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교사에서 복직 교사로 지내다 보니 어느새 블로그에 손을 놓은 지 몇 달이 되었다. 사실 살짝 불안감이 드는 이유는 뭘까? 왠지 3월의 다짐 4월의 포기를 반복하는 나의 학창 시절의 반영을 그대로 실현하는 건 아닌지. 분명 내가 손때를 묻힌 수학책의 대부분은 집합과 명제였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반복적인 포기에 반항하기 위해 3월의 학교 폭풍 속에 조용히 키보드 질을 시작해본다.

 
1.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전 글에서 완벽한 진리를 말하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요상한 진실에 직면했다. 만약 진리란 것을 유토피아에 비유해보자면,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는 적어도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닌 무언가 존재해야 한다. 어떤 유토피아 속의 자신을 상상하든, 꿈에 부푼 자신을 떠받들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종(혹은 하인 혹은 도우미)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게 우리는 완벽함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덜 완벽함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언제나 진리의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수학에서 그 희생양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그 문제는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공리로 도망치는 일이다. 공리를 세우고 그 위에 수학을 한층 쌓아가는 일. 그 공리만 인정된다면 완벽한 논리를 향할 기분 좋은 진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은 저번 글 막바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연역적 명제는 전체의 축소만을 가져온다.[각주:1] 즉 말만 다를 뿐 우리가 원래 인정했던 것을 다시 확인하는 식이다. 명제를 확장하겠다고 공리‘만’을 확장한다면 그것은 점집에서 점술가가 던진 한마디를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각주:2]

연역적 진실은 작아질 수 밖에 없다.



 "히키코모리"라 불리는 자들에 대해서 혹시 들어보았는가? 우리나라 말로는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며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방에 갇혀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사실 연역적인 사고로만 명제를 키워간다면 그 끝은 히키코모리랑 유사 할 것이다. 자신만의 방에서 자신만의 만족을 갖고 사는. 수학도 마찬가지 이다. 연역만을 강조하는 진리는 결국에는 어느 부분에서 종점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다. 혹은 그 극한[각주:3]이 수렴한다 하더라도, 그 크기는 우리가 이미 정해놓은 대명제(맨 처음 명제)를 벗어날 수 없다. 결국 히키코모리와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기에 진리를 찾는 사고 방향을 더 키워야하는 것이다.

히키코모리들은 결국 자신의 틀에 갖히게 된 것이다. 진리도 이럴 수 있다.




2. 약한 진리에 대하여.

 이와 비슷한 논쟁을 과학에서 가져와 보고 싶다. 바로 아인슈타인과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이다. 이 둘은 양자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예측 가능한 양자역학을, 보어는 코펜하겐 해석[각주:4]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양자역학 모델을 선보였다. 이 와중 유명해진 아인슈타인의 말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란 명언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해석과 사고 실험[각주:5]들을 통하면서 명언은 지금까지 남았지만 아쉽게도 보어의 모델이 진리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즉, “예측 불가능”유일한 예측 가능한 변수인 것이다.

 이를 수학에서 다시 보자면 이제 우리는 ‘예측 가능한 진리’이란 편견에서 잠시 물러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덜' 진실하지만 '충분히' 진실하다고 말할 것들은 무엇일까?  또한 우리는 그것을 어찌 성립하는지 확신하는 것일까? 그 고민에 집합에서 잠시 다루었던 하나의 개념을 다시 들어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들어온 것은 그것은 바로 바로 퍼지집합이다.

양자의 예측 불가능을 수학에 적용해 보자.



 퍼지집합이란 어느 집합에 속하는 정도를 확률적인 시각으로 표시 한 것으로 0과 1이라는 선택을 (참고로 0은 절대적인 거짓, 1은 절대적 참을 의미한다.)  0<=x<=1이라는 것으로 확장시킨 모델이다. 자세한 설명은 링크로 대신한다. (이전 글 링크)

 '포함된다(=1), 포함되지 않는다.(=0)'란 선택에서 좀 더 확장된 기회를 제공한다면 우리가 편협했던 명제 관계를 좀 더 넓힐 수 있겠다. 즉, 포함관계라는 인과관계에서 다 이루지 못하는 진리를 이루는 하나의 가능성 약한 포함관계인 퍼지집합을 통해서 명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퍼지 논리에 대해서 나는 대학교 이상의 수준을 기록하려고 하진 않을 예정이다. 나도 그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펼칠 능력자는 아닐 뿐더러 오해의 소지를 더 만들 가능성이 있기에 기본적인 내용은 위키 링크로 대신한다.(그 내용은 위의 퍼지집합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판단하는 명제를 보어의 양자역학과 비슷한 확률적인 개념으로 접근하여 이전에 판단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수량화하고 논리화 하여 그 체계를 구성하는 일이다. 즉, 생각하면 다 이루어지는 100% 완벽한 유토피아는 어려우니 내가 조금 귀찮더라도 걷거나 말하거나 하는 99%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다.

진정한 유토피아에는 불완전함이 섞일 수 밖에 없다.



3. 퍼지 논리가 가리키는 진리는?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논할 중요한 한 가지가 아직 남았다.  '수량화된 진리'가 갖는 의미이다.  이 부분에서 오해할 여지를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오해의 가장 큰 정점은 바로 ‘진리의 줄 세우기’가 가능한지의 여부이다.

 만약 '0.99 진리'와 '0.01 진리' 사이에서 우리가 '0.99 진리'이 더 무거운 진리일지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단정한다면 이 이야기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예수도 석가도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이론들을 퍼지 논리 점수를 통해 '수량화'한다면 아주 후하게 주어도 '0.01 진리 주의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진실한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 이런 나의 말에 동의 할 것인가? 사실 이 사실은 나도 동의하기가 어렵다.

 더 자세한 예를 들자면 어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퍼지 논리 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점수는 몇 점일까? 하지만 모두가 그 말에 감동하지 않는가. 이런 모순의 원인은 '수량화'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수량화’가 그 명제를 진실 되게 만들 수 있을까? (사실 여의도 기독교는 그럴 수도 있다. 0.99 진실의 법칙으로 일본은 분명 쓰나미를 원수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 했으니.[각주:6]) 하지만 일반적인 기본 교육을 통한 사람이라면 예수의 '0.01' 진실에 손을 들어줄 것이다.

 다시 말해 '수량화'는 '의미'를 대표하진 않는다.

이런 수량화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은 완전한 넌센스다.




4. 수량화에 빠진 진리 구하기

 그렇다고 지금까지 수고했던 수량화된 진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결론짓는다면 그 또한 극단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렇다면 '수량화된 진실'이란 것에 다시 의미부여를 해봐야 한다. 이런 의미부여는 우리가 '수량화'를 선택했던 수단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 수단은 바로 '확률적'과 구별[각주:7]된다. 다시 말해서 0.51은 0.49이라 할 때, 우리가 좀 더 쉽게 이야기 하는 51%가 49%보다 2% 더 진실이 될 확률이 있다.”란 것이 아니라 2% 정도 더 보편적인 선택을 받는”진실이란 말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명제는 참/거짓에서 한 단계 더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51%와 49% 양립할 수 없는 명제라 할지라도 진리로 동시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0.01 진실'이란 것은 우리가 1%의 확률 빈도로 선택한다는 것.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독배’와 예수의 ‘원수 사랑하기’는 참으로 소수만이 선택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들을 성인이라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리 확률적으로 이를 정의해 보려 해도 ‘수량화’가 진실이라는 벽을 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다. 이런 면에서는 왠지 데카르트적인 절대적인 진실은 사라지고 푸코가 말하는 특정 법칙이나 관계에 의한 진실[각주:8]이 수학의 표면으로 자리 잡는 듯하다.

완벽한 형태가 아닌 관계가 말해주는 진리



5. 진실이란. 명제 파트를 마치며

 집합을 거쳐 명제에 대한 글을 써보면 진실이라는 것의 이중성이 보인다. 분명 어떤 흐름을 보여야하지만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이라는 것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진실이란 것은 어떤 절대적인 흐름을 바라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포함과 불 포함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부터 시작해서 집합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명제를 이야기 했다. 그들 사이에는 정확한 연결고리를 통해서 내가 알고 싶은 결과를 배출해낸다. 이런 고리를 절대로 끊을 수 없게 단단히 묶어 진실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연역을 통해서 보았다. 하지만 연역의 결정적인 문제는 고리는 온전하다 그 고리의 시작이 어딘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떤 '진실'이라는 것의 심각한 오류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발 물러나, 절대성을 버리기로 한다. 즉 상대성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인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여 '진실'이란 것을 '아무것도 아닌'것과 동일시하는 것 또한 피하도록 하자. 자신이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또 어떤 다른 것이든 지적 생물체(인간)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버리면 '진실'이란 호칭을 부여하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생겨버린다. 수치화된 점은 그저 그 명제의 빈도 혹은 확률로 제한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하려니 '진실'을 정의하는 일은 점차 미궁으로 빠질 수 밖에.

 그렇다면 진실이 피해야 할 그 곳은 어디일까? 자만하고 고집스럽지도 않으면서 적절히 의미화가 되는 그곳은 어디일까?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는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젠 '수치적 진실'이나 논리적 진실' 따위는 수학에서 찾을 수 는 없을 듯하다.[footnote][/footnote]

 하지만 수학 외적인 곳에서는 어느 정도 해답이 있지 않을 까 한다. 우리가 부르는 '공감'같은 단어에서 말이다. 하지만 '공감'만으로는 우리의 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실수를 포함해서는 안 되니, 나는 '조심스런 공감'정도로 마무리 짓고 싶다.
 

'조심스러운 공감'을 갖던 지난 날을 위해서~



  1. 그림과 같이 집합론 적으로 생각했을 때 명제의 진행에 따른 진리의 축소는 피할 수 없다. [본문으로]
  2. 그렇다고 해서 공리를 기반으로 한 수학이 의미 없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시 한다. [본문으로]
  3. 그 극한이 수렴하지 않고 진동 발산한다 하여도 결과는 변화지 않는다. [본문으로]
  4. 훌륭한 네이버 캐스트를 링크한다. 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1961 [본문으로]
  5. 어떤 실험을 제시하더라도 측정이나 도구의 불완전성에 의해서 보어의 승리가 확정될 수 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6. 여의도 기독교에 대해서 욕할 생각은 없으니 이번 발언은 분명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 [본문으로]
  7. 의미상의 구별이다. 일단 퍼지 집합을 구하는 과정에서 확률은 빠질 수가 없다. [본문으로]
  8. 그가 말하는 상대적인 진리를 어쩜 보어의 양자이론 혹은 퍼지 논리의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볼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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