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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글을 통해 “독립적으로 선택”을 찾기 위해 많은 실험들을 반례로 들면서 예언과 선택의 서로의 상관관계를 파악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하는 선택에서 기본적으로 예언이 갖는 위치는 상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의 삶에 종속되지 않듯이 선택이 예언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영향력이 클 뿐이고 예언의 힘이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혹은 본능)의 영역에서도 작용하기 때문에 여러 실험으로 마주하는 결과가 예언에 힘을 실리는 것이죠.

  이제는 반대로 나가려고 합니다. 나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는 예언의 성립하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신에서 찾을 생각은 없습니다. 신을 근거로 들기에는 전 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그리고 하나의 교실 안에서 조차 어느 누구도 반론하지 않는 신을 증명하기에는 제가 누구말대로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확실히 말하지만 지금부터 언급되는 ‘예언’은 좁은 의미의 종교적 색체가 강한 것이 아닌 행동을 만드는 기저 상황인 넓은 의미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14. 예언의 성립 조건 - 합리성

  예언의 조건은 여러 면에서 추측이 가능합니다. 가장 먼저 예언은 ‘과정의 합리성’이 있어야 합니다. 일부 예언은 합리적인 면이 상실되면 그것은 예언으로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 신화나 혹은 우리의 우화들 그리고 성경들을 예로 들자면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조건이 없을 수 있겠지만 번개를 다스리는 ‘제우스’가 있고, 말하는 ‘미운 오리’가 있고, 또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 인과관계는 달라지지만 그 과정의 합리성은 완성됩니다. 만약 합리성 없는 예언이라면 그것은 그저 주어가 없으니 사실이 아니라는 변명 같은 일이겠지요.

아무리 신화적인 이야기도 그 안에 합리성을 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말하는 미운 오리’가 있다면 태생적인 문제가 있는 자신에 대해서 통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은 전혀 합리성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만 말을 하는 오리일뿐 그 과정 그리고 그곳에서 얻는 예언들 그리고 그 성취는 공감이 가는 교훈 혹은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이 합리성이 아예 없다면 그것은 예언의 규모도 될 수 없을 뿐이고 그 가치 또한 얻기 어렵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렸던 예언이 그 의미나 가치를 획득한 것은 식민지 상태의 이스라엘이 ‘상상할 수 있는 메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합리성 때문입니다.

 

15. 예언의 성립 조건 - 비합리성

  하지만 오히려 완벽한 논리의 조건과 추측은 예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나는 내일도 아침에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겠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예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조건의 확률이 아주 높은 쪽에 대한 판단일 뿐입니다. 즉 현실 그 자체는 예언에 속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약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힘껏 발길질하는 아이의 태동을 보면서 축구선수를 보면서 체육인으로 키워 냈다면 그것은 ‘예언’이 될 수 있습니다.(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말이죠.)

  기독교의 메시아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아가 아무나 될 수 없기에 이것은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아예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비합리적인 면이 예언의 지위를 확립시켰고, 예수의 행적에 권위를 주는 것입니다.

신이 죽는 이 장면은 절대 비합리적이지만 그렇기에 신이 될 수 있다.


  예언에 대해서 이 두 가지만 생각해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둘을 모순 관계이라는 것 있습니다. 즉 예언은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언의 그 과정의 합리성을 그리고 현실과 너무 부합하면 안 되는 비합리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하기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이라는 존재는 모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합리성과 비합리성이 부딪치는 이 상황에서 예언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 모순관계에서 예언이 그 위상을 유지하는 데에는 사람들의 한자기 독특한 습성이 있습니다.

   

16. 모순과 상관없는 예언? - 인지 부조화 이론

  하지만 보통 예언이라고 하면 느끼는 것은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그 능력이 나온다 합니다. 이는 예언이 성립이라는 것을 갖추었을 때 힘은 얻는다고 오해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성립을 하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예언의 조건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성립이란 조건이 없이도 예언은 그 위상을 잃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성립이 없는 예언’이라고 하면 ‘신성 모독’이라고 할 것 같은 예상에 한 가지 심리학 이론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지 부조화 이론’입니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람들이 어떠한 태도들이 또는 태도와 행동이 서로 모순인 관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이 그 태도에 대해서 반성하기 보다는 그 태도를 유지하게 되는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그 원인은 일관성이 깨지는 것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바로 종말론자입니다.

사람의 인지 않에 모순 혹은 부조화가 생기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2000년 밀레니엄이라는 ‘산술’적인 모델 앞에서 많은 이들은 종말을 논했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종교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산술적인 장난은 신이 될 수 없었고 이에 많은 이들이 종말론 자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무엇이었을까요? 반성 보다는 자신들의 말들을 위해 행동합니다. 완벽한 부조화입니다. 그 실체나 판단보다는 먼저 경험했던 행동이나 그 태도가 바로 그들의 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합리성을 버리고 비합리성만을 갖은 예언을 따라가는 것이죠.

  그들은 예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순적이 부조화라도 말입니다. 즉, 예언이란 것은 부조화 혹은 실현과는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혹은 그것이 더 강할 수도 있습니다. 실현된 예언은 검증이라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처럼.

   

17. 모순이 완성하는 예언 - 2012년 또 다른 종말론을 맞이하며

  2012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은 또 다른 예언들이 넘쳐날 듯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마야인 들의 달력 덕분이죠. 이는 합리적인 마야의 계산법에 비합리적인 종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언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개인의 몫입니다. 혹은 이루어지지 않은 종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조화이론의 실천을 통해 계속 믿는 것 역시 개인의 것입니다.

2012년 종말을 이야기 하는 영화 '2012'


  다시 말해 예언과 성립은 상당히 중요한 합리적 고리이지만, 그것이 성립이 되지 않는 모순을 겪더라도 사람은 그 예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모순이 더 깊은 믿음과 행동의 근거가 됩니다.

  즉 이런 인간의 부조화적인 심리적 방향성이 합리성과 비합리성이라는 두 가지 모순으로 만들어지는 예언을 더 강하게 완성시킵니다. 또 그 예언은 우리가 이전 글까지 언급한 대로 선택에 가장 중요한 기저가 됩니다.

  이슬람종교가 여타 종교보다 더 많이 소유한 규제 및 행동 규약 들은 사실상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무신론자들이 보기에는 기독교인이나 불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모순적인 행동의 근원은 비합리적이라도 어떤 하나의 ‘예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언’의 비중이 높은 종교가 더 큰 충성심을 보이곤 합니다. 그리고 이 충성심은 행동에 대해서 더 강한 선택을 유도하게 합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입니다.(르네마그리트 )

  따라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언은 인지적인 조화이든 인지적 부조화든 혹은 성립이든 그것이 아니든 예언은 선택을 종용합니다.

 




어쩜 후광효과부터 피그말리온 효과는 예언을 바라는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선택을 꿈꾸는 이 글의 목적을 되새겨 보면 이 본능에 대해서 더 살펴보면 어느정도 자율적인 선택을 꿈꾸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희망적 생각[각주:1]을 첨부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얼마나 예언에 밀접해 있을지가 가장 먼저드는 고민입니다. 삶의 모든 시간에 대한 것은 이미 오랜시간 혹은 그 전에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바랍니다. 지금 이 의문과 넋두리는 종교적인 어떤 부분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선택이 예언에 종속되는 기본적인 매커니즘이 중요합니다.

즉 종교적 의미의 예언보다는 지금 우리에게 끼치고 있는 비종교적 예언과 선택의 매커니즘에 집중 되어야 합니다.


11. 예언을 원하는 기본적인 본능, 뇌바보

먼저 우리가 예언을 원하는 기초적인 본능은 어디서 나올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정말 그 기초를 잡았다면 저는 지금 스위스에서 상 받을 준비를 하고 있겠죠? 최근에 우연히 어떤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제가 보는 신문은 아닙니다만 SNS의 힘으로 접하게 된 것이요. 바로 '뇌바보'입니다.[각주:2]

이 '뇌바보'는 말 그대로 뇌가 바보라는 것에 대한 것으로 이에 대한 언급은 간단한 행동으로 설명 합니다. 이 글의 저자가 강연할 시에 한 학생을 일으켜 세워놓고 이런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라고 공지 한 뒤에 "당신은 능력이 있으며~"라고 말합니다. 즉 거짓말이라고 하고 나서 세상의 온갖 칭찬을 다하는 거죠. 결론은요? 아시겠지만 거짓말을 들은 그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 더 정확히 말해서 뇌가 기분 좋아 집니다. 개인적으로 이 사실을 접한 저는 너무나 신기해 보였습니다. 바보처럼 말입니다.


뭐 그냥.. 뭐... (출처 : 뉴스뱅크이미지)


그리고 이어지는 근거 실험에 대한 설명은 더욱더 흥미를 끌었습니다. 실험은 1995년의 실행된 실험으로 뉴욕대학에서 실시된 심리학 실험입니다. 7.5m의 통로를 지나가는 실험인데, 젊은이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결론은 평균 7.3초. 이 실험은 심리학 실험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통로를 걷기 전에 노인에 대한 문제를 풀었고 통로를 지난 시간은 앞 선 집단의 평균보다 1초 이상 웃돌았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은 두 집단이 있는데 한 집단에게는(줄여서 무례집단) '무례하다. 침입하다.  공격적이다' 같은 단어를 한 집단에게는(줄여서 예의집단) '예의바르다. 정숙하다. 양보하다.'의 단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다음 실험을 받게 한다며 다른 장소로 이동시킵니다. 실험은 여기서 시작되는데, 앞 선 두 사람이 이런 저런 문답을 계속 이어나가고 피실험자는 그들을 기다립니다. 결론이 예측되시죠? 무례집단은 5분 정도 안에 끼어들어 대화를 시도하고 예의집단은 10분 이상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뇌는 정보에 무기력한 바보입니다.



'노인이란 단어', '무례한 단어', '예의바른 단어'가 대체 무슨 일을 꾸민 것일까요? 그것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몇 개의 단어가 뇌에게 직접적인 반응을 유도하게된 것입니다. 네. 본능적으로 받아들인 예언입니다. 우리의 뇌는 이미 그냥 지나가는 몇 개의 단어에 사로잡혔습니다.


12. 바보가 하는 선택? - 뇌바보와 사이비 종교

바보인 뇌는 몇 개의 정보를 실재적인 자신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성격 마저 지나가는 몇개의 흘러가는 정보를 통해 형성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는 교육적 의미로 엄청난 현실입니다.[각주:3] 우리가 주변의 상황에 오류를 범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우리 자체가 상황, 혹은 작은 예언들을 따를 수 밖에 없는 본능이란 것입니다.

최근의 시사 고발 TV에 한 수련원을 보게 되면 이런 본능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종교적 행사중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는 데 이 고백이 정말 판타스틱합니다. '수련원의 돈 3억을 횡령했다.'부터 시작해서 '도둑질을 했다.', '원장을 살해하려 했다.' 등[각주:4]의 말은 반복적으로 듣고 반복적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결론은 예상하는 그대로 입니다.

H수련원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들은 그 3억을 갚기 위해서 수련원에 돈을 내고 기부를 하며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충성합니다.

그들이 과연 멍청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또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종교인은 집단 최면과 흥분 상태를 이용한 것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메시아의 통로라는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 뒷면에서는 수많은 성적 도착증을 보인 이야기도 나옵니다. 당했던 사람들을 모아보면 극히 정상적이고 혹은 더 존경을 받는 위치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있다면 절대로 이 교주같은 목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실재로 녹회된 영상에는
아방가르드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비상식적 결과를 도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상식 그 이상입니다. - '그것이 알고싶다' 스틸컷



사람은 들어오는 정보가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더라도 그 안에 '정보[각주:5]에 대한 믿음'이라면 어떤 논리적 설명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쩜 뇌바보에서 부터 나오는 인간의 수동적 선택의 본능일 것입니다. 이런 본능의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택에 대해서 수동적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에게 '자유러운 선택'이란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13. 예언과 선택

선택을 사로잡기 위해서 예언을 언급했습니다.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우리가 선택을 하는 일에 대한 것을 약간 이나만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예언을 언급할 것 입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어쩌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반(反)자유'이고 나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일 수 도 있습니다. 이에 비관적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어 라고 말 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제가 '선택'을 계속 궁지에 밀어 넣은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근거가 없는 의미 있는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의미 있는' 선택이란 단어의 정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린 올바른 선택을 하기에 앞서 올바른 근거를 찾아야 하고, 그 올바른 근거를 찾기 위해 예언을 찾았습니다. 꼭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내용이 아니라도 예언은 개인에게 존재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예언의 기원을 찾다보면 분명 선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것입니다.



물론 언급한 '예언'은 사전적 단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포괄적인 것입니다. 어떤 선택과 판단의 근거가 되는 그 이전에 선택된 것으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선택에 강요되는 부분을 지칭하는 단어로 썼습니다. 이런 예언이 없이 우리가 판단할 구석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홀로했다고'믿는' 선택보다는 그 근거 다시 말해서 선택 이면의 예언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뇌바보에서 보는 것 처럼 '예언'이 근사하고 화려하게 생겨나고 방대한 정보의 것만이 아니라 단지 나도 모르게 스쳐지나가는 혹은 집중하지 않았던 어떤 것들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엑스칼리버 처럼 몇 백년을 이어나가는 예언도 분명 존재하나 오늘 아침에 나온 아침 식사 또한 예언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침식사의 짧읜 메뉴가 당신에게 예언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조금더 예언을 자세히 그리고 조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그 예언은 어디서 오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을 다음 글에 해볼 고민으로 남기겠습니다.

  1. 혹은 예언 [본문으로]
  2. 중앙일보 - http://bit.ly/ohDVrY [본문으로]
  3. 교육적인 면은 다른 주제로 다룰 예정입니다. [본문으로]
  4. 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19금이라 생략합니다. [본문으로]
  5. 그들에게 주어진 특정 예언 [본문으로]
< 똑똑한 지인이며 친구인 이의 조언에 따라 경어체로 바꾸어 봅니다.>
앞서 이야기 한 듯이 우리가 이미 '선택'이란 것이 이제 더 이상 '독립적'선택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구석이 너무나 많습니다. 의지를 구성하기 에는 다양한 방해요소가 생성되며, 우리는 그 방해에 순종하는 것이 대부분이죠. 자신이 인지 못한 상황, 아니 인지하는 상황이더라도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하기도 하고, 또는 타인의 선택에 속기도 하며 심지어는 제시되는 정보의 순서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선택의 방해물에서 잠시 벗어나 선택 자체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7. 경솔하게 선택하고 신중하게 유지하다.

먼저 유신론과 무신론을 들먹거리고 싶진 않습니다. 나의 전공이 아닐뿐더러 지금 여기서 내세우고 싶은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각주:1] 모든 사람은 선택하고 그 결과를 기대합니다. 만약 그 결과에 대한 환상이 클수록 선택에 신중을 기하는 경우가 많고 만약 이루어질 확률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해집니다. 그에 반하는 경우나(문구점의 뽑기) 혹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우(로또)에는 정말 터무니없게 경솔하기도 합니다. 신중과 경솔의 사이 속에는 무엇인가 '독립적인 선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신중함에서 선택을 찾을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저는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선택한다."를 찾고 싶은 것입니다. 한 가지 가설을 올립니다. 신중의 정도가 높을 경우에 우리는 좀 더 자발적일 수 있을까요? 이 가설이 옳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 의존적인 선택의 실험들은 '신중함'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신중함'이란 것을 찾아 가봅시다. 최고의 신중함을 찾으려면 가장 결과가 큰 곳으로 가야 하겠죠? 그래서 저는 이 가설에 '신'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보통의 유신론(특히 종교) 속에서는 우리는 한정된 삶의 영원한 다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 그 '결과'란 것은 (그 믿음에 성실할 경우에) '로또'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이겠죠.

그런데 재미있는 '종교'의 특징은 보통 경솔하게 선택하고 신중하게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신앙이란 것의 고비마다 결단과 선택의 순간이 존재하죠. 예를 들자면 세례나 출가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신중하고 싶은' 과정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처음에 입문하는 순간을 보자면 상당히 우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의 종교란 것도 상위세대의 종교의 세습과 동아리 활동 등의 의도치 않은 순간들의 결과입니다. 갑자기 종교와 입문의 경솔함을 언급하는 이유는 과연 결과에 부여된 가치가 크다 해서 선택이 신중하지는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종교적 '간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의 길을 인도한 것은 신이였다. 내가 우연히 마주하게 된 곳은 신이 나를 멱살 잡아 내팽개친 그곳 이였다. 아멘. 혹은 나무아비타불.

본디 경솔함이 인간의 몫이고 신중은 신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린 어디에서 신중했던 걸까요? 신이 우리를 이 자리에 '모셔'왔다면 우리가 대체 신중할 수 있는 여유가 있긴 한 것일까요? 하지만 이것은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사람들이 믿는 신의 현현(석가나 예수)은 신중했던 존재였다는 것 말입니다. 종교라는 것이 바로 이 신중했던 선인 및 신이라 불릴 존재에 대한 믿음이겠죠. 결국 태초부터 경솔했던 우리는 신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자면 내세운 가설 "결과가 클수록 신중할 것"은 그다지 좋은 가설은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작은 것에 신중하며 큰 것에 대해서는 경솔할 수도 있습니다. 신은 경솔하게 선택하고 의례는 신중하게 하는 우리에서 모습에서 말이지요.


8. 당신이 선택을 한 신에 대해서

사실 '경솔'이란 단어가 '신중'이란 단어의 반대 개념으로 적용하기에는 충분히 독선적인 면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어쩜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종교와 선택이란 자유의지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왠지 더 역설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사실 종교로 들어가자면 정말 계획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신이니까요. 그런데 무신론자들은 다를까요?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 또한 사실과 증명이라는 것에 종속되어있긴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을 까?'입니다. 사실 저는 많은 실험들을 통해 글을 진행해 오면서 그렇지 않다고 계속 속삭이고 싶습니다. 어쩜 정말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개인적으로 슬플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조금 주제를 돌려볼까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하는 법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알고 있기에 이쪽으로 이야기 하자면, 예수의 마지막 말 중 하나가 바로 "다 이루었다.[각주:2]"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한마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란 존재의 역할이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 역할을 끝까지 따라 온 것입니다. 이것에 '예언'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에 비춰 볼 때, 예수 본인도 예언을 쫒아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철저히 '구약'이라는 기독교 전통 역사서의 모든 예언을 실행합니다. 출생부터 죽음 그리고 거듭남 까지 말이죠.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그의 올바른 길 혹은 올바른 선택을 존중하고 종교로 신봉합니다. 사실 그마져도 모든 행적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예언의 선택 이였죠. 그러므로 그가 선택한 것은 '그 예언'인 것입니다.



9. 인류를 가장 빨리 종말 시키는 법. <피그말리온 효과>

<피그말리온 효과>, 개인적으로는 귀에 익숙한 음악처럼 들리는 단어입니다. 교사를 위해 처음으로 교육학이란 것을 시작할 때 배웠던 것으로 저에게는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실험입니다. 다들 어쩌면 한 번씩은 들어보았을 실험이기도 합니다. 우선 이 실험 내용의 간략한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이 효과는 로젠탈 효과라도 불리며 로젠탈은 이 실험의 발의자입니다. 사실 정성스럽게 키운 쥐가 미로를 더 잘 찾는데서 시작된 이 실험은 인간에게 특히 학생에게 직접 적용되었는데 먼저 진단평가를 본 다음 보통 수준의 아이들을 두 반에 나누어 배정한 다음에 이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한 반은 앞으로 수개월 내에 월등하게 향상될 반 이라 소개하고 나머지 한 반은 기대치가 없는 반으로 소개합니다. 물론 처음에 능력차이가 없었죠. 하지만 결과는?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수치로 능력을 인정받은 처음 반이 평균 이상의 성적을 그 반대 반은 평균 이하의 성적을 보였습니다.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어버린 것이죠.[각주:3]

사실 피그말리온이라는 단어의 어원 역시 이와 비슷한 사건의 그리스 신화를 기초로 한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피그말리온이라는 키프로스지역의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이 사랑한 것은 다름 아닌 조각상 이였습니다. 그 조각상에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던 왕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축제에 간절히 소원을 빌었고 그 결과 그 조각상에 고운 여인으로 변하였습니다.
 

조각에서 여인으로 변모한 것은 그가 지속적으로 예언한 덕분입니다.


 
왜 로젠탈효과를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바램 혹은 무의식적으로 들어간 예언이 실제로 사람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을 그렇게 만들고 말지요. 사실 이 효과에 대해서 미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실제로 재 실험 결과 생각보다 높지 않은 결과도 있었죠. 하지만 이는 분명합니다. 예언은 분명 영향을 미칩니다.

언젠가 인류를 가장 빨리 종말 시키는 법이 무엇일까 고민해봤습니다. 핵폭발? 유성충돌? 핵폭발이 있어도 벙커 안에서는 파티가 열리는 세상이며, 유성이 온대 해도 화성으로 가는 편도 우주선[각주:4]에 오른다면 적어도 비행선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살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모든 사람들이 곧 인류가 종말 할 거라고 믿게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벙커도 만들지 않고 화성 편도 우주선도 탑승치 않고 그리고 영웅도 나타나지 않고 멸망의 길로 갈 꺼라 생각합니다. 사실 약간의 과장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렇더라고 변함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분명 우리가 예언을 하게 되고 ,그 예언은 분명 현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 예언은 길게 이어왔던 선택의 본질로 향하는 길을 열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쟌다르크는 예언으로 영웅이 되었고 또한 그 예언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예언이 영웅을 탄생시킵니다.




10. 바위의 엑스칼리버를 뽑아들 영웅은 누구인가.

하지만 피그말리온 효과는 그들에게 속여진 예언입니다. 어쩜 후광효과(링크)와 비슷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 예언이 혹시 거짓임을 알고 있을 때도 예언 실현이 가능할까요? 만약 정말 거짓임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 후광 혹은 그 예언을 뿌리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전에 저의 개인적일 일 하나를 언급하려합니다.

저는 꿈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꿈에 대한 해몽을 그다지 믿지는 않죠. 그래도 주변에서 꿈자리가 사납다면서 나에게 연락을 할 때면, 왠지 횡단보도 앞에서도 한걸음 더 뒤로 물러서 신호를 대기합니다. 이는 분명 의식적으로 아니라고 믿었던 예언마저 저에게 실현되고 있는 것 입니다. 저는 전혀 믿지 않았는데 말이죠. 

또 한가지는 주변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아무 숫자나 이야기 해봐요." 대답의 경우는 상당히 다양했습니다. 당연한 것이죠. 그것은 임의 선택이니까요. 그리고 다음 질문을 했습니다. "왜 이 번호를 선택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보통은 "좋아서요", "학번이였어요", "전화번호 끝자리예요" 등 으로 대답했습니다. 질문은 아무 숫자였는데도 대답은 임의의 선택이 아니라 예언된 선택이였습니다.[각주:5]

대부분은 예언으로써 선택한다.



이 이야기는 어떤 동생과의 대화중에서 발췌합니다. 그는 기독교의 많은 위인 중에서 요나[각주:6]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그는 신에게 어떤 지역으로 가서 예언을 하라는 명령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이 자신에게 위험하다 판단하여 도망치죠. 그러나 도망치는 배에 올라탔을 때 풍랑이 일고 결국에는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그는 고래 뱃속으로 들어가는 신세이죠. 머, 고래의 위는 건강하지 않은가 봅니다. 그는 그 위에서 살아나 신이 예언하라 보낸 그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요나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신의 예언을 거절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어쩜 우리는 예언을 받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혹시 내가 선대에서 부터 선택되어진 '그' 사람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바위에 꽂혀있는 칼을 내가 집어 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죠.

가끔 바위에서 칼을 뽑아 드는 상상을 합니다.

 

위의 세 가지를 잘 적용해보면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앞서 또는 선택한 후에 예언을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본능적으로 피그말리온 효과를 찾는 것일지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선택에 대한 결과를 회피하기 위한 방어기제 일지도 모르죠. 무엇이 진실에 가깝든 이것은 일치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예언'을 원합니다.


즉, 바위에 꽂힌 엑스칼리버를 뽑기 전에 우선 예언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언에 의존하는 성질은 어디에서 부터 일까요? 다음에는그런 예언의 주체를 생체학적으로 찾아보는 실험을 통해서 계속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1. 개인적으로 나는 회의론적 유신론자라고 하고 싶습니다. [본문으로]
  2. 요한복음 19:30 [본문으로]
  3. 이때 성적이 떨어진 집단에 대한 효과를 '골렘 효과'라고 하고 비슷한 실험으로 위약효과로 알려져 있는 '플래시보효과'가 있다. 이는 실험자들이 가짜 약을 먹고도 신경증이 완화되는 효과며 그 원인은 피그말리온과 비슷하다. [본문으로]
  4. 이미 이 여행의 경쟁률은 400명을 넘어섰다. 참고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111712411&code=970211 [본문으로]
  5. 모든 사람이 그렇게 대답한 것은 아닙니다. 몇 몇은 아무런 숫자를 뽑으라 하지 않았냐 하고 반문했죠. 수학전공자들이였습니다. [본문으로]
  6. 열왕기하 14:25 [본문으로]



이전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즉, 오인된 정보 또는 오인되는 주변상황에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인 논리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에게 정확한 정보가 제공된다면 우리는 선택이 가능한 사람인지 궁금하게 되는데 이런 답을 얻기 위해서 유명하고도 반인권 실험 유명한 사건들을(하지만 중요한) 언급하고 싶습니다.


 3. 상황을 안다면 선택가능한가? - 스탠포드 감옥실험

  항상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들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서술할 실험은 그 ‘주의’의 부족으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던 실험 중 하나인데, 실재로 이 내용은 엑스페리먼트(The Experiment, 2001)라는 영화와 소설로 각색이 된 실험으로 실재의 실험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이제 이 실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이렇습니다.

 
실험은 스탠포드 대학교 심리학부 지하에서 시작되는데, 24명의 지원자를 받아 교도과과 죄수로 나누어 그 역할에 맞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 지원자들은 중산층 가정에서 비교적 좋은 가정환경과 교육환경에서 자란 남자들로 범죄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실험의 목적은 교도관과 죄수의 역할을 통해서 감옥상황을 이해와 그 특별한 상황에서의 몰개성화[각주:1]를 확인함이였습니다. 물론 그 목적에 대해서 피 실험자들에게는 공지하지 않았습니다.

 

스탠포드대 감옥실험은 소설 및 영화로 제작 되었다.


 첫 만남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나눌 때 피 실험자들은 교도원의 역할에 대해서 불편해서 죄수를 신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합니다. 하지만 피 실험자의 역할에 관해서는 선택이 아니라 임의로(랜덤으로) 뽑아서 결정하였고 선발된 9명의 교도관은 카키색 단체복을 입었으며 제압용 곤봉과 눈을 가릴 수 있는 선글라스를 지급하고 3인씩 3교대로 교도관 업무를 실시하였고 죄수로 선발된 9명은 3명씩 3개의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각주:2]

 
교도관들은 죄수의 집에 들어가 그들을 연행했으며 수감되는 과정 또한 동일하게 하였는데, 특히 죄수 역할의 피 실험자에 대해서는 모의 감옥이라 설명치 않고 스탠포드 주립 교도소라고 고지한 채 연행함으로써 더욱더 실험에 집중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실재적으로 실행되는 실험이긴 하지만 피 실험자 스스로 자신이 실험 중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언제나 자신이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있음을 미리 공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놀랍게도 예측을 벗어났고 생각지도 못한 이른 순간 통제에서 벗어나 버립니다. 첫날에는 분위기가 좋았으나 사소한 갈등으로 시작한 교도관과 죄수들이 각각의 의견들과 요구하기 이르렀고 끝내는 권력구조의 양상을 띄었습니다. 결국 둘째날 새벽에 터집니다. 한 간수는 밤새도록 죄수들을 깨워 번호를 외우게 하였고 이에 반항하여 죄수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맙니다. 하지만 이런 점이 오래가지 못했고 금새 교도관들은 진압하였는데, 이에 보복으로 폭동을 일으킨 죄수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각주:3] 육체적인 제제는 애초에 금지했기에 교도관들은 언어적으로 그리고 위생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합니다.[각주:4]

 
 이런 와중에 한 죄수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버립니다.

결국 상황이 인간을 만들어 버렸다.



 실험진은 그 죄수를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이런 결과에도 굴하지 않고 실험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죄수들 사이에서 퍼지자 저항은 격렬해졌고 결국 교도관들은 신체적인 학대가 시작되었고, 다섯째 날에는 성적인 학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이 상황이 실험임에도 불구하다는 것을 모두 아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 실험은 단 5일만에 종료됩니다.

 
이렇게 설명하기도 긴 이 실험이 단 5일만의 일인데, 제가 더 의아했던 부분은 연구진입니다. 연구진들은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그 실험을 계속해갔습니다. 특히 5일째 종료를 한 이유도 연구진 내부의 의견이 아니라, 이 실험자의 총책임자의 동료이자 애인이 이 실험을 견학하러 왔다가 처참한 실험 현장에 대해 경악을 한 후 였던 것이였습니다. 또한 한가지 더 의문은 피 실험자 전원은 언제든 이 실험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문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그 자리를 지켰다는 점입니다. 대체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4. 상황을 알고 있다면 선택가능한가?

 
이 글의 오랜 방황을 이제 마무리 짓고 본래의 글귀로 돌아가보자면, 위 실험은 지난 글과 다르게 실험자들이 자신이 실험자임을 다 알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자신이 이 실험에서 뛰져나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나에게 누군가 실험중이고 곧 너는 맞게 되는 상황이 올꺼야 그럴떄 싫으면 꼭 나오고 싶다고 말해 라고 제시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실험을 포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실험에서 포기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2명의 포기자가 있었는데, 첫번째 포기자는 위에서 언급한 정신착란을 일으킨 죄수[각주:5]이며 한명은 폭동을 주도하여 독방에 갖힌뒤 온갖 고문을 당한 사람이였는데 이 사람은 연구진이 실험에서 포기하자고 제안하자 자신은 죄수이므로 나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후에 오랜시간 동안 설득을 해서 실험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정확한 정보가 제공된 상황에서 선택가능할까요?"

당신이 정보가 있다면 당신의 선택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실험을 뒤돌아 본다면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은 거짓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복종했으며 자신의 모든 선택이 자신의 역활 혹은 거짓 상황에 매여있었습니다. 즉 내가 지금 선택하는 것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의 상황이 나에게 이렇게 선택함을 강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선택의 역활이 나에게서 나오지 않고 나의 의지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신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요?

 
연구진의 행동을 보아도 이 점은 확실해 집니다. 사실 연구진들은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통제가능한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당하고 비도덕적인 사건 속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면에서 보면, 이 실험의 피 실험자는 교도관 역활과 죄수 역활뿐만 아니라 연구진 그들도 스스로도 실험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자유의지를 획득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당신은 지금 당신 주면의 상황의 역활에서만 선택하는 맞춤형인간은 아닌가요?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면 어떤 업체의 목표가 있다고 치면, 그 목표에 따른 진행이 이어짐에 따라 각자의 역활을 맡게 됩니다. 학교로 따지면 교장-교감-교사-학생의 이런 역활들 말입니다. 하지만 언제 부터인가 교육의 목적이 학교의 목적으로 도치되고, 교사의 목적이 교장(혹은 교감)의 목적이 투사 되는 순간, 교육의 선택은 학교의 발전에 있고 교사의 선택은 교장(혹은 교감)의 이력서(혹은 결과보고서)의 한줄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경우 당신이 학생의 역활이라면 당신은 확실히 당신의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예를들어 학교의 목표가 혹은 욕심이 그리고 사회에서 제공하는 모든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수능이라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당신이 학생이란 역활이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습니까? 저는 왠지 답을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당신"이란 개념은 코너에 몰린 것 같습니다.


  5. 결과를 알고 있다면 선택가능한가? - 밀그램 전기충격 실험

 
또 한가지 선택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과연 "선택을 믿는 당신은 만약 결과를 알고 있다면 선택 가능한가?"입니다.

조금 다르게 질문하자면,

<죽음 후에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갈림길 앞에서 먼저 도착한 사람이 나중에 도착한 이에게 오른쪽 길로 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정표에 분명 지옥이라고 써있고, 유황냄새 나는 불이 저만큼 보입니다. 그럼 당신은 오른쪽으로 가겠습니까?>

이에 관련된 실험 한가지를 다시 열어보면, 스탠포드대학의 모의감옥실험 이전에 있었던 밀그램 전기충격실험을 들 수 있습니다. 실험은 간단한데, 사람들을 2인 1조로 묶어 한명을 교사, 한명을 학생으로 나눕니다. 그 다음에 학생을 전기의자에 앉치고 전선을 교사 앞에있는 15볼트에서 450볼트까지 단계적으로 전압을 올려 충격을 줄 수 있는 장치에 연결합니다. 그 다음 교사는 학생에게 문제를 내고 틀리면 15볼트씩 올리면서 충격을 주도록 합니다. [각주:6]

(이미지 출처 : 위키)



 참고로 이야기 하자면 15볼트는 따끔한 정도이며 450볼트는 즉사입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요? 결론 부터 이야기 하자면, 65%의 사람들이 450볼트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것도 큰 고민 없이 말이죠. 그들은 실험을 위해 살인과 동일 수준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제 이 실험을 다시 이야기 하자면, 실제로 피실험자는 '교사'한명이였습니다. 즉 학생역활은 이 실험의 고용된 스탭이였으면 당연히 전기의자는 가짜였습니다. 이때 학생을 '연기'하던 그들은 교사 역활이 누른 볼트수를 방안에서 몰래 볼수 있었으며 그 볼트 수에 따라서 고통스런 연기를 했던 것입니다. 실험주제도 사실 <권의에 대한 복종>이였죠.

 실험 후엔 실험에서 교사역을 했던 실제 피실험자는 실험 후에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선택을 했던 것에 충격을 받아 정신 치료까지 받았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실험 책임자는 비윤리적 실험이였다는 비판 속에 대학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실제 모집 홍보물(출처 : 위키)


 그들은 정말 450볼트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은 이미 그 전기의자의 충격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택했습니다. 450볼트의 살인을. 역시 의문인 점은 그들이 굳이 실험을 통해서 살인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어쩜 우리는 복종하는 것이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이 실험을 적용하여 위 질문을 대답하자면 지옥 문앞에서 이런 후회를 하게 될 것 입니다. "어? 아까 어떤 사람이 지옥으로 가라해서 여기로 왔습니다."라고 말이죠. 즉, 결론을 알더라도 우리는 어떤 권위에 대해서 복종하는 심리적인 기저를 지닌 것입니다. 어떤 결과를 야기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더 극적으로 설명하자면 그 것이 나에게 절대적으로 나쁜 선택이라 할지라도 권력이라는 것에 우리는 '선택'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실험들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복종한다는 것을 말이죠.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복종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는 권력에, 어떤이는 연말 연봉협상에, 또 어떤 이는 실험진의 450볼트 전기충격하라는 명령에.


 
6.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이 불가능한가?

 
이렇게 글을 쓰고 보면 우리는 전혀 선택불가능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내가 판단하는 것은 타인이 심어준 비의도적인 명령이거나(주제1) 혹은 정보의 순서에 따라 오판한 것인지(주제2) 혹은 상황에 너무 적응해버린 탓인지(주제4),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복종일것인지(주제5)...

복종은 우리의 본능일까?



 
사실 그렇다면 우리가 갖어야 할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게임을 해서 항상 이긴다고 하면 그것이 게임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맨유가 항상 이겨서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지는 적이 있어 더 재미있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선택이란 것을 계속 되뇌어봐도 그 결론이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저 나란 존재는 주변 자극에 너무나 쉽게 그대로 반응하는 수학문제집의 해설서 같은 느낌입니다.

 
사실 신에게 조금 묻고 싶은 면이 있는데, 그것은 그대가 갖는 신이라는 존재는 선택을 한 것인지 말입니다.

과연 우린 '선택'을 선택할 수 있을까?



 
하지만 분명 '선택'이란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갖는 무엇인가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 나는 확신합니다.(혹은 하고싶습니다.) 그러기에는 비극적인 실험결과만이 아닌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며, 무엇인가 이런 비극을 종료시켜줄 이야기를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가 나 자신도 모르게 복종하는 것이 본능이라면 우리가 스스로 '선택가능하다.'라고 느끼는 것은 분명 다른 곳에서 나오는 직감 아닐까요? 그 직감에 대한 처절한 증명은 다음글로 미루겠습니다.


  1. 집단에 소속되어서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본문으로]
  2. 나머지 인원은 예비인원임 [본문으로]
  3. 특히 다른 죄수들을 뒤돌아 있게 만든후 팔굽혀 펴기를 한 것은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방식과 유사했다. 유독 더 독특한 점은 교도관들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본문으로]
  4. 대소변을 양동이에 보게 하기도 함. [본문으로]
  5. 강제로 실험에서 제외시킴. [본문으로]
  6. 이때 실험자에게 제시한 이 실험의 주제는 <징벌에 의한 학습효과>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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