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교사에서 복직 교사로 지내다 보니 어느새 블로그에 손을 놓은 지 몇 달이 되었다. 사실 살짝 불안감이 드는 이유는 뭘까? 왠지 3월의 다짐 4월의 포기를 반복하는 나의 학창 시절의 반영을 그대로 실현하는 건 아닌지. 분명 내가 손때를 묻힌 수학책의 대부분은 집합과 명제였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반복적인 포기에 반항하기 위해 3월의 학교 폭풍 속에 조용히 키보드 질을 시작해본다.

 
1.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이전 글에서 완벽한 진리를 말하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요상한 진실에 직면했다. 만약 진리란 것을 유토피아에 비유해보자면,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는 적어도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닌 무언가 존재해야 한다. 어떤 유토피아 속의 자신을 상상하든, 꿈에 부푼 자신을 떠받들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종(혹은 하인 혹은 도우미)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렇게 우리는 완벽함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덜 완벽함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언제나 진리의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수학에서 그 희생양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그 문제는 다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공리로 도망치는 일이다. 공리를 세우고 그 위에 수학을 한층 쌓아가는 일. 그 공리만 인정된다면 완벽한 논리를 향할 기분 좋은 진격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은 저번 글 막바지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연역적 명제는 전체의 축소만을 가져온다.[각주:1] 즉 말만 다를 뿐 우리가 원래 인정했던 것을 다시 확인하는 식이다. 명제를 확장하겠다고 공리‘만’을 확장한다면 그것은 점집에서 점술가가 던진 한마디를 자기 맘대로 해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각주:2]

연역적 진실은 작아질 수 밖에 없다.



 "히키코모리"라 불리는 자들에 대해서 혹시 들어보았는가? 우리나라 말로는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며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방에 갇혀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사실 연역적인 사고로만 명제를 키워간다면 그 끝은 히키코모리랑 유사 할 것이다. 자신만의 방에서 자신만의 만족을 갖고 사는. 수학도 마찬가지 이다. 연역만을 강조하는 진리는 결국에는 어느 부분에서 종점을 맞이 할 수 밖에 없다. 혹은 그 극한[각주:3]이 수렴한다 하더라도, 그 크기는 우리가 이미 정해놓은 대명제(맨 처음 명제)를 벗어날 수 없다. 결국 히키코모리와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기에 진리를 찾는 사고 방향을 더 키워야하는 것이다.

히키코모리들은 결국 자신의 틀에 갖히게 된 것이다. 진리도 이럴 수 있다.




2. 약한 진리에 대하여.

 이와 비슷한 논쟁을 과학에서 가져와 보고 싶다. 바로 아인슈타인과 보어-아인슈타인 논쟁이다. 이 둘은 양자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예측 가능한 양자역학을, 보어는 코펜하겐 해석[각주:4]을 통해 예측 불가능한 양자역학 모델을 선보였다. 이 와중 유명해진 아인슈타인의 말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란 명언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해석과 사고 실험[각주:5]들을 통하면서 명언은 지금까지 남았지만 아쉽게도 보어의 모델이 진리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즉, “예측 불가능”유일한 예측 가능한 변수인 것이다.

 이를 수학에서 다시 보자면 이제 우리는 ‘예측 가능한 진리’이란 편견에서 잠시 물러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덜' 진실하지만 '충분히' 진실하다고 말할 것들은 무엇일까?  또한 우리는 그것을 어찌 성립하는지 확신하는 것일까? 그 고민에 집합에서 잠시 다루었던 하나의 개념을 다시 들어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들어온 것은 그것은 바로 바로 퍼지집합이다.

양자의 예측 불가능을 수학에 적용해 보자.



 퍼지집합이란 어느 집합에 속하는 정도를 확률적인 시각으로 표시 한 것으로 0과 1이라는 선택을 (참고로 0은 절대적인 거짓, 1은 절대적 참을 의미한다.)  0<=x<=1이라는 것으로 확장시킨 모델이다. 자세한 설명은 링크로 대신한다. (이전 글 링크)

 '포함된다(=1), 포함되지 않는다.(=0)'란 선택에서 좀 더 확장된 기회를 제공한다면 우리가 편협했던 명제 관계를 좀 더 넓힐 수 있겠다. 즉, 포함관계라는 인과관계에서 다 이루지 못하는 진리를 이루는 하나의 가능성 약한 포함관계인 퍼지집합을 통해서 명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퍼지 논리에 대해서 나는 대학교 이상의 수준을 기록하려고 하진 않을 예정이다. 나도 그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펼칠 능력자는 아닐 뿐더러 오해의 소지를 더 만들 가능성이 있기에 기본적인 내용은 위키 링크로 대신한다.(그 내용은 위의 퍼지집합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판단하는 명제를 보어의 양자역학과 비슷한 확률적인 개념으로 접근하여 이전에 판단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수량화하고 논리화 하여 그 체계를 구성하는 일이다. 즉, 생각하면 다 이루어지는 100% 완벽한 유토피아는 어려우니 내가 조금 귀찮더라도 걷거나 말하거나 하는 99%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이다.

진정한 유토피아에는 불완전함이 섞일 수 밖에 없다.



3. 퍼지 논리가 가리키는 진리는?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논할 중요한 한 가지가 아직 남았다.  '수량화된 진리'가 갖는 의미이다.  이 부분에서 오해할 여지를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오해의 가장 큰 정점은 바로 ‘진리의 줄 세우기’가 가능한지의 여부이다.

 만약 '0.99 진리'와 '0.01 진리' 사이에서 우리가 '0.99 진리'이 더 무거운 진리일지 생각해보자. 그렇다고 단정한다면 이 이야기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예수도 석가도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이론들을 퍼지 논리 점수를 통해 '수량화'한다면 아주 후하게 주어도 '0.01 진리 주의자'이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생각하는 '진실한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 이런 나의 말에 동의 할 것인가? 사실 이 사실은 나도 동의하기가 어렵다.

 더 자세한 예를 들자면 어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퍼지 논리 적으로 보았을 때, 얼마나 점수는 몇 점일까? 하지만 모두가 그 말에 감동하지 않는가. 이런 모순의 원인은 '수량화'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수량화’가 그 명제를 진실 되게 만들 수 있을까? (사실 여의도 기독교는 그럴 수도 있다. 0.99 진실의 법칙으로 일본은 분명 쓰나미를 원수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 했으니.[각주:6]) 하지만 일반적인 기본 교육을 통한 사람이라면 예수의 '0.01' 진실에 손을 들어줄 것이다.

 다시 말해 '수량화'는 '의미'를 대표하진 않는다.

이런 수량화로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은 완전한 넌센스다.




4. 수량화에 빠진 진리 구하기

 그렇다고 지금까지 수고했던 수량화된 진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결론짓는다면 그 또한 극단적인 선택일 것이다. 그렇다면 '수량화된 진실'이란 것에 다시 의미부여를 해봐야 한다. 이런 의미부여는 우리가 '수량화'를 선택했던 수단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 수단은 바로 '확률적'과 구별[각주:7]된다. 다시 말해서 0.51은 0.49이라 할 때, 우리가 좀 더 쉽게 이야기 하는 51%가 49%보다 2% 더 진실이 될 확률이 있다.”란 것이 아니라 2% 정도 더 보편적인 선택을 받는”진실이란 말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명제는 참/거짓에서 한 단계 더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51%와 49% 양립할 수 없는 명제라 할지라도 진리로 동시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0.01 진실'이란 것은 우리가 1%의 확률 빈도로 선택한다는 것.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독배’와 예수의 ‘원수 사랑하기’는 참으로 소수만이 선택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들을 성인이라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리 확률적으로 이를 정의해 보려 해도 ‘수량화’가 진실이라는 벽을 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다. 이런 면에서는 왠지 데카르트적인 절대적인 진실은 사라지고 푸코가 말하는 특정 법칙이나 관계에 의한 진실[각주:8]이 수학의 표면으로 자리 잡는 듯하다.

완벽한 형태가 아닌 관계가 말해주는 진리



5. 진실이란. 명제 파트를 마치며

 집합을 거쳐 명제에 대한 글을 써보면 진실이라는 것의 이중성이 보인다. 분명 어떤 흐름을 보여야하지만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이라는 것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진실이란 것은 어떤 절대적인 흐름을 바라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포함과 불 포함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부터 시작해서 집합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명제를 이야기 했다. 그들 사이에는 정확한 연결고리를 통해서 내가 알고 싶은 결과를 배출해낸다. 이런 고리를 절대로 끊을 수 없게 단단히 묶어 진실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연역을 통해서 보았다. 하지만 연역의 결정적인 문제는 고리는 온전하다 그 고리의 시작이 어딘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떤 '진실'이라는 것의 심각한 오류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한발 물러나, 절대성을 버리기로 한다. 즉 상대성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인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하여 '진실'이란 것을 '아무것도 아닌'것과 동일시하는 것 또한 피하도록 하자. 자신이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또 어떤 다른 것이든 지적 생물체(인간)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버리면 '진실'이란 호칭을 부여하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생겨버린다. 수치화된 점은 그저 그 명제의 빈도 혹은 확률로 제한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하려니 '진실'을 정의하는 일은 점차 미궁으로 빠질 수 밖에.

 그렇다면 진실이 피해야 할 그 곳은 어디일까? 자만하고 고집스럽지도 않으면서 적절히 의미화가 되는 그곳은 어디일까?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는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젠 '수치적 진실'이나 논리적 진실' 따위는 수학에서 찾을 수 는 없을 듯하다.[footnote][/footnote]

 하지만 수학 외적인 곳에서는 어느 정도 해답이 있지 않을 까 한다. 우리가 부르는 '공감'같은 단어에서 말이다. 하지만 '공감'만으로는 우리의 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실수를 포함해서는 안 되니, 나는 '조심스런 공감'정도로 마무리 짓고 싶다.
 

'조심스러운 공감'을 갖던 지난 날을 위해서~



  1. 그림과 같이 집합론 적으로 생각했을 때 명제의 진행에 따른 진리의 축소는 피할 수 없다. [본문으로]
  2. 그렇다고 해서 공리를 기반으로 한 수학이 의미 없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시 한다. [본문으로]
  3. 그 극한이 수렴하지 않고 진동 발산한다 하여도 결과는 변화지 않는다. [본문으로]
  4. 훌륭한 네이버 캐스트를 링크한다. http://navercast.naver.com/science/physics/1961 [본문으로]
  5. 어떤 실험을 제시하더라도 측정이나 도구의 불완전성에 의해서 보어의 승리가 확정될 수 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6. 여의도 기독교에 대해서 욕할 생각은 없으니 이번 발언은 분명 비판 받을 여지가 있다. [본문으로]
  7. 의미상의 구별이다. 일단 퍼지 집합을 구하는 과정에서 확률은 빠질 수가 없다. [본문으로]
  8. 그가 말하는 상대적인 진리를 어쩜 보어의 양자이론 혹은 퍼지 논리의 이론과 일맥상통한다 볼 수 있다. [본문으로]


결론 부터 밴다이어그램이란 벤(John Venn)이란 사람이 만든
집합에 대한 2차원 기하학 모델로
추상적이였던 집합을 모든 이의 수학으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현재 우리가 낮은 학년에서도
집합을 이해하고 계산해낼 줄 안다는 것은
이 밴다이어그램이 머리속에 그려지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림 같이 집합 A라는 것을
하나의 원(또는 도형)으로 그린다음에 A의 원소는 그 도형 안에
원소가 아닌 것은 도형 밖에 그립니다.

다시 말해 그림에서는 a는 A의 원소이고
b는 A의 원소가 아닙니다.
지도보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이런게 뭐 당연하다고 생각 할 수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영역을 그리고 그 안에 그에 관련된 것을 넣는 사고가 쉽사리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뜻이죠.

특히 그 당시 집합론은 너무나 추상적이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던
칸토어의 집합론에 대해서 직관적인 이해를 도왔습니다.

정확히 1880년 [명제와 추론의 도식적, 역학적 표현에 관하여]라는 논문에 거재하였는데
사실 벤이전에도 이런 그림을 이용한 것은 있었으나(ex. 지도, 분류)
논리적이고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한 것은 벤이 최초입니다.

집합론의 원소와 집합과의 관계만을 이야기 한다고 생각하면
코끼리의 다리만 만지작 거리는 장님과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집합론의 논쟁거리에 대해서 설명했었는데(무한의 세계, 연속체공리, 러셀의 역리 등)
하지만 집합론의 중요한 한 면목은 바로 논리체계의 적립입니다.
(이 때문에 모든 고등수학과정의 처음은 집합론이죠.)

그런데 바로 이 논리적인 공간에 벤다이어그램이라는 새로운 도구는
너무 엄밀하고 객관적이였던 수학을 직관적이고 이해가능한 도식으로 바꾸어 준것입니다.


---------------기본적이 벤다이어그램의 모양----------------



1. 집합이 하나인 경우 : 밴다이어그램에서의 원소의 포함여부에 관한 경우로 많이 쓰입니다.


뭐 이 경우는 아까 위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지만 원소의 포함관계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전체집합까지 따지자면 여집합등도 표현되고
영역의 수는 1개이고 전체집합까지 그린다면 2개입니다.



2. 집합이 2개일 경우 : 이 경우는 우리가 가장 많이 봐온 경우입니다.


가장 쉽게 생각하는 벤다이어 모양이고
여기서 합집합 교집합 차집합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집합까지 그렸을 경우에 우리가 좌절을 많이 했던 드모르간 법칙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밴다이어그램의 큰 이점 중 하나가 증명의 간편함입니다.)

또한 전체 영역의 수가 3개인데
전체집합까지 포함하면 하나의 영역이 더 생겨 4개가 됩니다.


3. 집합이 3개일 경우 : 수능에서 가장 많이 보는 밴다이어 그램이죠.


여기서 부터는 점점 복잡해보이기도 하는데 어려운 것은 없고
찬찬히 둘러보면은 그 영역의 의미가 보입니다.
그리고 영역의 수를 살펴보면 7개이고
전체집합까지 그리면 하나추가해서 8개가 되는데

1~3번의 과정을 보았을 때 대충 눈치를 채셨겠지만
밴다이어그램을 영역의 수로 보자면
전체집합까지 따졌을 때 집합의 개수 만큼 2를 제곱한 수가 됩니다.

1개  /   2            = 2
2개  /   2 X 2      = 4
3개  /   2 X 2 X 2 = 8

여기에 전체집합이 없다면 하나씩 빼주면 됩니다.

---------------집합 4개의 벤다이어그램의 모양----------------

만약에 집합이 4개라면?
전체집합 포함해서 2 X 2 X 2 X 2 =16의 영역이 나오는 것을 확인해보겠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4개 이상 집합의 밴다이어 그램을 본적이 없을 것 입니다.
나도 공부나 찾아봐서 알게 되었지 자연스럽게 접한적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실 모든개수에서 벤다이어그램을 그릴 수 있다고 알려져있는데
잘 그리지 않는 이유는 아래 그림을 보면 됩니다.

밴다이어 그램이 오히려 직관으로 판단하기에는 약간 난해해집니다.

자 아래의 그림이 4개일 때의 밴다이어그램입니다.


우리가 알던 A,B,C의 밴다이어 그램에 길게 늘어진 D라는 밴다이어 그램이 나왔고
한명 영역을 세어보면 전체 영역의 개수는 15개이며 전체집합 포함이면 16개가 됩니다.
(사실 하나의 집합이 늘때마다 영역이 2개의 영역이 쪼개진다 생각하면 더 이해가 됩니다.)



이렇게 보다보면 5개의 집합은
사실 모르는게 약일 수도 있겠습니다.

------------------------------------------------------------------------------

벤다이어그램은 역시 "추상의 구체화" 혹은 "논리의 직관화"에 초점을 둡니다.
이는 복잡한 상황속에서 이런 도표를 이용해서 정리하고
논리 또한 그림으로 이해해 가면 오류를 줄여갈 수 가 있죠.

어찌보면 집합론의 논리주의적 사고와 집합론에 반대했던 직관주의적 사고의
중간정도의 위치를 차치하는 조금 흥미로운 부분으로 볼 수 있고
어떻게 보면 화해의 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벤이란 사람은 수학자가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학으로 보자는 문외한 사람의 작은 아이디어가
논리의 가장 깊은 집합론에 스며들었다는 것은 직관의 중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는 대목입니다.

<~ 이전



우리는 삶을 살면서 우리도 모르게 진실이라 믿는 사는게 너무 많습니다.

기독교에게 여호와, 불교자에게 석가모니..
또는 누구에게는 로봇물고기

대부분 그렇지만 그 믿음을

한번 증명해 보라고 하면 믿음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보통 신성모독으로 종교재판에
혹은 국보법위반으로 안보부에 끌려갈지 모르는 일이죠.

여튼 어쩔수 없이

믿음에 대한 증명은 항상 어느 벽에 부딛치고 맙니다.
기억해보면.
교사인 저도, 조카를 둔 삼촌들도 가장 무섭고도 어려운 질문이

"왜?" 입니다.


---------------------불완전함을 찾는 일--------------------


한 주제에 대해서 딱 10번만 왜?라는 질문을 받아보면
어느 순간 오른쪽 어깨 2두와 3두 근육의 수축을 느끼게되죠.
하여튼 질문을 받다보면 결국엔
"그것은 그냥 믿으면 되는 거야"
라고 대충 이렇게 얼버부리고는 맙니다.


축구를 예를 들어보면
"왜 골을 많이 넣으면 이기는 것입니까?"

"야구는 왜에 2루를 밟기 전에 1루를 밟아야 합니까?"

라고 물으면,

이런것들은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 못할 뿐만 아니라
자꾸 물어보면 화까지 유발합니다.


----------------------  공   리  --------------------------


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덧셈과 곱셈으로 자연수의 체계를 가지고 완벽한 체계를 만들어도
결국 증명 못하는 것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왜 1+1이 양수일까요?"(페아노 공리-클릭)
라고 물어본다면 참으로 난감합니다.

하지만 물어본 사람이 충분히 난감할 만큰 이야기할 수는 있겠죠.


이런 질문을 위한 수학의 마지막 보루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공리"라고 합니다.



 공리란 체계안에서 증명없이 참이라고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양수 더하기 양수는 왜 양수인가요?란 질문은,
"자연수의 페아노 공리에서 우리는 참으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라고 하며 더이상 더 깊게 들어가는 길을 막는 것입니다.

뭐 그렇다고 아무거나 공리로 붙이면 좋지않습니다.
공리가 생길수록 공리끼리의 무모순을 보여야 하며
결정적으로 너무 공리가 많으면 예쁘지(?)않습니다.

-------------------------- 불완전한 수학? --------------------------


이런 이유에서 수학에서 불완전성이 생기게됩니다.
어떤 체계든 공리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 공리가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그게 증명가능한 명제라면 이미 공리라는 지위는 잃게 됩니다.)


여튼 공리가 없는 수 체계가 있을 까요?

결론 적으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에 관련된 정확한 이야기는
위대한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괴델이 답을 하겠습니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정리)!

제 1정리 : 산술적으로 참인 명제를 증명 할 수 있는 임의의 무모순인 계산가능한 가산 이론에 대해,
               참이지만 명제들 중에는 증명할 수 없는 산술적 명제를 구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산술적 이론은 무모순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다.

제 2정리 : 공리로부터 출발한 산술체계가 무모순인지의 여부 자체가 참 또는 거짓인지 결정할 수 없다.



그냥 읽어보면 참 어렵게 써놓았지만 풀어서 설명하면 크게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불완전성의 원리란 체계가 가장 깔끔하고 완벽한

즉, 무모순(모순과 무모순에 대한 설명 클릭)으로 어떤 산술체계를 만든다고 해도
결국엔 최소 하나인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 못할 명제가 나옵니다.


따라서 어떤 수학체계도

"100% 완벽하다."라고 하기 위해서는

1%라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존재합니다.


다시 말하면, 100% 완벽한 수학적 진리란 이제 없는 것이다.
그저 참인지 거짓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


그냥 그렇구나.. 할 수는 있겠지만

단순한 결과가 아닙니다.


결국엔 우리는 어떤 것이 절대적 가치라고 믿어도

다시 말하자면 절대적인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은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시대의 매체들이 매일 입에 달고 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수학적 원리가  여기서 나온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진리의 상대성은 그리스의 소피스트에서 부터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지만

진리의 절대성을 지지하던 수학이 갑자기 상대성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완벽하다고 믿은 모더니즘한 체계가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립니다.
이미 힐베르트등 많은 수학자 과학자 미학자가 추구했던
"완벽한 진리"란 증명불가능하며

어떤 하나의 체계에 대한 목표는 최소한 한 편의 비약을 포함해야한다는 것입니다.


---------------------- 유클리드 기하학의 패배 --------------------


가장 큰 예로는 바로
"유클리드 기하학의 참패"입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5개의 공리에서 출발했으며 서로 무모순이였고.
우리는 항상 이 5개는 진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불완전성의 원리에 따라서
증명도 못하고 반증도 못하는 하나를 살짝 틀어버리면 다른 세계가 펼쳐질 수 있습니다.


사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연역을 지지하는 수학적 기반이기 때문에

이 체계가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면 절대적인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다른 수학자들이 유클리드의 다섯 공리 중에 하나를 바꿉니다.
그것을 바로 평행공리라고 흔히 알고 있는  5번째 공리입니다.



유클리드 기하 5번 평행공리


"한직선과 직선 외의 한 점에 대하 한개의 평행선을 그을 수 있다.."



어찌보면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에 따라서
이 5번 공리는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평행선이 하나도 없는 경우(지표면)와

평행선이 여러개인 경우로 나누워 새로운 세계(우주)를 만듭니다.

나중에 다시 한번 이야기 하겠지만
이 3가지 체계가 전부 맞다고 할 수도 있으며 전부 틀리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3가지 체계가 전부 존재하는 경우가 많죠.)


-----------------------------너 무  길 어 서 요 약----------------------------


누가 물어본다..
지금 쓴 이 글들이 사실입니까??
그럼 괴델이 대답할 것입니다.

서로 무모순인 이야기이지만
참일 지 거짓 일 지에 대한 답은....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증명 불가이다.


한번쯤 의심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믿음이 맞는지 틀린지
하지만 결국 그답은 똑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