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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 글을 통해 “독립적으로 선택”을 찾기 위해 많은 실험들을 반례로 들면서 예언과 선택의 서로의 상관관계를 파악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하는 선택에서 기본적으로 예언이 갖는 위치는 상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의 삶에 종속되지 않듯이 선택이 예언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영향력이 클 뿐이고 예언의 힘이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혹은 본능)의 영역에서도 작용하기 때문에 여러 실험으로 마주하는 결과가 예언에 힘을 실리는 것이죠.

  이제는 반대로 나가려고 합니다. 나의 선택을 좌지우지하는 예언의 성립하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신에서 찾을 생각은 없습니다. 신을 근거로 들기에는 전 세계적으로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그리고 하나의 교실 안에서 조차 어느 누구도 반론하지 않는 신을 증명하기에는 제가 누구말대로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 더 확실히 말하지만 지금부터 언급되는 ‘예언’은 좁은 의미의 종교적 색체가 강한 것이 아닌 행동을 만드는 기저 상황인 넓은 의미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14. 예언의 성립 조건 - 합리성

  예언의 조건은 여러 면에서 추측이 가능합니다. 가장 먼저 예언은 ‘과정의 합리성’이 있어야 합니다. 일부 예언은 합리적인 면이 상실되면 그것은 예언으로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 신화나 혹은 우리의 우화들 그리고 성경들을 예로 들자면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조건이 없을 수 있겠지만 번개를 다스리는 ‘제우스’가 있고, 말하는 ‘미운 오리’가 있고, 또 전지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 인과관계는 달라지지만 그 과정의 합리성은 완성됩니다. 만약 합리성 없는 예언이라면 그것은 그저 주어가 없으니 사실이 아니라는 변명 같은 일이겠지요.

아무리 신화적인 이야기도 그 안에 합리성을 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말하는 미운 오리’가 있다면 태생적인 문제가 있는 자신에 대해서 통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것은 전혀 합리성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어’만 말을 하는 오리일뿐 그 과정 그리고 그곳에서 얻는 예언들 그리고 그 성취는 공감이 가는 교훈 혹은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이 합리성이 아예 없다면 그것은 예언의 규모도 될 수 없을 뿐이고 그 가치 또한 얻기 어렵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렸던 예언이 그 의미나 가치를 획득한 것은 식민지 상태의 이스라엘이 ‘상상할 수 있는 메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합리성 때문입니다.

 

15. 예언의 성립 조건 - 비합리성

  하지만 오히려 완벽한 논리의 조건과 추측은 예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제가 ‘나는 내일도 아침에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겠다.’라고 말하면 이것은 예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조건의 확률이 아주 높은 쪽에 대한 판단일 뿐입니다. 즉 현실 그 자체는 예언에 속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약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힘껏 발길질하는 아이의 태동을 보면서 축구선수를 보면서 체육인으로 키워 냈다면 그것은 ‘예언’이 될 수 있습니다.(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말이죠.)

  기독교의 메시아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메시아가 아무나 될 수 없기에 이것은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아예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비합리적인 면이 예언의 지위를 확립시켰고, 예수의 행적에 권위를 주는 것입니다.

신이 죽는 이 장면은 절대 비합리적이지만 그렇기에 신이 될 수 있다.


  예언에 대해서 이 두 가지만 생각해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둘을 모순 관계이라는 것 있습니다. 즉 예언은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함께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예언의 그 과정의 합리성을 그리고 현실과 너무 부합하면 안 되는 비합리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하기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이라는 존재는 모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합리성과 비합리성이 부딪치는 이 상황에서 예언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 모순관계에서 예언이 그 위상을 유지하는 데에는 사람들의 한자기 독특한 습성이 있습니다.

   

16. 모순과 상관없는 예언? - 인지 부조화 이론

  하지만 보통 예언이라고 하면 느끼는 것은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그 능력이 나온다 합니다. 이는 예언이 성립이라는 것을 갖추었을 때 힘은 얻는다고 오해하는 것 입니다. 하지만 성립을 하는 것이 목적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예언의 조건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성립이란 조건이 없이도 예언은 그 위상을 잃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성립이 없는 예언’이라고 하면 ‘신성 모독’이라고 할 것 같은 예상에 한 가지 심리학 이론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지 부조화 이론’입니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사람들이 어떠한 태도들이 또는 태도와 행동이 서로 모순인 관계를 갖게 될 때, 사람들이 그 태도에 대해서 반성하기 보다는 그 태도를 유지하게 되는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그 원인은 일관성이 깨지는 것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바로 종말론자입니다.

사람의 인지 않에 모순 혹은 부조화가 생기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2000년 밀레니엄이라는 ‘산술’적인 모델 앞에서 많은 이들은 종말을 논했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종교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산술적인 장난은 신이 될 수 없었고 이에 많은 이들이 종말론 자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은 무엇이었을까요? 반성 보다는 자신들의 말들을 위해 행동합니다. 완벽한 부조화입니다. 그 실체나 판단보다는 먼저 경험했던 행동이나 그 태도가 바로 그들의 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들은 합리성을 버리고 비합리성만을 갖은 예언을 따라가는 것이죠.

  그들은 예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순적이 부조화라도 말입니다. 즉, 예언이란 것은 부조화 혹은 실현과는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혹은 그것이 더 강할 수도 있습니다. 실현된 예언은 검증이라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처럼.

   

17. 모순이 완성하는 예언 - 2012년 또 다른 종말론을 맞이하며

  2012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은 또 다른 예언들이 넘쳐날 듯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마야인 들의 달력 덕분이죠. 이는 합리적인 마야의 계산법에 비합리적인 종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예언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개인의 몫입니다. 혹은 이루어지지 않은 종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조화이론의 실천을 통해 계속 믿는 것 역시 개인의 것입니다.

2012년 종말을 이야기 하는 영화 '2012'


  다시 말해 예언과 성립은 상당히 중요한 합리적 고리이지만, 그것이 성립이 되지 않는 모순을 겪더라도 사람은 그 예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모순이 더 깊은 믿음과 행동의 근거가 됩니다.

  즉 이런 인간의 부조화적인 심리적 방향성이 합리성과 비합리성이라는 두 가지 모순으로 만들어지는 예언을 더 강하게 완성시킵니다. 또 그 예언은 우리가 이전 글까지 언급한 대로 선택에 가장 중요한 기저가 됩니다.

  이슬람종교가 여타 종교보다 더 많이 소유한 규제 및 행동 규약 들은 사실상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무신론자들이 보기에는 기독교인이나 불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 모순적인 행동의 근원은 비합리적이라도 어떤 하나의 ‘예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언’의 비중이 높은 종교가 더 큰 충성심을 보이곤 합니다. 그리고 이 충성심은 행동에 대해서 더 강한 선택을 유도하게 합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입니다.(르네마그리트 )

  따라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언은 인지적인 조화이든 인지적 부조화든 혹은 성립이든 그것이 아니든 예언은 선택을 종용합니다.

 




어쩜 후광효과부터 피그말리온 효과는 예언을 바라는 일종의 본능 같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선택을 꿈꾸는 이 글의 목적을 되새겨 보면 이 본능에 대해서 더 살펴보면 어느정도 자율적인 선택을 꿈꾸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희망적 생각[각주:1]을 첨부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얼마나 예언에 밀접해 있을지가 가장 먼저드는 고민입니다. 삶의 모든 시간에 대한 것은 이미 오랜시간 혹은 그 전에 결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바랍니다. 지금 이 의문과 넋두리는 종교적인 어떤 부분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선택이 예언에 종속되는 기본적인 매커니즘이 중요합니다.

즉 종교적 의미의 예언보다는 지금 우리에게 끼치고 있는 비종교적 예언과 선택의 매커니즘에 집중 되어야 합니다.


11. 예언을 원하는 기본적인 본능, 뇌바보

먼저 우리가 예언을 원하는 기초적인 본능은 어디서 나올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정말 그 기초를 잡았다면 저는 지금 스위스에서 상 받을 준비를 하고 있겠죠? 최근에 우연히 어떤 기사를 하나 읽었습니다. 제가 보는 신문은 아닙니다만 SNS의 힘으로 접하게 된 것이요. 바로 '뇌바보'입니다.[각주:2]

이 '뇌바보'는 말 그대로 뇌가 바보라는 것에 대한 것으로 이에 대한 언급은 간단한 행동으로 설명 합니다. 이 글의 저자가 강연할 시에 한 학생을 일으켜 세워놓고 이런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라고 공지 한 뒤에 "당신은 능력이 있으며~"라고 말합니다. 즉 거짓말이라고 하고 나서 세상의 온갖 칭찬을 다하는 거죠. 결론은요? 아시겠지만 거짓말을 들은 그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 더 정확히 말해서 뇌가 기분 좋아 집니다. 개인적으로 이 사실을 접한 저는 너무나 신기해 보였습니다. 바보처럼 말입니다.


뭐 그냥.. 뭐... (출처 : 뉴스뱅크이미지)


그리고 이어지는 근거 실험에 대한 설명은 더욱더 흥미를 끌었습니다. 실험은 1995년의 실행된 실험으로 뉴욕대학에서 실시된 심리학 실험입니다. 7.5m의 통로를 지나가는 실험인데, 젊은이를 대상으로 했습니다. 결론은 평균 7.3초. 이 실험은 심리학 실험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집단입니다. 이 집단은 통로를 걷기 전에 노인에 대한 문제를 풀었고 통로를 지난 시간은 앞 선 집단의 평균보다 1초 이상 웃돌았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은 두 집단이 있는데 한 집단에게는(줄여서 무례집단) '무례하다. 침입하다.  공격적이다' 같은 단어를 한 집단에게는(줄여서 예의집단) '예의바르다. 정숙하다. 양보하다.'의 단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다음 실험을 받게 한다며 다른 장소로 이동시킵니다. 실험은 여기서 시작되는데, 앞 선 두 사람이 이런 저런 문답을 계속 이어나가고 피실험자는 그들을 기다립니다. 결론이 예측되시죠? 무례집단은 5분 정도 안에 끼어들어 대화를 시도하고 예의집단은 10분 이상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뇌는 정보에 무기력한 바보입니다.



'노인이란 단어', '무례한 단어', '예의바른 단어'가 대체 무슨 일을 꾸민 것일까요? 그것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몇 개의 단어가 뇌에게 직접적인 반응을 유도하게된 것입니다. 네. 본능적으로 받아들인 예언입니다. 우리의 뇌는 이미 그냥 지나가는 몇 개의 단어에 사로잡혔습니다.


12. 바보가 하는 선택? - 뇌바보와 사이비 종교

바보인 뇌는 몇 개의 정보를 실재적인 자신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성격 마저 지나가는 몇개의 흘러가는 정보를 통해 형성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는 교육적 의미로 엄청난 현실입니다.[각주:3] 우리가 주변의 상황에 오류를 범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우리 자체가 상황, 혹은 작은 예언들을 따를 수 밖에 없는 본능이란 것입니다.

최근의 시사 고발 TV에 한 수련원을 보게 되면 이런 본능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종교적 행사중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하는 데 이 고백이 정말 판타스틱합니다. '수련원의 돈 3억을 횡령했다.'부터 시작해서 '도둑질을 했다.', '원장을 살해하려 했다.' 등[각주:4]의 말은 반복적으로 듣고 반복적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결론은 예상하는 그대로 입니다.

H수련원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들은 그 3억을 갚기 위해서 수련원에 돈을 내고 기부를 하며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충성합니다.

그들이 과연 멍청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또 기독교를 근간으로 한 종교인은 집단 최면과 흥분 상태를 이용한 것으로 그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메시아의 통로라는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을 모으고 그 뒷면에서는 수많은 성적 도착증을 보인 이야기도 나옵니다. 당했던 사람들을 모아보면 극히 정상적이고 혹은 더 존경을 받는 위치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있다면 절대로 이 교주같은 목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합니다. 실재로 녹회된 영상에는
아방가르드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비상식적 결과를 도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상식 그 이상입니다. - '그것이 알고싶다' 스틸컷



사람은 들어오는 정보가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더라도 그 안에 '정보[각주:5]에 대한 믿음'이라면 어떤 논리적 설명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쩜 뇌바보에서 부터 나오는 인간의 수동적 선택의 본능일 것입니다. 이런 본능의 인간은 천성적으로 선택에 대해서 수동적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에게 '자유러운 선택'이란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13. 예언과 선택

선택을 사로잡기 위해서 예언을 언급했습니다.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우리가 선택을 하는 일에 대한 것을 약간 이나만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예언을 언급할 것 입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는 어쩌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반(反)자유'이고 나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일 수 도 있습니다. 이에 비관적으로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어 라고 말 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제가 '선택'을 계속 궁지에 밀어 넣은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근거가 없는 의미 있는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의미 있는' 선택이란 단어의 정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린 올바른 선택을 하기에 앞서 올바른 근거를 찾아야 하고, 그 올바른 근거를 찾기 위해 예언을 찾았습니다. 꼭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내용이 아니라도 예언은 개인에게 존재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예언의 기원을 찾다보면 분명 선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것입니다.



물론 언급한 '예언'은 사전적 단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포괄적인 것입니다. 어떤 선택과 판단의 근거가 되는 그 이전에 선택된 것으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선택에 강요되는 부분을 지칭하는 단어로 썼습니다. 이런 예언이 없이 우리가 판단할 구석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과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홀로했다고'믿는' 선택보다는 그 근거 다시 말해서 선택 이면의 예언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뇌바보에서 보는 것 처럼 '예언'이 근사하고 화려하게 생겨나고 방대한 정보의 것만이 아니라 단지 나도 모르게 스쳐지나가는 혹은 집중하지 않았던 어떤 것들 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엑스칼리버 처럼 몇 백년을 이어나가는 예언도 분명 존재하나 오늘 아침에 나온 아침 식사 또한 예언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침식사의 짧읜 메뉴가 당신에게 예언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조금더 예언을 자세히 그리고 조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그 예언은 어디서 오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을 다음 글에 해볼 고민으로 남기겠습니다.

  1. 혹은 예언 [본문으로]
  2. 중앙일보 - http://bit.ly/ohDVrY [본문으로]
  3. 교육적인 면은 다른 주제로 다룰 예정입니다. [본문으로]
  4. 더 수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19금이라 생략합니다. [본문으로]
  5. 그들에게 주어진 특정 예언 [본문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또한 그 가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임을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사실 당연한 것이죠. 그래서 인생은 다분히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라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마음에 먹은 대로 살게 된다.”고 영화에서 그리고 새 책에서 또는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느끼는 삶의 방향은 어떤가 묻고 싶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관여하는지 혹은 자기가 가는 방향이 정확한지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힙니다. 이것은 고민할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많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보통 희망적 인생관은 '현실'이라는 숫돌에 갈려나가는 순간 비극적으로 바뀌고는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희극’보다는 ‘비극’이 남아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1. 우리가 우리의 삶을 선택하는가? - 동조현상 -

 우리나라의 기분 좋은 특성은 아니지만 한번쯤 언급할 가치가 있는 성향이 있습니다. 2002년 시청 광장에 붉은 물결을 띄웠고 같은 해 같은 장소를 촛불로 채운 과거의 성격이며 2002년 이후에 계속되는 K-리그의 침체와 미군과의 충돌에 무지한 현재의 성격입니다. 좋은 말로 하자면 단결력이며 나쁘게 말하자면 일면 냄비 근성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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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윤호상, 김철민이란 사람의 대학가에서 개그 공연입니다. 현재 제가 알리기로는 17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학로 등 거리에서 개그 공연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을 홍보하려는 것은 아니고 어렴풋이 남아있는 그들의 개그 한마디 입니다. “~~~~(각 나라의 웃음에 대해 설명 중) 한국 사람들은 언제 웃는 지 알아?” “(관중들).....” “다른 사람이 웃어야 웃어~ㅋㅋ” 이 말을 하고 나서 개그 2인조가 깔깔대고 웃었고, 그다음에 사람들이 웃고 그 다음에 제가 웃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아주 멋지게 정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애쉬(Solomon Asch)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격과 비슷한 심리를 실험을 통해 제시하였는데, 실험의 내용은 원탁 위에 7~9명의 사람들을 둘러앉게 한 뒤 다음 그림과 같은 문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 다음 중 같은 길이의 막대는?>

당신의 눈에는 X와 같은 막대는 어떤 것인가?

 

 답은 무엇일까요? 이 실험의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모든 사람이 “A”라고 답하였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만약 실험이 이대로만 진행된 것이라면 아마 이 실험은 단지 착시현상에 대해서 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의 장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답변자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사람은 피실험자가 아닌 이번 실험의 스태프 즉 이 실험에서 정말로 실험 당하는 사람은 원탁에서 마지막 답변을 할 1人이였다는 것입니다. 그 들이 먼저 제시한 결과는 “A”였습니다. 만약 "A"가 당신과 생각이 같았다면 당신은 이 실험에 당한 것입니다. 왜냐면 당신이 눈이 보는 것처럼 답은 “B”이기 때문입니다.[각주:1]

 이 외로운 피실험자는 후에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되묻자 처음엔 자신의 눈과 뇌에서 “B”가 답임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이 모두 "A"를 부르자, 자신의 눈이 틀렸다고 생각해 같은 답을 이야기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런 말이 빠질 수 없습니다. “왜?”
 
 이런 현상은 동조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실험이라면 더 다양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약 3~5명이면 충분히 길거리에서도 가능한데, 3~5명이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하늘을 응시하면서 신기한 표정을 지어보면 됩니다. 그럼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 중에 무의식적으로 같은 곳을 응시하는 사람이 생기는데, 이중에 더 재미있는 일은 가끔 무엇이 신기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신기한 표정을 내비치는 사람들도 생긴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다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판단하는 대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정말 확실한 것인가요? 나는 삶의 선택 혹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부정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하는 것의 어떤 부분은 나의 선택과 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자신을 소유함에 대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에 희극을 쓸 수 있을까요?

 이런 말엔 이런 반박이 예상가능합니다. "그 동조는 상황에 대한 자신의 선택이라 말할 수도 있다."라고 말입니다. 즉 답을 알고 있지만 체면상 혹은 분위기상 그리 선택했던 자신의 판단 이였다고 말입니다. 그럼 다음 에쉬의 또 다른 실험을 다시 주목해 봅시다.


2. 자신의 판단은 늘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되는가? - 인상 실험 -

 이번엔 피실험자 누구를 속이는 실험이 아니라 10명 전원이 피실험자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먼저 가상에 인물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하는데, 한 집단에게는 긍정적인 단어 제시 후 부정적 단어를, 한 집단에는 반대로 부정적 단어 제시 후 긍정적 단어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피실험자에게 그 가상의 인물에 대해서 평가해보도록 하죠.

같은 단어의 조합이지만 순서에 따라 평가가 다르다.



 분명 똑같은 단어들을 제시하였으나, 긍정적인 단어를 먼저 들은 A 그룹에서 이 가상의 인물에 대하 평가가 더 좋게(긍정적으로) 나왔습니다. 같은 설명인데도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판단하는 판단요소가 어쩜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단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의 순서만 뒤바뀌어도 다른 판단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원인은 바로 처음 들은 단어가 선행 이미지로 굳어져 따라 나오는 이미지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즉 긍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제시한 그룹은 처음으로 좋은 이미지를 갖은 상태(인상)를 갖추고 나중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이미 들어있는 긍정적인 이미지에 희석시키면서 전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현상을 이용하려는 듯 오늘 아침의 보험 광고에서도 좋은 말만 떠들다가 마지막에 아주 적당한 글씨와 속도로 독소조항을 읽어버리죠.

  결론적으로 '가난해서 빵을 훔친 장발장'은 구제 받을 수 있으나, '빵을 훔친 가난한 장발장'은 감옥으로 가야 합니다. 이게 ‘세상’이란다 발장아.

가난해서 빵을 훔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낫다.




3. 당신은 당신의 주변에 대해서 선택 가능한가?
 
 당신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의 정보에 무기력하게 반응하고 굴복하고 맙니다. 그러면 가장 처음에 이야기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질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선택 가능한 존재'인가?

정말 신은 당신에게 선택에 대한 자유의지를 준것이 확실한가?


  저 또한 무엇보다 자유를 선택하고 싶다만 정말 그런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위의 아주 작은 두가지의 실험만으로 선택의 가능성을 판단한다면 성급한 일반화 일 것 입니다. 또한 이렇게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위의 실험은 
당연히 이미지가 굳어지는 상황 속 이였고 피실험자가 그런 이미지에 대해서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과연 당신은 선택가능 한가?



 즉 단지 인상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사람이라면 갖는 당연한 오류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은 이미지에 대해서만 오류를 범한 것이고 그 후의 판단은 자신이 하는 것이라는... 분명 그런면은 존재 합니다. 그럼 그 부분을 인정하더라도 아직 우리가 자신을 선택하는 지에 대해서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그럼 이제 방향을 바꾸어봅시다. 과연 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다 안다 할 때 과연 자신이 원하는 것은 선택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오류의 방향이 남이 던져준 정보 였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잘못 판단하게 되는 자신이였는지에 대해 다음글로 잠시 미루어 보겠습니다.
  1. 사실 나는 당신에게 약간의 거짓말을 했습니다. 마지막 1人의 답이 오답인 사람은 전체 실험의 1/3이였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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