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 다음~>


프리뷰에서 언급했다시피,

진리라는 개념 파악을 위해 명제를 도입하려 했으나

모든 문제가 “그렇다”와 “아니다”의 조합만이 아니기 때문에

명제를 도입하는 일 자체가 큰 어려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면

“똥 뭍은 쥐가 겨 뭍은 인간에게 너 참 더럽고 공정한 사회가 아니구나!”라고 말한 다면

과연 이 명제는 맞는 것일까요?


그럼 이런 모호함이 왜 나오는 것일까요?

그리고 모호함의 원천은 어디일까요?


---------------- 모호함을 피하기 ----------------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그는 살인이란 범죄를 저지른 것이지만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모호함은 명제의 몸통, 조건에서 나옵니다.


가벼운 예를 들어보면,

“전과가 있는 사람은 나쁜 놈이다.”이란 명제를 보면,

보통 우리는 14범정도 된다면 대부분 정말 나쁜 놈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전과가 있는 사람은 나쁘다는 것은 맞는 말일까요?


일제시대의 안중근을 보면

그는 살인이라는 일을 저질렀고 그것은 분명 전과자 입니다.

하지만 그는 현재 뮤지컬 “영웅”의 주인공일 만큼 우리 사회에서는 강직한 사람으로 통힙니다.

이럴 경우에 사람을 죽인 사람이 나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범죄를 다르게 보이는 것은 바로 “나쁜 놈이다.”라는 조건의 모호성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서 모든 사람이 동의하기 어렵다.


조건에 감정이나 선입견이 들어가 버리면 보편적 진리 찾기에서는 이미 탈락됩니다.


진리라는 것은 슈퍼스타K처럼

“제 점수는요”라고

 각기 다른 결론이 나오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여튼 조건이란 것이 모호해져 버리면 명제가 되기 어렵습니다.


즉, 조건의 명확성이 완성되어야 명제의 모호성이 제거된다.


이런 모호함을 조금이나마 제거한 명제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수학”을 도입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먼저 조건이 명확한이라는 정의를 이미 포함한 “집합”을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 집합과 명제의 관계도 ----------------


먼저 집합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면,


집합이란!

[어떤 모임에 포함되는지 포함되지 않는지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모임]


여기서 명제와 비슷하게나마 공통된 점을 찾을 수 있나요?

(밑줄을 이미 쳐놓았지만...)  <명확하게 구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줄긋고 확실하게!!

<너는 여기 모임의> “소속임!” 혹은 “소속이 아님!” 이라

확실히 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또한 모든 집합은 조건제시법으로 표현가능한데,

집합이란 것을 다시 이야기해 보자면

“조건이 제시되고 그것이 만족되는 것들의 모임.”인 해석을

“조건에 대해서 참이 되는 것들의 모임.”이란 명제적 문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집합과 명제는 공생의 관계를 유지한다.



명제의 참과 거짓을 명확히 구분 짓는 명제와 조건으로 원소를 갖아야 하는 집합이

서로의 필요를 위해서 동일하게 만납니다.


여기서부터 

집합과 명제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둘의 공생이 시작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해보면

이제 어떤 조건 p가 있다면, 이 조건에 참이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모아 놓은 집합을 P라 했을 때,


일 때,

집합 P를 조건 p의 진리집합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보면

포유류의 진리집합


만약 [ 조건 p : 포유류 이다! ]일 때,

친구집 강아지는 포유류이고,

시골집 닭은 조류입니다.


이를 집합으로 그리면 위의 벤다이어그램과 같죠.

이렇게 하면 진리집합 P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 어려운 길은 돌아가면 된다. ----------------


기본적으로 명제가 양산되는 논리학은 어렵다.

말장난 같이 보이기도 하고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르겠다합니다.


멋진 그림이 항상 직활강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말의 순서 조차도 어려운 것이 바로 명제이지만 이 길은 돌아갈 수 있는

사실 지름길은 아니지만 완만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집합입니다.


스키에서 직활강을 타는 것이 더 빠르지만 위험하기에 우리가 돌아가듯이

진리가 앞이라고 명제로 직활강하기 보다는

살짝 수학의 집합에 안착해서 가보는건 어떨까 합니다.


다음은 실제적으로 명제를 집합을 통해서 판단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전 / 다음~>

  / 다음 ~>


명제, 진리의 근원점에 서다.


진리 앞에서서


인간의 삶의 판단에 앞서 자신의 가지는 진리를 먼저 봅니다.

앞서 가진 진리의 경중 혹의 방향에 따라 사람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철학적 진리에서 잠시 벗어나 사전을 펼쳐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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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 네이버 국어사전


1 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

2 명제가 사실에 정확하게 들어맞음.

 또는 논리의 법칙에 모순되지 아니하는 바른 판단.

 형식적 의미로 사유의 법칙에 맞는다는 의미에서의 사고의 정당함을 의미한다.

3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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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진리는 보편적 사실을 향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편적”이란 것에 주목하면

이 보편성이란 것이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보편적이 사실이라 칭할까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위의 사전 내용처럼 언제 어니서나 불변하는 그것은 어떤 것을 이야기 할까요?.



보편성을 잡아라!


이 보편성이 라는 것, 쉽게 보면 강을 갈아엎고 바닥파는 것처럼

무엇이 보편성에 부합한지 정확히 판단 가능하기도 하지만,

햄릿의 고민처럼 불완전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그 보편성이란 것이 어렵기만 합니다.


갈대 같은 마음을 제대로 잡아주는 것을 그리스에서는 철학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의 근원을 명제에서 그 근원을 두었죠.

바로 이 보편성을 적용하기에 가장 좋은 실험의 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보편성을 잡을 가장 좋은 무기는 어떤 것일까요?

가장 가까운 후보는

바로 참과 거짓이라는 기본적인 문제를 다룬 명제입니다.


보편성이라는 큰 수확을 위해

수많은 답을 가진 생활의 혹은 사회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1과 0의 문제,

즉 참과 거짓을 가지는 단순한 문제에서 접근해보겠습니다.


참과 거짓이란 불가분의 관계는

모든 문제에 존재할 것 같지만 사실상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쉽게 만나기는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나와 너가 다르지만

각자 자신을 “나”라고 부르는 것 처럼

개념은 확실하지만 각자의 위치에서의 참과 거짓은 참 모호하죠.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도구가 더 필요합니다.

바로 수학입니다.



수학, 참과 거짓의 원천이 되다.


참과 거짓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

간단히 예를 들어 보면,

"K대학교 02학번 OU양은 아름답다." 

라는 하나의 문제를 보겠습니다.

우리가 

“K대학교 02학번 OU양”이라는 대상이 “아름답다”라는 것과 연관관계를 지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보았을 때에는

완벽하고 고귀한 사실이지만 눈이 디옵터 -6이하인 사람에게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죠.

이는 어떠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에서 “나와 너”의 관계처럼

참과 거짓이 모호하게 꼬여있고 그 답은 사실 없습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잠재적 범죄자의 99%는 휴대폰을 사용할 때 엄지손가락으로 문자를 쓴다”

이것 역시 대부분 참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범죄자가 한번쯤 핸드폰을 시도해본다면

아마 99% 엄지로 문자를 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면 대부분 99% 엄지로 문자를 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99%의 당위성에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이처럼 참이나 거짓이 거의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보편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완벽한 보편성이 될 수 없습니다.


정리하면, 위의 두 가지 예처럼

일반적이 생활에서는 그 목적과 상태에 따라서 그 답이 변하기 때문에

아직 참/거짓이 가져야 하는 보편성이 모호하기도 하고 그 보편성이 갖는 당위성의 수준이 낮아지기도 합니다.


이런 완벽함을 갖추기 위해 보편성과 가장 비슷한 수학의 우리는 “명제”를 이야기하며

보편성과 진리에 근접해보고자 합니다. 



수학은 명제 위에서 논리적이 되고 명제는 수학 위에서 당위성을 얻는다.


이는 우리가 수학교과의 한 파트에서

당당히 “명제”란 이름으로 제목을 거는 이유이며

우리가 명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수학을 이용하는 이유입니다.



“명제”에 들어서기

그럼 참과 거짓의 보편성을 찾는 일이 과연 명제와 어떤 관계일까요?

간단히 명제를 정의 해보면


“명제” - 참과 거짓을 명확하게 판단되는 것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명제는 참과 거짓을 위한 수많은 질문들 중에서

우리가 이것은 명확히 '참!' 혹은 명확히 '거짓!' 이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 꽃은 아름답다”라는 것은

질문은 될 수 있지만 명제가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지독한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꽃을 혐오할 수 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명제가 정말 찾기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 집 강아지는 포유류이다.”는 참이다.

(내가 강아지라 부르는 그것이 다른 사람이 부르는 강아지와 동일하다는 가정안에서요.)

이것은 포유류의 분류에 강아지가 확실히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위는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너무 돌아온 것 같아 정리해보면

이제 우리는 진리를 찾기 위해 보편성을 찾아야 하고

그 중 가장 근원적인 참과 거짓을 판명하기 위해 “명제”가 필요합니다.


또한 이제부터

명제는 이제 가장 큰 친구 수학을 통해서 그 모습이 구체화 될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보편성은 이제 딱딱한 숫자의 놀음에 들어왔지만

신이 그랬듯 고난의 길 뒤에는 위대한 뜻을 내뿜을 것이고

그 목적 뒤에는 보편성을 갖는 진리라는 파트가 그 다음 숙제로 남을 것입니다.



  / 다음 ~>



결론 부터 밴다이어그램이란 벤(John Venn)이란 사람이 만든
집합에 대한 2차원 기하학 모델로
추상적이였던 집합을 모든 이의 수학으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현재 우리가 낮은 학년에서도
집합을 이해하고 계산해낼 줄 안다는 것은
이 밴다이어그램이 머리속에 그려지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림 같이 집합 A라는 것을
하나의 원(또는 도형)으로 그린다음에 A의 원소는 그 도형 안에
원소가 아닌 것은 도형 밖에 그립니다.

다시 말해 그림에서는 a는 A의 원소이고
b는 A의 원소가 아닙니다.
지도보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이런게 뭐 당연하다고 생각 할 수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영역을 그리고 그 안에 그에 관련된 것을 넣는 사고가 쉽사리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죠.

특히 그 당시 집합론은 너무나 추상적이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던
칸토어의 집합론에 대해서 직관적인 이해를 도왔습니다.

정확히 1880년 [명제와 추론의 도식적, 역학적 표현에 관하여]라는 논문에 거재하였는데
사실 벤이전에도 이런 그림을 이용한 것은 있었으나(ex. 지도, 분류)
논리적이고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한 것은 벤이 최초입니다.

집합론의 원소와 집합과의 관계만을 이야기 한다고 생각하면
코끼리의 다리만 만지작 거리는 장님과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집합론의 논쟁거리에 대해서 설명했었는데(무한의 세계, 연속체공리, 러셀의 역리 등)
하지만 집합론의 중요한 한 면목은 바로 논리체계의 적립입니다.
(이 때문에 모든 고등수학과정의 처음은 집합론이죠.)

그런데 바로 이 논리적인 공간에 벤다이어그램이라는 새로운 도구는
너무 엄밀하고 객관적이였던 수학을 직관적이고 이해가능한 도식으로 바꾸어 준것입니다.


---------------기본적이 벤다이어그램의 모양----------------



1. 집합이 하나인 경우 : 밴다이어그램에서의 원소의 포함여부에 관한 경우로 많이 쓰입니다.


뭐 이 경우는 아까 위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지만 원소의 포함관계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전체집합까지 따지자면 여집합등도 표현되고
영역의 수는 1개이고 전체집합까지 그린다면 2개입니다.



2. 집합이 2개일 경우 : 이 경우는 우리가 가장 많이 봐온 경우입니다.


가장 쉽게 생각하는 벤다이어 모양이고
여기서 합집합 교집합 차집합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집합까지 그렸을 경우에 우리가 좌절을 많이 했던 드모르간 법칙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밴다이어그램의 큰 이점 중 하나가 증명의 간편함입니다.)

또한 전체 영역의 수가 3개인데
전체집합까지 포함하면 하나의 영역이 더 생겨 4개가 됩니다.


3. 집합이 3개일 경우 : 수능에서 가장 많이 보는 밴다이어 그램이죠.


여기서 부터는 점점 복잡해보이기도 하는데 어려운 것은 없고
찬찬히 둘러보면은 그 영역의 의미가 보입니다.
그리고 영역의 수를 살펴보면 7개이고
전체집합까지 그리면 하나추가해서 8개가 되는데

1~3번의 과정을 보았을 때 대충 눈치를 채셨겠지만
밴다이어그램을 영역의 수로 보자면
전체집합까지 따졌을 때 집합의 개수 만큼 2를 제곱한 수가 됩니다.

1개  /   2            = 2
2개  /   2 X 2      = 4
3개  /   2 X 2 X 2 = 8

여기에 전체집합이 없다면 하나씩 빼주면 됩니다.

---------------집합 4개의 벤다이어그램의 모양----------------

만약에 집합이 4개라면?
전체집합 포함해서 2 X 2 X 2 X 2 =16의 영역이 나오는 것을 확인해보겠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4개 이상 집합의 밴다이어 그램을 본적이 없을 것 입니다.
나도 공부나 찾아봐서 알게 되었지 자연스럽게 접한적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실 모든개수에서 벤다이어그램을 그릴 수 있다고 알려져있는데
잘 그리지 않는 이유는 아래 그림을 보면 됩니다.

밴다이어 그램이 오히려 직관으로 판단하기에는 약간 난해해집니다.

자 아래의 그림이 4개일 때의 밴다이어그램입니다.


우리가 알던 A,B,C의 밴다이어 그램에 길게 늘어진 D라는 밴다이어 그램이 나왔고
한명 영역을 세어보면 전체 영역의 개수는 15개이며 전체집합 포함이면 16개가 됩니다.
(사실 하나의 집합이 늘때마다 영역이 2개의 영역이 쪼개진다 생각하면 더 이해가 됩니다.)



이렇게 보다보면 5개의 집합은
사실 모르는게 약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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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다이어그램은 역시 "추상의 구체화" 혹은 "논리의 직관화"에 초점을 둡니다.
이는 복잡한 상황속에서 이런 도표를 이용해서 정리하고
논리 또한 그림으로 이해해 가면 오류를 줄여갈 수 가 있죠.

어찌보면 집합론의 논리주의적 사고와 집합론에 반대했던 직관주의적 사고의
중간정도의 위치를 차치하는 조금 흥미로운 부분으로 볼 수 있고
어떻게 보면 화해의 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벤이란 사람은 수학자가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학으로 보자는 문외한 사람의 작은 아이디어가
논리의 가장 깊은 집합론에 스며들었다는 것은 직관의 중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는 대목입니다.

<~ 이전



우리가 집합을 종종 펼쳐보다보면 조금 답답한 면이 있습니다.
집합의 정의 자체 부터.. 비유하자면 약간 파시즘적이죠.
소속을 명확하고 정확하게 해야지만 그 소속에 들어갈 수 있죠.

다시 말하자면 "너무 엄격함"입니다..


----------------------불완전한 소속-----------------------------

다시 집합이야기로 들어가면
집합에서는 그 집합의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소속원 또는 완벽한 배제만을 원합니다.
그러니 집합은 까다롭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세상의 많은 일을 포용하기에는 반대로 나약합니다.


예를 들어 보자
집합을 "자신이 키가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키"라고 하면


이런건 집합에서는 다룰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버려버리고 마는 집합입니다.
분명한것은 자신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 존재하고
그런 사람들의 키 또한 분명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예로
"예쁜 꽃들의 모임"이라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수학자는 이런 집합에 대답조차 않하겠지만
분명히 이런 꽃들은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다만 단지 100%동의 하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이나 미학의 징표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처나 자본의 징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두 모임은 정확하게는 수학에서 말하는 집합에서 제외됩니다.
수학적 파시즘적에 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모임들을 수학적 인식에서 지워야 한다면
너무 삶이 심심하고 수학은 또 그 삶과 너무 떨어져버릴것 같습니다.

이런 실정에서 엄격함의 수학이
실생활에 아니 혹은 인간적임에 손을 내민 이론이 필요하게 됩니다.


---------------------- 완벽하지 않은 집합 ------------------------


말로 하는 것보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A = {"자신이 키가 크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키"}라는 모임을 만들고
(당연히 수학적인 집합이 아닙니다.)


키가 180cm인 모든 위너를 다 납치해와서 물어봤더니
전체의 90%가 자신의 키가 크다 했다합니다.(쳇..)
또한
170cm인 분들을 모셔와서 자신의 키가 크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봤더니
그랬더니 전체의 20%가 자신의 키가 큰편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때 이렇게 생각보는 겁니다.
180은 90%가 A란 집합에 들어간다~!
170의 20%가 A란 집합에 들어간다~!
이렇게 집합의 소속을 통계적(혹은 수학적) 확률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근데 %로 쓰는 것은 단위상 문제가 되므로
1을 100%로 계산해서
90%는 0.9로, 20%를 0.2로 환산합니다.

이렇게 정의해 놓고 이제 포함 관계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180이란 원소는 A에 0.9만큼의 원소이고

170이란 원소는 A에 0.2만큼의 원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포함관계를 갖는 집합을 퍼지집합이라고 합니다.


사실 퍼지이론을 수학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현재 퍼지이론도 수학의 영역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왠지 이것도 퍼지 집합 같네요.)



-------------------------퍼지집합 의미---------------------------


수학에서는 엄격함으로 모든 것을 채워가려는 시도를 했고
그에 따라 어쩜 그 엄격함은 시대의 요구였을 것입니다.
완벽한 판단력으로 어떤 기본적이고 유일한 하나의 정의 혹은 신앙을 향했으며
그들은 수학을 통해서 그들의 삶과 올바른 길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 속에서 다양함에 대한 이론들이 꿈틀거리고 상대주의의 역활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러다 결국 지금은 불완전한 것들로 둘러쌓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지금은 불완전이란 것에 대한 수학이 요구되었고
그 수학중 하나가 바로 이 퍼지 집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완전합니다.
이 인간의 기본인 불완전함을 이제 수학이 대처하려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모더니즘에서는 인간이 0,1로 제어되는 기계에 맞추어지는 시대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지금은 도리어 기계속에 인간의 요소를 삽입하는 것이지요.
교통, 시스템제어, 재고관리. 많은 전자제품등에 이제는 인간의 마음이 개입되어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불완전한 인간을 대표하는 퍼지이론은
완벽한 논리가 필요한 많은 분야에 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히려 지금 같이 불확실한 시대에 엄격함은 인식의 도피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무한 이야기를 잠시 벗어나서 집합론의 문제들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칸토르(칸토어)가 집합론이라는 거대한 작업을 마칠때쯤(어짜피 그 시대에는 큰 인정은 없었지만)
러셀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어떤 연구이든 가장 절망스러운 것이 이룩할때 쯔음에 나오는 반론과 역설들입니다.

칸토어 역시 편지 한장에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내용은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존재하는가?



사람들은 집합이란 단어를 '모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집합들을 모아 놓은 집합"도 자연스레 상상하게 됩니다.
자연스러운 이 단어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그 문제는

다음 이야기에서 나타납니다.


-------------------------이발사의 역리(러셀의 역리)------------------------


세빌리아(지명이름)의 이발사는 자신의 상점 입구에 이렇게 크게 써 놓았습니다.



 "나는 세빌리아 모든 사람들 중에서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면도해한다."


멋진 한마디입니다.

즉, 나는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사람을 면도하겠다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빌리아의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이발사 스스로의  면도는 누가 해야 할까요?


먼저 자기 자신이 면도를 한다면 스스로 면도하는 사람이므로

팻말에 적혀있는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사람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발사는 자신을 면도할 수 없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면도 한다면 이발사 자신은
팻말에 적혀있는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면도를 해야 합니다.


----------------------------------------------------------------------------------------


말의 의도는
세릴리아의 스스로 면도하지 않는 사람을 면도 하는 사람
이란 자신의 처지가 자신에게 속하는가 속하지 않는가 입니다.
자신자체가 들어가야 할 곳이 어디인가라는 것입니다.

러셀은 이런 역리를 구체화한 집합과 질문을 던진다



"과연 자기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의 집합>이 가능한가?"

그럼 이 집합은 자신에게 속하는 것일까? 아니게 될까?


이 집합에는 자기 자신이 포함될수도 포함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전형적인 모순입니다.



"더 멀리나가면 <모든 집합의 집합>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발사의 역리로 시작한 이 질문은 집합론계의 아주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참고로 이와 같은 의미의 유명한 역설인 에우블리데스의 명제"내가 지금 말하는 명제는 거짓이다"
그리고 크레타섬의 거짓말쟁이의 역설"이섬의 사람들은 다 거짓말 쟁이다"와 일치합니다.

당시 집합론을 이야기 하는 수학자의 기본적인 믿음에 대못을 박은 이 논쟁은
결국에는 <모든 집합의 집합>이 존재하지 않음으로 결론을 냅니다.
그리고 이 논쟁을 통해서 소위 논리주의, 직관주의, 형식주의의 이 세가지의 사조가 나타나면서

급 혼란기를 맞이합니다.(자세한 것은 심화 메뉴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결  언 ------------------------------


우리가 어떤 것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일은
자신도 모르는 기초 사고에 지배당하게 됩니다.

집합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집합론이지만
웃으며 지나가기에는 많은 역설과 모순이 난무하게 됩니다.

<러셀의 역리>라는 홍역을 치룬 집합론은
제대로된 공리계를 세워 집합론을 방어해 나가야 할 필요성이 생겼고
대학수준의 이야기이지만
현제는 ZFC공리계라고 부르는
체르멜로-프란켈 집합론이라 하여 몇 가지 공리를 기반으로 한 집합론을 세웠습니다.

- 추가 적인 집합론의 역설 -
리차디언의 역설
부랄리-포르티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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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론이란 것으로 무한에 하나의 깃발을 세웠고
또한 집합론을 통해 많은 수학들이 피어나게 되었습니다.

많은 역리와 반발 속에서 꽃피우게된 집합론은
전공수학의 맨 처음을 장식하게되는 영광까지도 얻었죠.

불완전하고 감각적인 수학의 뿌리이지만(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


집합론은 그 불완전속의 구조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부터 우리는 완벽함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불안함속의 완고한 한마디로 이 장을 마치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든 것을 포함 하지 못한다."
- paul R. Halmos -



이전에 무한 집합에서 가장 큰 무한집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무한이 끝이 없음을 결론짓게 했던 일등공신

멱집합!



이 멱집합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A란 집합을 가지고 P(A)란 더 큰집합을 만들었습니다.
A란 집합이 무한이라고 하더라도 성립합을 알았습니다.
(칸토어 정리 링크)

우리가 계속 무한에서 놀았으니 무한에서의 몇가지 의문을 계속 가져보겠습니다.

1. 무한중에 가장 작은 무한은?
2. 무한의 순서라는 것이 있을까?


자 그럼 1번부터 한번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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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한중에 가장 작은 무한은?

가장 작은 무한


무한 중에서 어쩜 가장 상상하기 편한 수가 될 것입니다.


다들 예상하시는 대로, 자연수입니다.



  <무한 중 가장 작은 개수를 갖는 무한은 자연수이다>



수식 적용이 어려우므로 한글파일을 본떠 붙이겠습니다.



결론이 조금 쉽게 났습니다.
어떤 무한이든 무한인 것에서 하나씩 뽑아 원소를 나열할 수 있고

그건 자연스럽게 자연수와 대응되게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론을 다시쓰면

가장 작은 무한은 자연수 개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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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럼 자연수 개수 다음 무한은? 그리고 무한의 순서는?

결국 자연수가 가장 작은 무한이었습니다.
우리는 집합 4장에서 자연수보다 실수가 더 많음을 알 수가 있었고
5장에서는 멱집합을 이용하면 더 많은 개수의 집합을 만들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
자연수의 멱집합은 실수와 같은 개수입니다.
(증명은 나중에 링크 걸어드리고^^ 좀 복잡해서)

여튼 그러다 보니 칸토어 정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멱집합은 혹시 무한집합을 줄세우게 할 중요한 요소는 아닐까요?

1번 무한이 자연수라면
2번 무한이 실수 즉 자연수의 멱집합
그리고 3번 무한이 실수의 멱집합(즉 자연수의 멱집합의 멱집합)
이렇게.. 이렇게 무한이 일렬로  세울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칸토어가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반 연속체 가설-

<무한집합 X에 대해서 멱집합 P(X)사이에는 다른 무한 개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X란 무한 다음 무한은 무조건 P(X)가 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입니다.

아쉽게도 칸토어의 머리에서도
그리고 어떤 수학자의 머리에서도 이 문제가 풀리지 않게됩니다.

그리서 이 명제는 "가설"로 남게 되는데


수학에서 유명한 "일반 연속체 가설" 이라고 부릅니다.
힐베르트는 이것을 20C 수학문제의 1번에 당당히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괴델은 이 문제가 집합론을 이루는 요소(공리)로는 반증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코헨이란 사람이 집합론을 이루는 요소로는 증명되지 않는다고 증명했다..

무슨 소리인가 다시 이야기 해보면
집합론의 논리를 가지고
위의 연속체가설을 증명할 수도 없고! 반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글링크 클릭)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

이 집합론이라는 모델에서는

'연속체 가설이 성립한다' 라고  해도 하나의 체계가 완성될 수 있으며

또 '없다고 가정'해도 새롭게 다른 완성된 체계가 만들어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둘 모두 정답이라는 애매모호한 정리로 마무리 됩니다.




결론은!
가장 작은 무한은 자연수 개수이며
무한의 순서는 멱집합으로 할 수 도 있고! 그런 순서가 없게 할 수도 있다!



그럼 이런 아리송한 결론은 괴델아저씨의 불완전성의 원리에서 말하겠고
이제 무한에서 조금 벗어나서
집합론에서의 역설들 몇 개만 더 알아보겠습니다.



 
유한은 편하고 어렵지않고
누구나 노력하면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한은 그렇지 않아
선택된자 특히 생각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영역이었습니다.
사실 그 선을 넘는 것을 두려워하였죠.

우리가 알고 있는 무한에 대한 어려움은 어렵지 않게 생각해낼 수 있는데
그중에 우리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제논의 역설 중 아킬레스와 거북이 문제입니다.(클릭)
제논의 역설은 단지 시간의 반씩 나누어지는 무한합에서 걸리고 맙니다.
제논의 시절에서는 무한번의 합이라는 것은 생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즉 무한을 다뤄본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사실은 수열을 배우고 나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제 조금 심도 있는 질문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이전에 짝수, 자연수, 유리수, 실수라는 무한개의 개수를 비교하면서 아리송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짝수 - 자연수 - 유리수는 실제로 같은 개수(더 유식한 말로는 기수)였지만
 실수는 자연수 개수 보다 많았습니다.

이제 이런의문을 갖게 됩니다.

혹시 실수보다 더 많은 무한은 있을 까?
또 무한이라는 개수의 끝이 있을 까?

그러면 다음 과정을 거쳐야 한다.
1. 실수보다 더 큰 집합은 어떤 것이 있을 까?
2. 그럼 그 무한 개수를 갖는 집합은 실수 개수보다 많을까?

1. 실수보다 더 큰 집합은 어떤 것이 있을 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개념 하나만 더 도입해야합니다.
그것은 바로 멱집합(power set(자세한 이야기는 클릭)입니다.
조금 생소할지 모르나 집합의 부분집합개념만 알면 금방 이해되는 집합입니다.

예를 들면 A = {1,2,3}이란 집합의

A의 모든 부분집합을 구해보면
그럼 Φ(공집합), {1}, {2}, {3}, {1,2}, {1,3}, {2,3}, {1,2,3} 이렇게 8개입니다.

이때,

부분집합을 다 모아 다시 집합으로 만들면 그것이 바로 A의 멱집합이라 하고 P(A)라 표현합니다.

재미있게도 A가 원소의 개수가 n개이면(유한개)
P(A)의 원소의 개수는 2의 n제곱이 됩니다.(그 이유는 여기를 클릭)
다시 말해 2를 n번 곱한것입니다.

(그래서 원소가 3개인 집합의 멱집합 원소개수-> 2*2*2=8)

이 멱집합을 이용하면 무한에서 개수가 더 많은지는 몰라도
원래 집합보다 큰 집합을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수를 R이라고 할때 P(R)는 실수보다 큰 집합이 됩니다.

또한 우리는 어떤 집합이 나와도 멱잡합을 통해서 더 큰 집합을 구 할 수 있다.

2. 그럼 P(R)은 실수 R보다 정말 개수가 많을 까?

이 과정은 상당히 복잡할 수 있음을 미리 공지하지만
천천히 따라오면 재미있는 증명의 과정입니다.
우선 2번을 좀 더 거창하게 쓰면 다음과 같은 명제를 만들수 있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칸토어의 정리 이며
사실 결론만 알고 지나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으나
확실한 증명을 원하시면 다른 글을(클릭) 참고하시면 됩니다.

<집합 A에 대해서 A의 개수보다 P(A)의 개수가 더 많다>

따라서 어떤 집합을 잡던간에 그것보다 더 개수가 많은 집합을 만들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실수 R이 가장 개수가 많았다면
P(R)이 개수가 더 많고
P(P(R))이 더 많고
P(P(P(R)))이 더 많고.. 무한이 이렇게 확장 할 수 있단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역시..
무한의 끝을 보려 했던 우리의 노력은 헛된 노력이 됩니다만
우리는 더 큰 무한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다소 힘이 빠지지만 무서운 결론은


  무한의 개수의 끝은 없다.


여기서 다른 질문 하나 던지고 마칩니다.


혹시 무한대도 어떤 순서가 있지 않을까?(연속체 가설)


우리가
자연수개수 다음에 실수
그다음에 멱집합 실수...
이런식으로 무한이란 것도 자연수 처럼1번 무한, 2번 무한, 3번 무한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을 까?하는 질문을 시작으로
칸토어이후 많은 도전이 있었고 상금이 걸려있는 힐베르트 질문의 1번을 당당히 차지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다음에 논의하도록 하고무한의 끝이 없음을 다시한번 상기하면 여기까지 줄입니다.


<~이전 / 다음~>


  "유리수와 자연수의 개수가 같다"라는
다소 믿기 어렵고 선뜻 이해되지 않는 사실에서
고대 다른 수학자들이 무한을 싫어했는지 잠시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결과를 받고나면 왠지

'무한은 모두 같은 개수다'라는 다소 결정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다음 두 무한의 비교가 의미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실수와 자연수의 비교입니다.


그럼 실수를 설명하자면
기본적으로 우리가 쓰는 모든 수라고 할 수 있고 기본적으로
수직선상의 모든 수라고 합니다.(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작성하겠습니다.(데데킨트의 절단 등))

유리수와 자연수의 비교에서 처럼 약간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선 먼저
0<a<1 구간안에서만 생각하겠습니다.

이때 구간안의 모든 수는
a = 0.xxxxxxxxx‥‥‥ 이라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예 0.5 = 0.50000000‥‥, 1/3=0.33333333333333‥‥)



우리가 처음에 약간 마음이 기울던 결과처럼


"(0,1)구간의 실수와 자연수의 개수가 같다"라고 가정 하겠습니다.

(아마도 수학에 관심이 있다면 다음 위의 가정의 이유를 알것이라 믿습니다.)

가정이니 만약 같다면 무리없이 짝(일대일 대응)이 지어질 것읍니다.

우선은 위 처럼 가정해 보면 이렇게 소수 하나씩 대응이 됩니다.

1 <-> 0.a11a12a13a14‥‥‥

2 <-> 0.a21a22a23a24‥‥‥

3 <-> 0.a31a32a33a34‥‥‥

4 <-> 0.a41a42a43a44‥‥‥

   .   .

k <-> 0.a11a12a13a14‥‥‥

   .

   .

이렇게 대응이 되어야 하고 가정에 의해서 일대일 이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양쪽의 모든원소가 서로 연결되어 혼자 있는 원소가 없어야합니다.



이제 원소 하나를 꺼낼 예정입니다.

예상대로 지금 위의 결론에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 원소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이렇게 정의된 X에 대응되는 자연수를 찾을 예정입니다.

그런데 어렵이 않게 문제를 접할 수 있습니다.

X에 대응될 자연수가 없습니다,.


모든 k에서 akk xk

되기 때입니다.

결국에는 X에 대응 하는 자연수를 찾지 못하니

결국은 처음에 가정했던 것과 다른 결론이 생겨버립니다.

(이런 증법은 직접적인 증명이 어려운 증명에서 많이 쓰이는 방법입니다.)


하여튼 결론은 확실합니다.


자연수는 (0,1)구간의 실수 개수와 같다는 가정은 거짓입니다.

(0,1)을 포함 하는 구간도 자연수가 모두 커버 못하니

실수를 커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사실 (0.1)구간의 실수와 실수 전체의 개수는 같고 근거는 함수 y= tan(π(x+1/2))가 일대일 함수라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실수가 자연수를 포함하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납니다.



실수의 개수가 자연수의 개수 보다 많다!




이 결과는 지금까지(유리수) 자연수 보다 큰 무한이 없었지만

실수에 이르러서야 자연수보다 큰 무한이 나왔고 앞으로도 더 나올 수도 있다는 결론이 내려입니다.

우리는 무한이란 것의 신기함으로 가득한

힐베르트 호텔도 실수 만큼은 채울 수 없습니다.


다음 글은 이런 무한의 끝이 있을 수 있을까하는 면에서 작성하겠습니다.


<~이전 / 다음~>






이전에 자연수의 개수와 짝수의 개수가 같다는
다소 좀 이해하기 어렵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결과를 내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더 큰 수들의 개수를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설) 유리수는 자연수보다 개수가 많다.

라는 당연한 명제에 이제 도전하고자 합니다.(결론이 급하시면 맨 아래로)


먼저 자연수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즉, 우리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나오는 기본적ㅗ인 수 입니다. 다만 정말로 그 확실한 정의는 다소 복잡합니다.
그러기에 자연수의 정의는 다른 글(링크 클릭)로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유리수를 소개하겠습니다.

유리수
ⓐ. m.n이 정수이고
ⓑ. m이 0이 아니며
일 때
n/m으로 표현이 되는 모든 수이며,

중복 표현 표현을 막기 위해서
ⓒ. n과 m의 최대 공약수는 1이다 라는 조건은 덧 붙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m=1이라고 하면 자연수는 유리수 안에 포함됩니다.

기본적으로 정수로 표현되는 분수 모두를 말하며
소수로 표현했을때
소수부분이 유한 하던지 아니면 순환하는 소수가 나오는 수를 말합니다.

유리수에 대한 기본적인 성질 중 하나는

실수라는 집합에서 보면 유리수는 조밀하게 이루어져 있다.
서로 다른 유리수 두개를 잡으면 그 사이에 무한한 유리수가 있습니다.(증명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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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성질을 보면

유리수와 자연수.. 개수 비교의 승자는 결정이 난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하지만

비교할 가치가 있기에 다음 규칙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일단은 적어도 유리수가 자연수 개수 보다 많거나 같다.

이것은 유리수가 자연수를 포함하니 당연합니다.

2.  <유리수를 최대한 자연수에 맞추기>
만약 유리수가 n/m이고 서로소로 표현 되었다고 할때
n이 양수이면 2의 제곱수에 n을 음수라면 3의 제곱수에 m을 적용하고
m이 양수이면 5의 제곱수에 m을 음수라면 7의 제곱수에 m은 넣어 나오는 값들을 다 곱합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2/3은 22 X  53 = 4 X 125 = 500

-2/3은 32 X  53 = 9 X 125 = 1125


이렇게 유리수를 하나씩 바꾸어 자연수에 대응 시킵니다.

그런데 이때


2,3,5,7은 서로소 이이므로 거듭제곱을 해도

다른 유리수 값에 같은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모든 유리수는 서로 다른 자연수로 다 변해버립니다.


즉, 모든 유리수의 결과는 자연수의 일부분에 포함되어버린다는

다소 충격적인 결과가 나옵니다. 하지만 오류가 없으므로


유리수의 개수는 자연수의 개수보다 작거나 같다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1 번의 결과와 2번의 결과가 모두 성립하려면


결국 자연수와 유리수의 개수는 같다...



그 많던 유리수조차 자연수의 개수와 같습니다.


이쯤되면 모든 무한개라는 것은 결국 자연수 개일까?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 해답은 다음 글에서 계속해보겠습니다.



앞에서 건져낸 위대한 발견! 개수를 세는 법입니다.

하나씩 이어가는 방법으로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앞에 주어진 것의 개수를 셀 수 있고
우리도 모르는 세에 하나씩 짝지어 세는 법을 알게 되었으며

두 집단의 개수를 비교를 할 때 하나씩 짝을 지어 놓으면 어느쪽이 더 많은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 자연스럽게 얻어진 방법에 이름을 다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하나씩 짝지어짐 - 일대일 대응


수학은 아주 단순 해서 이름을 짓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정확한 일대일 대응은 여기를 클릭!)

이제 이 일대일 대응을 통해서 모든 것의 개수를 비교하고자 합니다.
무한은 이제 신의 위치에서 자연스레 손가락 아래로 내려오게 됩니다.
무한의 입장에서 보면 참 슬픈일이지만
이제껏 홀로 지내온 것을 생각하면 더 알아봐야 할 것 입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가정은(정리는)

자연스러운 일대일 대응을 해보아서
양쪽에 남는 것이 없이 다 짝이 되어진다면
두 개의 개수를 같다고 할 수 있다.

입니다.

먼저 그럼 힐베르트의 호텔(클릭)을 한번 보면
힐베르트 손님들은 만원이였음에도 불구 하고 새 손님에게 방을 배정 할 수 있었고
자연수의 개수 만큼의 사람이 새로 왔음에도 방을 배정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유한의 호텔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 힐베르트의 호텔에서는 가능 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무한의 성질이며(더 수학적으로 이야기 하면 무한의 정의 입니다.)

자연수 개수 만큼의 손님이 새로 왔을 때 원래 손님들과 새롭게 옮기던 방에 일대일 대응을 적용해보면

(자연수 개수의 원래 손님) <-> (짝수 번호의 방)      
1호실 손님 <-> 2호실
2호실 손님 <-> 4호실


             .     
        .
      n호실 손님 <-> 2n호실     

이렇게 해보니 자연수 개수의 손님과 짝수 번호의 방과 일대일 대응입니다.
신기하지만 어쩜 당연하게 생각되어 집니다.


더 깊히 생각해보면 짝수라는 것이 자연수의 일부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n <-> 2n 으로 대응 시키면
자연수와 짝수가 서로 빠짐없이 일대일 대응한다는 것,,,,

이것의 결론을 내어보자면

  바로 자연수의 개수[전체]와 짝수의 개수[부분]가 같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이해를 하지만 도저히 마음속 깊히 내딛어지 않는 일이지만 무한에서는 가능합니다.
물론 유한의 세계에서는

[부분]=[전체]

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단지 힐베르트 호텔 같이 방의 수가 자연수 개수 라는 무한개 이기 떄문에 가능합니다.
그 렇담 이 성질은 무한과 유한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이고 이 사실 자체가 정의 입니다.

무한이란!
(자신의 개수) = (자신의 같지 않은! 일부분의 개수)


참고로 말하자면 이렇게 될 수 없는 것을 이제 유한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우리는 보통 유한을 정의하고 무한을 정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본래는


 무한이 먼저 존재하고

무한이 아닌 것이 유한이라 정의합니다

즉, 무한이 먼저 정의 됩니다.


인지와 반대로 흘러가는 이것들은 좀 더 충격적인 결과를 초래하곤 합니다.

그것은 다음글에 담겠습니다.
(집합론에서 무한집합의 수학적 정의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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