적 확인을 할 시간입니다. 이제 하나 둘 성적이 선생님의 손에 들려서 오면 하나 같이 모여서 자신의 성적을 확인 하는 모습은 어느 고등학교든 쉽게 접할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자신의 성적 외에도 다른 학생의 성적을 확인 하고 싶은 녀석부터 점수에 만족하는 녀석까지 참 다양한 표정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선생님에게 들려있는 성적을 무심한 듯 확인 하는 학생 중에서는 누구보다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는 녀석도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행동과 표정입니다.


1. ‘적어도’ 20점과 ‘겨우’ 4.7점

4.7점은 이번 3학년 2학기 종합고사 수학의 최저점입니다. 이 점수를 얻은 학생은 조용히 성적표를 확인 하고는 무언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 학생도 무엇인가 의도한 점수가 있었지만 그에 미치지 못한 것에 약간의 후회스러운 눈치였죠. 오늘 꺼내고자 하는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20점과 4.7차이에서 비롯된 한 학생의 확률적인 비극을 수학적으로 비교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이런 상황이 펼쳐지면 선생님도 학생도 이 상황을 아름답게 무마해 보려합니다. 교사는 약간의 장난기와 위로가 섞인 미소를 녀석은 민망함과 그에 내가 밀리지 않는 자존감의 미소가 서로 교차하죠. 내심 민망함을 이겨보려 어려가지를 살짝 물어 봤습니다. 수학 시험 준비는 어떻게 했던 것인지, 혹은 문제가 어떻게 느껴졌는지, 특히 목표 점수가 있었는지 말입니다.

목표점수와 다르게 나온 이유는?


  녀석은 자신의 성적에도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이 상황을 설명합니다. “적어도 20점은 나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요. 겨우 4.7점이네요.” 이 학생에서 느끼는 이 학생은 목표는 적어도 20점이었습니다. ‘적어도’ 말입니다. 왜 20점인지는 묻지 않아도 명확합니다. 이번 시험은 객관식 100점이었고, 선택문항은 5개 이니 말입니다. 100/5=20 이란 식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적어도’ 20점을 생각한 녀석이 ‘겨우’ 4.7점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결과에 대한 문제는 그렇다고 하여도 원인은 명확합니다. 이는 학생의 말로 대신합니다.

  “괜찮아요. 국도를 타서 조금 잘못 탔나봅니다. 아! 고속도로를 탈걸……. 너무 아깝네요.”

   

2. 국도와 고속도로

  국도? 혹시 시험에 대해서 큰 기억이 없으신 분들을 어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은유법은 저에게 아주 익숙한 단어로 수학이라는 과목 앞에서 작아지는 이들을 많이 봐온 저에게 매번 보는 현상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고속도로라는 것은 한 번호로 일자로 반듯하게 찍는 것이며, 국도는 찍기는 찍되 어려 번호를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속도로이것은 국도 입니다.


  고속도로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이유는 시험에서는 문항 보기에 대한 평균치가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한 번호로만 찍었다면 적어도 20점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도로 찍었던 그 녀석은 쉽게 얻을 수 있었던 20점을 놓쳤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참 흥미롭습니다. 사실 국도를 탔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평균 점수가 다른 것은 아닙니다. 기댓값을 계산하더라도 5개의 선다형이라고 했을 때는 같은 20점을 기댓값으로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그럼 그 결과의 차이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3. 기댓값과 리스크

  지금까지의 말을 정리하자면 일자로 찍은 ‘고속도로’와 임의로 찍은 ‘국도’의 답안의 점수의 기댓값은 같은데도 불구하고 결과는 너무나 다른 것을 말했습니다. 만약 4.7점의 학생이 일자로 답에 고속도로를 내었다면 분명 그 학생은 20점을 성취했을 것입니다. ‘반드시’ 말입니다. 이유는 바로 문항에 대한 비율을 동일하게 내는 지침 덕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고속도로’는 절대로 20점 이상을 맞을 수 없습니다.(동일배점과 동일 비율을 가정할 때 말이죠.)

  아까 학생의 말에서 ‘적어도’ 20점과 ‘겨우’ 4.7점을 언급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이렇게 말하라 수 있습니다. ‘해 보았자’ 20점 그리고 ‘잘하면’ 80점. 이렇게 말입니다. 이렇게 달리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리스크(risk)’때문입니다.


리스크는 위험성을 뜻합니다.



  리스크란 것은 위험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통 투자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로 많은 사람들이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조언에서 접하는 용어입니다. 바로 이 비유로 리스크를 설명하자면 계란이 한 바구니에 전부 담겨 있을 때 놓치거나 할 때 바구니 안의 모든 계란이 한 번에 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눠담게 되면 그 위험성을 나눌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누면 나눌수록 더 신경 써야 합니다.

  4.7점의 녀석에게서는 기댓값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리스크를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적당합니다. 녀석은 안정적인 고속도로 즉, ‘적어도’나 ‘반드시’ 얻을 수 있는 20점을 포기 하고 국도를 달리므로 그 위험성을 크게 만든 것입니다.

   

4. 한 바구니의 계란과 일자로 찍은 정답

  오해할 수 있는 것이 이미지 상 한 바구니속의 계란과 한 줄로 밀어 넣은 정답이 같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약간의 오해의 결과입니다. 보통 적은 리스크의 답은 분산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편차와 리스크가 강력한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리스크에 대한 것은 사실 표준편차란 하나의 개념만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표준편차에 대한 설명은 더 보기로 접어놓겠습니다.)



  한 바구니에 넣은 계란과 한 줄로 찍은 답(고속도로) 둘 모두 표준편차가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즉 하나의 사건에서 일어나는 평균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해석은 완전히 다릅니다. 계란이 피해야 하는 것은 깨지는 것, 즉 실패에 대한 리스크에 대한 표준편차가 없는 것이며, 한 줄로 찍은 답은 성공에 대한 리스크에 대한 평차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둘은 편차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리스크에 대해서 다르게 평가되는 것입니다.

리스크 관리는 생활의 많은 선택에서 필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학에서의 여러 개 바구니에 담는 계란은 위험성에 대한 표준편차(분산)를 늘리는 것이 바로 리스크를 줄이는 것이라면, 답을 찍어서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즉 성공에 대한 편차를 줄이는 것이 리스크를 줄이는 일입니다.

   

5. 리스크에 대한 당연한 이야기

  결론적으로 편차를 늘리는 것만이 리스크를 줄이는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위험성에 대한 높은 편자 그리고 성공에 대한 낮은 편차를 고려하는 것이 진정한 리스크 관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 이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위험성을 넓게 성공은 좁게 형성하자는 것입니다.

리스크관리는 실패에 대한 관리 뿐만 아니라 성공에 대한 관리를 포함합니다.


  하지만 바구니와 계란으로 암기로만 인식하는 리스크 관리는 어쩜 더 큰 리스크를 안고 시작하는 것 일 수도 있습니다. 경제학의 계란이야기와 교실의 4.7점 이야기는 위험성과 성공의 편차라는 양면의 리스크 관리를 통해서 행동의 범주를 정하는 것이 현명할 것을 말해주는 좋은 예입니다.

  물론 20점이라는 기댓값에 대해 좀 더 나은 결론을 위해 10개의 문항을 일자로 찍고 10개의 문항을 임의로 찍으라는 것이 결론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좋은 결론, 즉 성공적인 완성을 위해서는 편차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제학에서 말하자면 ‘확실한 정보’가 될 테고, 중고등학생 혹은 대학생에게는 그 과목을 찍기 전에 정확히 맞힐 수 있는 노력과 능력이 먼저일 것입니다. 그것이 고속도로냐 국도냐의 문제를 넘어 진정으로 리스크를 줄일 수 있습니다.


  리스크에 대한 당연한 이야기로 마무리 합니다.

“리스크라는 편차의 확률게임 보다 능력이 우선입니다.”

능력은 리스크 관리의 첫번째 입니다.


P.S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음.. 수학의 한 문제에서 정답률 0%가 나왔습니다.....

교사 하면서 처음 본 것이라 신기하네요..... 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데 너무 알리고 싶어 글로 남깁니다.=_= 참고로 13명이였던 이 반에서 정답률이 0%가 나올 확률은 대략 0.055%로 1/25 정도로 그렇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만, 경력이 10년 넘은 부장님도 처음 만나보는 일생에서의 한번의 만남이라 이렇게... 아무도 없는 숲에서 외칩니다.


정답률 표입니다.ㅎ


다음글->

 많은 주변인들에게 문의를 받는 수학 문제 중 하나가  "0.9999······=1"이라는 것입니다. 9가 한없이 이어지는 이 수가 과연 1과 동일한 것인지에 대한 것은 논란이 많죠. 분명히 모양이 다른 두 개의 값이 같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이것은 1/2=2/4와 같이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 혹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확연하게 다른, 특히 1이 더 큰 수로 보이는 이 명제는 많은 이에게 의심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없이 이어지는 수의 값은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이를 쉽게 증명하는 이는 보통 “1/3 = 0.333······이므로 양변에 3을 곱하면 0.9999······=1이다.”라고 증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하게 증명하지 못한 하나가 남습니다. 그럼 정말 ‘1/3 = 0.333······’인지 말입니다. 적어도 무한번 나눗셈이 가능한지 부터가 문제이죠. 그렇기에 이 증명법은 단지 문제의 어려운 것을 잘 감추어 놓은 것[각주:1]뿐입니다.

1. ‘무한’의 덫

 위의 이야기에는 중요한 단어를 뽑아 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없이’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일상에서 수도 없이 써온 말입니다.(방금도 ‘한없이’의 비슷한 표현인 ‘수도 없이’가 나왔죠.) 우리는 이 말을 일단 ‘무한’이라고 합니다.(무한 = 한이 없다.) 같은 말이지만 왠지 ‘무한’이 더 간지 납니다.

 물론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한의 뜻과 느낌을 알고 있습니다. 해가 지는 바다 끝 수평선에서 상상되지도 않는 거리의 별에서 그리고 남은 제대 날짜 앞에서. 하지만 이 모든 예는 사실 ‘한없이’가 아닙니다. 수평선의 끝엔 아메리카가 있었고, 국방부 시계는 지금도 제대를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가 끝도 없다는 뜻으로 ‘한없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재로 그 단어를 접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제대를 위한 국방부의 시계도 결국 유한입니다.




 그렇기에 막상 ‘무한’을 맞이하면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 많습니다. 0.9<1 이고 0.99<1 이며 0.9999999<1 인데, 유독 무한이라는 단어가 접해지는 ‘0.9999·····’은 1과 값이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무한에서 마라토너는 거북이 랑의 달리기경주[각주:2] 에서 전혀 이길 수 없는 것 같은 그런 환상도 제공하기도 합니다.(이 이야기는 이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무한을 말하는 법

 그럼 무한을 수학적으로 정확히 정해지고 싶어집니다. 물론 그 과정은 상당히 중요한 과정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무한 = 유한이 아니다.’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하는 정의는 지금 다룰 필요성이 적어 다른 글의 링크로 대신합니다.(링크) 우선은 “한없이 크다.” 정도로 알고 있다 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정의가 되었으니 이것을 한번 써보고 싶어지는데 숫자 십은 ‘10’ 만은 ‘10000’ 억은 ‘100000000’로 쓸 수 있지만 1억을 1억 번 곱한 것 보다 큰 것인 ‘무한’은 이곳에 적기에 공간이 너무나도 좁습니다.  그러기에 무한의 수학적 기호를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8을 뉘어놓은 모습으로 우리는 무한을 표시합니다.



 그 기호는 이미 정해져 있죠. 바로 숫자 8을 옆으로 뉘어놓은 것 같은 모양인 입니다. 원이 두 개 겹친 이 모양은 영원히 반복한다는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그 상징성이 직접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주인공인 박사가 자신의 정신병과의 끝없는 싸움과 극복을 상징하며 자전거 바퀴로 그리는 무늬가 이 무한의 상징 ‘∞’입니다.


3. 무한을 다루는 법

 사실 수를 다루는 것은 상당히 쉬운 작업입니다. 예를 들어 ‘2x+1’이란 것의 ‘x’에 ‘10’을 넣으면, ‘2*10+1’이고 계산하면 ‘21’입니다. 그럼 여기에 ‘∞’을 집어넣을 수 있을 까요? 다시 말하자면 ‘2*∞+1’이란 것이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과연 2*∞+1은 무엇일까요?

 사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이는 큰 문제이며 중요한 점입니다. 앞으로 이 무한을 이용하서 우리는 수많은 이론을 펼쳐갈 것입니다.

 어떤 값은 근사치에 도달하기도 하고, 비교를 하기도 하면 무한히 반복되는 계산식의 값을 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해결 할 수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작업의 대상이 미지수인 x에 넣는 작업조차 못하는 것이 바로 ‘무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아이디어를 통해서 이를 해결할 것입니다. 우선 다음을 기초로 합니다.

a. 무한은 어떤 수 보다 큰 것이다.
b. 하지만 무한을 일정한 값으로 대입할 수 없다.
c. 그렇기에 수를 키워가면서 그 큰 수를 유추하고 가까워지는 값을 무한에서의 값이라 한다.

 위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가까워지는 값’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이제부터는 [극한]으로 부를 것입니다. 영어로는 고등학교 수학 시간 속 너무도 익숙한 단어 ‘limit’입니다. 이 극한이 바로 무한을 다루는 가장 기본적인 툴(tool)입니다. 즉 이 ‘극한’을 통해 무한을 다루는 것입니다.


4. 과연 ‘1= 0.999·····’인가?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정말 1= 0.999····· 인지 말입니다. 그럼 위의 방법대로 단번에 무한번인 0.999·····을 구할 수 없습니다. 즉 천천히 생각하는 것입니다. 0.9 그다음에 0.99, 0.999, ····· 이렇게 하나씩 구해서 그 규칙 혹은 가까워지는 값을 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한을 다루는 문제입니다. 더 자세한 방법은 아래의 절차를 따릅니다.

0.9    = 0.9
0.99   = 0.9 + 0.09
0.999 = 0.9 + 0.09 + 0.009
      .
      .
      .


 이렇게 계산을 하면서 1에 가까워짐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인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쉬움이 있지만 아직은 바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문제는 지금까지의 것으로는 설명하기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수평선과 저 별에 가기에는 아직 재료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극한(limit)에 대한 정확한 쓰임을 통해서 이 공포의 문제 ‘1= 0.999·····’에 대해 더 핵심적인 방법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정말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원하시면 공식으로 정리해 놓은 이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다음글->

  1. 순환오류의 일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2. 보통 이 이야기를 제논의 역설이라 합니다. [본문으로]


이전 글에서는 자연수에서 정수로의 확장이 단순히 음수와 0의 추가가 아니라  <하나의 집합, 하나의 연산>의 쌍을 의미있는 구조(군, group)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확장을 하게 된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즉, '자연수'에서 가장 기초적인 연산인 '더하기'를 더 의미있게 활용하기 위해서 자연수에 음수와 0을 더해 '더하기'에서 완벽한 집합을 만들었는데 그 집합이 바로 '정수'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수는 '더하기'에서 완벽한 구조를 이룬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서도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사칙 연산에서 우리가 완성한 것은 '덧셈과 덧셈의 역 연산인 뺄셈' 정도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곱셈과 나눗셈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제 부터 주인공은 '더하기'에서 '곱하기'로 넘어갈 시점인 것입니다.

 
16. 연산 '곱하기'란 무엇인가 - 곱하기(곱셈)

우리가 연산 곱하기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동일하게 느껴질 것 입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와 아이의 첫번째 벽이 되기도 하는 '구구단'입니다. 구구단을 달달 외우면서 곱셈을 하나의 문자표처럼 외우면서 머리속에 '삽입'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 삽입에 대한 확인을 이용한 '놀이', 구구단 게임을 통해서 상대방을 무안하게 하거나 집단의 즐거움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물론 구구단을 통한 곱셈의 '삽입'은 복잡한 계산으로 난무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수 조건이긴 합니다만 이미 암산의 대상이 되어버렸죠.

잘 생각해보면 우리 일상에서 느껴온 곱셈은 구구단을 넘기가 힘듭니다. 또한 곱하기는 그 정의를 도입할 때 단지 '더하기의 축약판'이라는 점으로 처음에 적용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2 X 3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정의합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2를 3번 더한다고 어렵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곱셈은 쉽게 더하기를 반복계산으로 정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곱셈이 그 자체로써 연산의 위상을 얻을 수 없습니다. 더 복잡하기만 할 뿐 그저 외우는 '삽입'대상으로 느껴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곱셈이 하나의 유연한 연산으로의 도약을 꿈꿀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도약이 수의 구조상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이 정수라는 더하기에 대한 완성을 이룬 구조에 곱셈을 다시한번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먼저 곱하기에 대한 정의가 더하기의 반복계산이란 것에서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덧셈의 경우에서 처럼 이 과정을 상당히 복잡한 과정이고 그 과정이 불필요합니만 정확한 정의를 페아노 공리측면으로 아래에 조금만 접어 놓겠습니다. (정신 건강상 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17.  연산 '곱하기'의 결합성

      
이 모든 정의에 간단히 넘어가더라도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 하나는 곱하기가 더하기를 이용한 정의를 갖지만 보조 연산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산으로 개별적으로 정의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하기 뿐만 아니라 곱하기도 하나의 당당한 연산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몇가지 연산으로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시행해 볼 요인은 바로 곱하기가 결합법칙을 성립하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결합법칙에 대해서 이 전에 짧게 그  중요성을 이야기 한 적이 있어 자세한 설명은 링크(링크)로 대신합니다.(결합법칙에 대한 링크 / 구조에 대한 링크)

하지만 간략히 설명하면 결합법칙이란 것은 임의의 정수 A, B, C를 고를 때 곱하기에 대해 AX(BXC)=(AXB)XC 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성질이 성립함을 보이는 것은 페아노의 공리를 통하면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지만 어렵지는 않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직관적으로도 금방 이 성질이 곱하기에서 문제 없음을 알 수 있죠.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은 집합위에서 자유로운 연산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연산으로 곱하기는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만, 이것으로 확실한 독립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사실 연산을 만드는 일은 상당히 쉽습니다. 규칙이란 것이 만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곱하기가 가장 기본 연산인 +와 함께 중요한 하나의 연산으로 대우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8. 곱하기를 중요하게 하는 요인 - 분배법칙 (배분법칙)

수많은 연산중에서 곱하기를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 까요?  단지 그냥 더하기의 반복 계산을 쉽게 계산하기 위한 하나의 구조일 뿐일까요? 이 답을 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구조를 단단히 하는 방법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에 설명했던 군(group)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구조적인 조건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 중하나가 바로 위에서 제시했던 결합법칙입니다. 그리고 곱하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인은 바로 '분배법칙(배분법칙)' 입니다. 아마 대부분 수학책에서 한번쯤은 배운 내용이고 또한 열심히 배운 분이라면 '이게 뭐 대단한 것이지?'란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수능에 나오지 않을 뿐이지 분배의 법칙또한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선 분배법칙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집합 A 위에서 연산 x가 연산 +에 대해서 분배법칙이 성립한다는것은
집합 A의 임의의 원소 a,b,c의 원소에 대해 다음이 성립하는 것이다.

ax(b+c) = (axb)+(axc)
(a+b)xc = (axc)+(bxc)

하지만 이 관계가 갖는 구조적인 중요성에 대한 언급은 글의 길이 관계상 다음글로 미루겠습니다. 하지만 곱하기에 대해서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곱하기는 더하기와 아무 밀접한 관계(분배법칙)을 갖으면 그 스스로도 하나의 연산으로 온전히 설 수 있는 힘(결합법칙)이 있는 중요한 연산이란 것입니다. 이제 곱하기를 중심으로 수 체계가 재정립됩니다.

이제 진정한 곱하기의 역습이 되겠습니다.

이제 더하기과 곱하기는 동등한 입장에서 구조를 완성합니다.




1. 결합법직의 정의

* 가 집합 A에서의 연산일 때, 집합 A의 원소 x, y, z를 임의로 선택했을 때 다음이 성립하면 연산 *가 집합 A에서 결합법칙이 성립한다고 한다.

조건 : x*(y*z) = (x*y)*z

2. 결합법칙의 중요점

연산이란 것은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것이지만 사실 연산이란 것은 함수의 일부분이다.
특히 함수 중에서 하나의 쌍을 하나의 값으로 보내는 함수이다.
(예 '+'는 (2, 3)을 5로 보내는 함수이다.)

어떤 연산이든 한 쌍의 원소사이에서만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하기를 보더라도
2+3+5를 바로 말할 수 있다. 혹은 2x3x5를 바로 말할 수 있다. 이런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결합법칙이 성립함이다.

더하기과 곱하기가 결합법칙이 성립하기 때문에 앞의 두개에 대해서 먼저 연산하든
아니면 뒤의 두개부터 연산하든 상관없이 같은 값을 낸다.

따라서 굳이 '괄호'로 연산을 한 쌍씩 나눌 필요없이 괄호를 생략하고 연산을 연이어 쓸 수 있다.
즉 연산은 해당 집합 위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연산이 구조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결합법칙이 상당히 중요하다.
결합법칙이 없다면 그 구조가 하나의 규칙을 만들어가기 어렵다.
하나의 작은 조건이지만 이 조건을 꼭 통해서야 완벽한 연산이 될 수 있기에
[결합법칙]에 쓰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1. 가장 기본적인 연산 [더하기]


자연수의 집합을 N이라고 했을 때, N X N 이란 집합은 (n,m)이렇게 자연수 쌍들의 집합입니다. 이때 +는 다음을 NX N이란 집합에서 N이란 집합으로 만족하는 함수입니다.




ㅁ A1 : +(n,1)='n의 다음 자연수'


ㅁ A2 : +(n,m)=+(+(n,1), 'm이전의 자연수')



 A1은 간단히 말해서 다음 수가 되는 것입니다.

+(1,1) = 2
+(2,1) = 3
+(3,1) = 4
+(4,1) = 5


A2는 덧셈의 알고리즘입니다.
+(2,2) = +(+(2,1),1)
           = +(3,1)
           = 4
+(2,3) =  +(+(2,1),2)
            = +(3,2)
            = +(+(3,1),1)
            = +(4,1)
            = 5


쉽게 말하자면, +(2,3)이란 2에서 부터 1을 3번 +연산시킨 것입니다.
더하기 생각보다 어려운 연산입니다.



2. 곱하기에 대한 페아노 공리

자연수안에서의 연산 X : NXN -> N 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ㅁ N1 : nX0=0

ㅁ N2 :
nXS(m)=n+(nXm)



설명 : 그냥 이 두가지 정의로만으로는 이해가 불가능 하니 2X3으로 설명하면,

3 = 2+1
   = S(2)
2 = 1+1
   = S(1)
1 = 0+1
   =  S(0)
이므로


2X3 = 2XS(2)                     3=S(2)
        = 2+(2X2)                  공리 2번에 따라서
        = 2+(2XS(1))              2=S(1)
        = 2+(2+(2XS(0))         공리 2번에 따라서
        = 2+(2+(2+(2X0)))       1=S(0)
        = 2+(2+(2+0)              공리 1번에 따라서
        = 6




이에 대한 전문적인 페아노 공리를 알고 싶으시다면
1. 페아노 공리에 대한 글 - 여기를 클릭하세요.
2. 페아노 공리를 이용한 자연수에서의 연산과 그 구조 - 여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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