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게임 "진실만 말해라"


잠시동안 다분히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자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승에서의 생을 다하고 저승의 문턱에서 당심을 심판할 야수와 마주하고 있다고 하는데

나에게 영생과 영벌의 구별이 너무 어려워서 당신에게 기회를 주려합니다.




그 기회란 단 한번의 말로 완벽한 진실을 말하는 것 입니다.



당신을 원하는 야수가 진리에 굶주린 침을 흘리며 노려보고 있는 이 순간

자칫 이들에게 거짓을 고백하다 걸리게 되면 가차없이 돌이킬수 없는 곳으로 가게되는 상황이라면 

당신의 실수를 바라는 이 야수들에게 어떻게 진실을 이야기 할까요?


다시 말해 어떤 100% 진실을 이야기 할 것인가요?


이집트 신화의 명부의 신 오시리스. 심판의 시기에서 당신의 진실은?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실생활에서 아주 어렵다. 맘에 들지 않는 상사가 술자리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솔찍하게 말해달라고 한다하여 그 진실을 말하기는 너무 어려운 세상아닐까요?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혹은 우리의 말로써 진실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존재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당나귀귀를 외칠" 숲을 준다하더라도

정말 그 이야기가 진실일지 아닌지 판단하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럼 다시 돌아와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게 100% 진실임을 어찌 증명할 것일까요?


계속 되는 질문이 어지럽지만 이제 진실게임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


 참과 거짓이라는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명제를 도입했다.(이전링크) 보통 명제의 구조를 보자면



'(____ 1 ____)이면 (____ 2 ____)이다.'


란 꼴로 나옵니다.



이것을 풀어말하자면

"(1)이 참이라고 '가정'했을때, 과연 (2)가 참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1)번 자리를 가정, (2)번 자리를 결론이라 하고

그리고 간편하게(1) => (2) 라고 표현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떤 것을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 이 구조로 환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명제도 일단 구조로 환원할 수 있다. 문제는 증명이다.


이처럼 어떤 것의 진실을 이야기 할때 가정과 결론이라는 도구로 말하면 대부분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죠.

이렇게 말할 수 있어도 이것이 진실인것을 '증명'해 내야 하는 것 입이다.

그런데 이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예를들어, <그자식 진짜 개념 없다.>라고 한다면 'x=그 자식 => x는 개념없다.' 라고 고쳐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완벽하게 참이나 거짓이로 구별하기 어려운데, 위 예에서는 '개념 없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명제의 개념 - 링크)

그러니 당신이 진실이라고 이야기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만약 당신이 야수 앞에서 자신의 영원을 걸고 진실을 이야기 해야 한다면? 함부로 말하지 못할 진실입니다.


 그렇담 우리가 무엇이든 진실처럼 이야기 하더라도 그게 진실인지 증명할 수 없는 것일까요?



진실에서 100%진실을 뽑아내는 법


 아직 실망할 단계는 아닙니다. 진실이 뭔지 정확하게 말하고 싶을때, 혹은 어떤 상황에서 완벽한 진실을 말하고 싶을 때에 쓰는 방법들을 연역법이라 합니다.




연역법이란 : 이미 증명된 하나 또는 둘 이상의 명제를 전제로 하여 새로운 명제를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연역(演繹, deduction)이라하며, 이러한 연역적 추리의 방법과 절차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을 연역법이라 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백과사전은 조금 어려운 말로 써야 기분이 풀리나 봅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미 진실이라는 몇가지를 기초로 새로운 진실을 만드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단,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게 진행해서 진실을 뽑아 내야 하는데, 이 연역법의 방법이 한가지는 아닙니다.

위키 링크가 있으니 한번 구경하고 오셔도 좋습니다.(연역 링크)

그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삼단논법인데, 다시 위키를 링크하지만 아래쪽은 보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삼단논법 위키링크)

삼단논법을 이용한 여러 논리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게 딱 이거 하나로 모아집니다.


바로 부분집합입니다.


A ⊂ B이라고 해보면,

A의 모든 것들은 결국 B에 들어갑니다. 이때, 이런 명제를 만들면 참이 되는 것입니다.

[A라면 B이다.]란 것은 참이 되는 것이죠. 삼단논법은 이를 뿌리로 합니다.


삼단논법의 가장 흔한 예를 들어보면


모든 동물은 죽는다. 

쥐집단은 동물이다.

쥐집단은 죽는다


그림을 보면 그저 위의 이야기는 수학적으로 부분집합 이야기가 되는 것 입니다.


쥐의 집합 ⊂ 동물의 집합  ⊂ 죽는 것의 집합


포함관계를 이용해서 완벽한 참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죽는 다고 말하기엔 너무 슬프다.)

 그러니 당연하게

쥐집단 죽는 것의 집합이 되는데,

그 렇다는 것은 모든 새밝은 쥐집단은 죽는 것의 집합의 표함이란 뜻이므로, 결국 쥐집단은 죽는다란 결론과 같습니다. 이처럼 삼단논법의 기본방법은 우리가 집합에서 가장 편하게 썼던 부분집합의 다른 해석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이 죽고 쥐집단이 동물이라는 두가지 진실에서 새로운 진실, '쥐집단이 죽는다.'를 얻어낸것이다.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가정을 공집합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공집합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어서 어디에가도 부분집합이 됩니다.


다시말하기 위해 아래를 보면

[ø인 것은 모두 A이다]라고 해보자. 당연히 ø ⊂ A이므로 참이됩니다.



이제 진실인가?.... 진리의 합의?


 이제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 하는 법을 배웠기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을 하늘의 나라 앞의 야수에게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가장 좋은 진실 하나가 있다면 멋드러지게 그 부분집합 이용해서 진실을 말하고 즐거운 발걸음을 하려는데,


문제가 하나 생겨버립니다.

바로

불완전성의 원리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 클릭)입니다.

요약하면


정말 진실이라도, 아니 진실 같아도 그것이 완벽하게 증명될 수 없다.



앞의 남자가 뒤에 손가락을 꼬은 이유는?



 이게 무슨 날벼락일까요.

어떤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그 근본은 결국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런 것입니다.

부분집합을 설명하고 죽음을 설명하고 쥐가 죽는다는 것을 설명해도 결국엔 이상한 개념의 벽에 막히고

결국에는 잘 모른다는 0.1%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진실이 100% 증명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말 동물은 다 죽는 것인가? 하는 것 부터가 문제입니다.)


결국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서있고, 야수는 미소를 짓겠죠.


그렇습니다. 사실 어떤 것도 절대적이진 못하지만, 절대적인 위치를 갖어야하는 것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실에 합의를 합니다. (그것을 공리라고 한다.) 그 합의점이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물음표에서 벗어납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인정하는 논리의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공동체의 진리는 기초적으로 합의입니다.

죽음을 이야기 할 때, 이전에 우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음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단지 내가 나로써 합의한 공리인 것이죠.

나와 나의 생각의 공동체는 살아있음을 합의하고 내 존재가 죽음에 이른다는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의 없는 진실이 없습니다.



축구 경기도 하나의 합의로 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또 다른 약점이 있다면, 진리를 더이상 넓힐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분집합, 즉 연역으로 만들어낸 진실은 이미 합의 된 진실에 이미 일부였다는 것이죠.

결국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다.


결국엔 지금까지의 노력이란 것은 결국엔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을 다시 써 놓은 것 뿐이라는 것이거나, 가정을 공집합을 두어서 별 쓸데도 없는 진실만 퍼부은 것입니다.


당신이 고민한다 하여도 결국엔 아무것도 해놓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일단 진실의 생성보다 축복의 길로 가는 것이 중요하니, 다시 야수의 앞에 돌아와보면,

마른 침이 계속 넘어가는 상황에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이제 축복의 길로만 들어서면 된다면 아직 끝은 아닙니다.


" 진실이 존재한다면 당신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럼 이제 상황은 되바뀌게 됩니다. 야수는 진실을 판단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어떤 진실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야수는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 증명은 결국 나의 고민(불완전성)에 다가섭니다.


만약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진실이란 집합이 공집합이 되므로 결국엔 이 명제는 참이 되죠. 그러므로 나는 축복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포기 하지 마라. 우리가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없어도 과정으로 이룰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있습니다.

고집스런 진실은 결국은 거짓입니다.

이 때문에 고집스런 진실과 이별할 필요가 있다. 대신 공리와 합의 안의 독립적인 진실과 살면 되는 것 입니다.

이제는 독립적인 진실로 이해해야..


 진실을 말하는 명제가 중요한 부분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연역이든 삼단논법이든 진실을 말하기 위한 이 구조를 만드는 것, 이 구조로 우리가 올바른 사고의 과정을 거치는 것, 이것이 딱딱하게 느끼는 명제의 무른 속 같습니다.


허술해보이지만 한번 맛보면 논리가 완성되는 것 자체가 맛나는 일이죠.


 수학도 마찮가지입니다. 마치 삶처럼!


하지만 줄어드는 지식에만 몰두할순 없죠. 그러기에 다음에는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높은 진실을 발견하는 방법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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